소설리스트

도군-1708화 (807/1,000)

1708화. 가문의 비밀

“좋아! 따르지!”

여무쌍이 멈칫했다. 그리고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원강이 이처럼 화끈하게 승낙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저번엔 죽을 둥 살 둥 괴롭혀도 절대 승낙하지 않았던 그가 이처럼 시원하게 승낙했다. 의심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어째 너답지 않은데? 혹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원강이 뒤돌아 여무쌍을 빤히 바라보았다.

“따르겠다고 했으니 두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 있다는 말에, 여무쌍은 의심으로 불안하던 마음도 금세 녹았다.

“호오. 어디 한번 들어보지.”

“도와줄 수는 있다만 반드시 날 대신해 고원달을 죽여줘야 해.”

그럼 그렇지, 목숨을 걸고 죽이려던 사람인데. 여무쌍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고원달 하나 죽이는 것쯤이야 벌레 한 마리 죽이는 것이랑 다를 것도 없지. 아주 간단해. 네가 내 말을 잘 따르기만 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봤자 다른 사람과 못 만나게 하는 게 다겠지만.”

“고원달을 죽여주기만 한다면, 나를 죽이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말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중에 네가 고원달을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 알 수도 없고. 그러니까 여기서 고원달을 죽이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늘에 맹세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원강은 어리석지 않았다. 만약 쉽게 승낙한다면, 여무쌍이 믿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고원달을 구실로 삼은 것이었다.

여무쌍은 바로 한 손을 들고 맹세를 했다.

“하늘에 대고 맹세하기를, 원강이 내 요구에 따르기만 하면 나 여무쌍은 고원달을 죽여 보답하겠다. 이 맹세를 어길 시, 하늘에서 천벌이 내리리라!”

그리고 원강과 마주 보자, 원강은 칼을 내리고 사막을 바라보았다.

“내 경험으로, 갈황은 사막의 경계엔 없다. 시간을 절약하고 싶다면, 사막의 중심지대로 가는 것이 좋아.”

거짓이 아니었다. 원강은 갈황을 여러 차례 불러본 경험이 있었다. 확실히 사막의 경계에서 갈황을 부르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여무쌍은 두말하지 않고, 그대로 원강의 팔을 잡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 *

여무쌍의 속도로는 그리 먼 곳도 아니었다. 대략 반 시진쯤 날아 가볍게 착지한 그녀는 땅 위에 원강을 내려주었다.

“너무 중앙으로 가면 다른 사람에게 들킬 수 있지. 이 정도면 괜찮지?”

원강은 별말 하지 않고, 여무쌍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쪽에 있는 모래언덕에 올라가 사막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 하!”

여무쌍은 원강 곁에서 두 눈 가득 기대를 반짝였다.

본래라면 원강은 여무쌍의 요구를 따르지 않았을 터였다. 처음 여무쌍이 원강에게 갈황을 요구했을 때, 원강은 그녀가 갈황을 죽일 거라 오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원강은 여무쌍이 갈황을 찾는 이유가 제5 영역으로 가려는 것임을 알았다. 덧붙여, 원강은 제5 영역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원강은 이번에 그곳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원강은 여무쌍을 데리고 안에 들어가기만 하고, 다시 그녀를 데리고 나올 생각이 없었다.

여무쌍과 싸워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든 일이 끝나면 여무쌍이 원강을 죽여버릴 가능성도 컸다.

원강은 처음부터 여무쌍이 그 자신을 살려둘 것이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성존인데, 원강은 아예 그녀의 말을 믿지도 않았다.

그러니 원강은 지금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여무쌍을 제5 영역에 가두기만 하면 도야의 골칫거리를 하나 처리할 수 있었다. 도야가 이미 목연택과 장손미를 처리했으니 자신이 하나를 더 처리하면 도야의 짐을 크게 덜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게 바로 원강이 여무쌍에게 그리도 쉽게 협조했던 진짜 이유였다. 죽음을 각오한 희생, 이것이 원강의 진정한 동기였다.

* * *

반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 한곳에 있는 사막이 큰 진동과 함께 터져나가고 그 안에서 거대한 물체가 몸을 일으켰다.

여무쌍은 신비한 그 장면을 직접 두 눈에 담았다. 수많은 사갈들이 원강의 부름에 답해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작은 산 같은 갈황이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격렬한 꼬리 소리는 방울뱀 소리와 진배없고,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여무쌍은 갈황이 뱉어내는 비린내 가득한 숨길에도 크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원강은 뒤돌아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황을 불러냈으니 이제 가도 되나?”

여무쌍이 곧장 원강을 붙잡고 갈황의 등 뒤에 내려서며 손을 풀었다.

“아직. 갈황을 부릴 수 있으니, 갈황에게 한 곳으로 향하라고 명령해.”

과연 원강의 예상이 적중했지만, 그는 겉으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어디로?”

여무쌍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세상엔 성경, 천도비경, 접몽환계 외에도 상찬이 열어 놓은 한 곳이 더 있다. 바로 이 사막 아래 묻혀있지. 그곳을 찾을 수 있는 건 갈황뿐이야.”

“또 한 곳이 있다고?”

원강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담담하게 응했다.

곧 여무쌍은 원강을 빤히 바라보았다.

“맞아, 그 안에 상찬 부부의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지. 만약 그 비밀을 얻을 수 있다면, 만약 내가 천하무적이 된다면, 네가 비밀을 누설하는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 그때가 되면 네 자유를 보장해 주마! 너는 사람들이 모르는 다른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지 않아?”

원강은 가본 적이 있으니, 당연히 궁금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안을 샅샅이 둘러보기까지 했었다.

원강의 침묵에, 다시 여무쌍이 재촉했다.

“시간 끌지 마라, 갈황은 너무 커서 눈에 잘 띈다. 빨리!”

원강은 바로 뒤돌아 갈황의 머리 부분을 향해 소리쳤다.

“하, 하!”

그에 갈황의 그 거대한 몸이 움직이더니, 그대로 달려나가 모래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둠 속, 모래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여무쌍은 야명주를 꺼냈다. 곧 야명주는 그녀가 법력으로 만든 공간을 밝히기 시작했다.

* * *

갈황이 얼마간 움직였을까. 다쳐서인지 원강은 피로감을 느끼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여무쌍은 그런 원강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담담하게 물었다.

“그 뭐더라, 풍관아라는 여인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다지? 남편도 있는데 말이야. 그 여인이 그리 아름답더냐?”

“성존이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인가?”

“심심하니까. 여기 다른 사람도 없으니, 그냥 대화나 하자는 거지.”

“상관없다면 내가 하나 물어보지. 당신은 여기 다른 세계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당신 혼자 아는 비밀이 아니라면 아마 나를 압박해 갈황을 찾으려는 사람이 당신 하나가 아닐 텐데.”

“어찌 보면 우리 가문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지.”

여무쌍은 진실을 숨기지 않았다. 원강이 이미 자신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문?”

원강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우리 조모님은 사실 상찬의 부인 이향의 하인이었어. 그렇게 당시 우연히 상찬과 이향의 대화를 듣게 된 거지. 어때, 의외지?”

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생각지도 못했어.”

* * *

무변사막의 하늘 위, 날짐승 한 마리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위에 서 있는 우유도와 운희는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한참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운희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우유도한테 이렇게 아무 목적 없이 찾는 건 방법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시간이 꽤 지났어. 여무쌍이 정말 왔다면 도착해도 진작에 도착했겠지. 어쩌면 이미 원숭이를 데리고 제5 영역으로 향했을 수도 있고.”

“원숭이는 쉽게 승낙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놈은 죽어도 쉽게 굴복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만약 승낙했다면, 한가지 가능성밖에 없어요. 바로 여무쌍을 그곳으로 데려가 그 안에 가둬버리려는 생각인 거지요.”

운희가 깜짝 놀랐다.

“그럼 여무쌍이 원강을 용서할까?”

우유도의 얼굴에 슬픔이 떠올랐다.

“그 원숭이가 못할 것 같아요? 그 빌어먹을 놈이 목숨을 아까워할 것 같습니까? 그런 멍청이 짓거리를 한 게 어디 하루이틀 일입니까?”

운희도 할 말이 없었다. 차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원숭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뿐, 운희도 말문이 막혔다.

다시 우유도의 반응을 살피던 운희는 우유도가 많이 걱정하고 조급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운희는 그를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찾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야. 만약 정말 여무쌍과 만난다면, 너와 내가 어떻게 상대하겠어. 당연히 그 손에서 원숭이를 구해낼 수도 없겠지. 네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 봤어?”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여무쌍이 두 세계를 이은 통로가 움직인다는 걸 알고 나중을 위해 원숭이 목숨을 살려 놓기만 바랄 뿐이에요. 제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건 원숭이가 멍청이 짓을 할까 봐서지요. 여무쌍을 그 안에 가두려는 생각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한다면 죽을 수도 있어요.”

우유도의 눈빛은 다시 걱정으로 뒤덮였다. 원강과 어떻게 연락해야 하는지,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손에 산하정와 탐천환이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있었다면 제5 영역에라도 들어가 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이렇게 목적 없이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운희는 우유도를 살피며 남몰래 탄식했다. 원숭이에게 무슨 복이 그리 많아서 이런 형제를 얻었단 말인가.

두 사람은 끝내 원강을 찾지 못했다. 심지어 이미 무너진 무변각까지 둘러보았다. 무변각은 이제 사막 가운데의 호수가 돼 있었다. 수원지이기도 하니 쉽게 버려지지 않았고, 누군가 호수 주위에 새 건물을 지어 올리고 있었다.

둘은 또 주위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혹시 사갈이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는지 알아보기도 했지만, 그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다.

결국 우유도는 운희를 데리고 사막의 경계에 있는 한 곳으로 향했다.

* * *

공중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우유도가 아래 있는 산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원숭이가 정말 이 사막에 도착했고 살아서 떠났다면 사막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진 않을 겁니다. 가장 빠른 길을 통해 요마령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수도 있고, 여무쌍에게 끌려갔을 수도 있지요.

이제 우리 나뉘어 움직입시다. 전 여기서 기다릴 테니 누님은 지금 즉시 남주로 돌아가 성경에 전서를 보내주세요. 여무쌍이 성경으로 돌아왔는지 성경 입구를 주목해 달라고요.”

“너 혼자 여기 두는 건 안 돼!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잖아. 차라리 내가 여기서 기다릴 테니 네가 남주로 돌아가는 건 어때?”

“전 괜찮을 거예요. 만약 여기서 여무쌍을 만난다면, 누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하지만 저한테는 방법이 있지요. 그러니 쓸데없는 말은 이쯤에서 접고 얼른 돌아가세요.”

“알았어, 그쪽에서 연락만 하고 바로 돌아올게. 조심해!”

우유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짐승에서 뛰어내렸다. 그렇게 그는 아래에 있는 척박한 산지에 내려섰다.

운희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날짐승을 돌려 빠르게 멀어져 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