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화. 육성, 인간계에 자리 잡다
이윽고 오상이 긴 침묵을 깨고 나섰다.
“여무쌍에게 분명 문제가 있다. 정말 여무쌍이 맞다면 이미 중상을 입었거나 손을 쓰기 어려운 상황일 것이 분명하다!”
원색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진감괴를 빤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여무쌍의 성격으로 보자면, 저자는 이미 죽었어야 맞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추를 포함한 이들은 일리가 있음을 알았다.
이쪽에서 여무쌍의 세력을 공격했다. 여무쌍이 이곳에 나타나 사람들을 물리는 것쯤이야 예상 가능한 범위였지만, 그녀가 자신의 세력이 아닌 진감괴와 온전히 대화를 나눴을 리는 없었다.
평소라면 여무쌍이 어떠했을지 손쉽게 상상이 갔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여무쌍은 절대 가만있지 않았을 터였다. 참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일단 진감괴를 죽이고, 두려움에 떠는 다른 이들을 쫓아냈어야 정상이었다.
독무허가 망설이다 말했다.
“설마 갈황에게 상처를 입은 그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갈황이 그녀를 상처입힐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다들 시선이 하나둘 오상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내 설파파가 입을 열었다.
“여무쌍은 갈황을 찾기 위해 원강을 찾았다. 뭘 위해서일까?”
“나도 몰라. 그녀가 여전히 원강을 잊지 못하는 걸 알았더라면, 그리 쉽게 데려가도록 놔두진 않았을 거야. 하나 확실한 건, 아직 살아 있으면서 자신의 세력이 공격받는 걸 두고 봤다는 게 이미 문제를 설명하고 있지. 지금 여무쌍에게 문제가 생겼고, 감히 우리 앞에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남도림이 갑자기 나섰다.
“여무쌍이 갑자기 성나찰 일에 개입한 건, 절대 성나찰을 죽이기 위해서는 아닐 거다. 그렇지 않으면 성나찰이 죽는 걸 지켜봤으면 그만이니까.”
이는 성나찰의 생존 여부에 관한 대답이 되었다. 모두가 깨달았다. 성나찰은 살아 있었다. 여무쌍은 성나찰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성나찰의 실종이 의미하는 건, 여무쌍이 성나찰을 데려갔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째서 성나찰을 데려갔을까?”
오상이 홀로 중얼거리며, 두 눈을 번득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상은 뭔가를 추측하고 있었다. 여무쌍이 갈황을 찾은 건 제5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제5 영역은 상찬 부부와 연관이 있었다.
이제 여무쌍이 성나찰을 찾았다. 성나찰도 상찬 부부와 연관이 있었다. 오상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여무쌍은 정말 마전에 없는 비밀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여기저기 이해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
대화 일부는 외부 사람에게 들려줄 수 없는 내용이라 여섯은 곧 다른 사람들을 다 물리고 의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리저리 의논해 봐도 결국은 어떻게든 여무쌍과 성나찰을 찾아내야 한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는 여무쌍만 해도 이미 그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는데, 거기에 큰 위협이 되는 성나찰까지 인간계로 튀어나왔다. 여섯이 감당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성나찰의 목표는 너무나 명확했다.
답이 없었다, 일단 성나찰을 찾아야 했다. 성나찰이라는 큰 위협에 맞서, 여섯은 일단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계에 머물기로 했다. 혹시라도 소식이 오가는 사이에 놓칠까 봐서였다.
그렇게 여섯은 구역을 나눴다. 기본적으로 각 나라를 기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편으론 직접 성나찰과 여무쌍의 행방을 찾고, 한편으론 표묘각 내부 조사를 시행했다.
정세가 갈수록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여무쌍의 혼란스러운 개입에 육성은 더 이상 담담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정세가 통제를 벗어났음을 느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여무쌍 정도는 되어야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그런 여무쌍이 큰 위협인 성나찰과 손을 잡은 듯했다. 이런 때일수록 더 하나 된 표묘각이 필요했다. 표묘각은 하루라도 빨리 도둑맞은 무량과 일을 처리해야 했다.
* * *
여섯이 각기 머물 곳은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각자 흩어졌다.
각자의 길을 떠난 뒤, 오상은 멀리 가지 않고 부근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그 안 그늘진 협곡에 10명이 숨어있었다.
그늘진 협곡 아래, 얼굴엔 복면을, 몸에는 검은 피풍의를 입은 사람들이 오상을 향해 분분히 예를 올렸다.
이어 오상이 손을 들어 손짓하자, 10명은 피풍의를 풀어 양팔을 활짝 펼쳤다. 피풍의 안엔 거무스름한 작은 목패(木牌)가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모두 부문(符文)이 음각된 음목(陰木)이었다.
오상은 그중 하나를 들어 뭐라고 중얼거린 뒤 법력을 사용했다. 목패 위 부문은 빛을 내며 움직이더니, 보일 듯 말듯 가물가물한 빛을 뿜어내는 영광(*靈光: 신령하고 성스러운 빛)이 되었다.
빛은 한줄기 안개처럼 어둠에 잠기고, 오상은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운 영광을 다시 불러들여 음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음목 부문이 다시 빛을 내며 움직이더니, 천천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오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차 한 대가 남주부성을 나서 교외에 있는 농가 밖에 멈춰 섰다.
그 마차에서 내린 관방의는 즉각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부 노릇을 하던 노육은 그대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건물로 들어가자 그곳에 운희 일행이 있었다. 관방의는 다소 의아해졌다.
“여기 와서 돌아오진 않고 난 왜 부른 거예요? 어떻게 됐어요, 도야는요?”
운희는 한쪽에 무명천으로 가려진 문을 가리켰다. 관방의는 더는 묻지 않고 그대로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우유도는 처지고 찢어진 창호를 이어붙인 낡은 창문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리고 관방의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방 안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침상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관방의는 당연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 누구인지 살펴보았다. 여인은 지저분한 얼굴로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은아? 휴, 다행이야. 무사하네. 도야가 직접 나섰으니 당연히 문제없지.”
관방의는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이내 큰 짐 덜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우유도를 놀리는 농담이었지만, 곧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관방의는 즉각 침상에 걸터앉아 손을 뻗어 은아를 한번 살펴보았다.
“뭐야, 다쳤어?”
창문 앞에 서 있던 우유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은 뒤따라 들어온 운희가 대신했다.
“중독됐어. 근데 이젠 괜찮아. 아마 깨어날 때쯤이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하지만 원기는 크게 상했을 거다.”
관방의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어쩌다가?”
운희는 우유도의 반응을 잠시 살펴보았다.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운희는 어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관방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때, 우유도가 드디어 뒤를 돌았다.
“곧 깨어날 거야. 준비해줘, 나중에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해서 은아를 데리고 들어가 군주 옆에서 지내게 해줘.”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관방의가 잠시 머뭇거렸다.
“군주는 똑똑한 사람이야. 갑자기 은아를 데려가면 의심하지 않을까?”
“군주가 아니면 이 먹보를 놔둘 곳이 없어. 지금은 내가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고. 군주가 뭔가 발견하는 것에 관해선……. 숨길 수 있으면 숨기지만, 숨길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죽은 지 시간이 좀 지났으니, 소나기는 지나갔다고 할 수 있잖아. 군주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해도 관방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상숙청이 정말로 우유도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썩 유쾌하진 않을 터였다. 군주를 같이 속인 사람 중 하나로서 다시 얼굴을 보면 참 민망하지 않을까.
“하…….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났으니, 어디 뭐라고 변명하는지 보자고.”
우유도가 고개를 젓는 관방의를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
“내가 변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자 관방의는 한숨을 내쉬며, 놀리듯 말했다.
“도야도 걱정하지 않는데, 내가 걱정할 것 없겠지? 이제 와 또 뭘 숨겨. 그냥 다 말해 주자고. 나중에 은아 데려다줄 때 그냥 대놓고 알려주면 되지.”
우유도는 즉각 경고했다.
“쓸데없는 문제 만들지 마. 안 그래도 복잡한데 여기서 더 일 만들려고?”
“됐어! 빨리 가서 준비할게.”
관방의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눈을 흘기고는 단잠에 빠진 은아를 한번 보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확실히 준비가 필요하긴 했다. 그래서 우유도도 바로 은아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 은아는 초려별원에서 즉각 상숙청에게 보낼 수 없었다. 은아가 돌아온 것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했다.
* * *
관방의가 떠난 후, 우유도가 방에서 나와 원강에게 말했다.
“홍랑은 할 일이 있어. 지금 집에 있을 사람이 필요해. 여긴 나 혼자 있으면 충분하니까 너와 누님은 먼저 저 여인을 데리고 돌아가.”
여인은 여무쌍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원강과 운희는 당연히 이견이 없었지만, 한쪽에 있던 여무쌍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정확히 해야 할 거예요. 전에 했던 약조는 지킬 건가요?”
원강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무쌍의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이는 가볍게 흘러가는 만남도 아니었다. 나이가 몇백 살인지도 모르는 여인과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
물론 겉보기엔 그 나이가 티도 나지 않는다지만, 평생의 배필을 동안으로 결정할 순 없는 것 아니던가. 순수하고 바른 성품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어째, 무쌍성존이 하루라도 빨리 신혼 방에 들어가고 싶은 건가?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았잖아. 버틸 수 있겠어?”
우유도는 직접적으로 비아냥댔지만, 여무쌍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 확실히 하루라도 빨리 신혼 방에 들어가고 싶네요. 버틸 수 있는지 없는지는 내 사정이죠.”
뻔뻔한 응수에 원강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우유도는 그런 원강을 힐긋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무쌍성존이나 돼서 자신을 그리 낮출 이유가 있을까? 혼인은 종신대사(終身大事)야, 둘이 모두 원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욕되게 할 뿐이지. 차라리 조건을 바꾸는 건 어때. 조건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고.”
여무쌍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정말 다른 조건을 꺼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제 이쪽과 성나찰의 관계를 알고, 서해당이 우유도의 명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거기에 제5 영역의 일까지. 이들이 결코 간단한 인물들이 아니란 증거가 속속 보이고 있었다. 여무쌍은 그중 일부를 직접 목격한 자였다.
여무쌍은 오랫동안 당당한 구성으로 군림한 자였다. 바보가 아니었다. 여무쌍은 이들을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서해당, 만수문, 성나찰, 일련의 사람들과 일들까지 모두 종합한 결과였다.
목연택과 장손미의 죽음도 그리 간단하진 않을 터였다. 그건 사고가 아니었을 것이다. 우유도의 계략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구성은 오랜 시간 경쟁했음에도 서로를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우유도는 그 일을 이뤘다. 심지어 구성 중 하나인 여무쌍까지 잡아들이지 않았던가.
여무쌍은 이미 모든 힘을 잃었다. 설사 이들이 그녀를 용서해 주고, 풀어준다고 해도, 갈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머지 육성이 그녀를 내버려 둘리가 없었다. 이곳을 떠나면 여무쌍은 바로 죽은 목숨이었다.
목숨을 부지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요구였다. 여무쌍은 목숨을 부지한다는 전제하에,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다. 여태 저 높은 곳에서 오래도록 군림한 자가 어찌 다른 사람에게 마음대로 짓밟히는 삶을 살고 싶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