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3화. 벽혈단심(碧血丹心)
관방의는 자신도 모르게 우유도를 힐끗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어도 각기 다른 결론을 내놓았다.
이윽고 상숙청이 다시 우유도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자신이 무엇을 간과한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에 우유도는 서탁 한쪽에 있는 지필묵을 내주며 위로하듯 이야기했다.
“급할 것 없습니다. 영왕께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셨다고 하셨지요? 이참에 영왕께서 뭐라고 하셨었는지 한번 적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글로 적어보는 게 그냥 떠올리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뭔가 떠오를 수도 있고요.”
상숙청은 곧 붓을 들고 곰곰이 생각하며 글을 적어 내려갔다. 그녀의 글씨는 매우 정갈했다. 맞은 편에선 우유도가 연이어 차분히 말을 건넸다.
“천천히 생각하고 쓰세요. 급할 것 없습니다. 영왕께서 누구를 언급했는지, 무슨 일을 언급했는지 말한다 생각하고 당시 상황을 정확히 적어주세요.”
상숙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글을 적었다. 최선을 다해 당시를 회상하고 천천히 써 내려가니, 확실히 그냥 떠올리는 것보단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 글을 적던 상숙청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검에 대한 것도 적을까요?”
“영왕께서 당부하거나 언급한 것 중에 기억나는 건 다 적어주세요.”
대답하던 우유도가 갑자기 멈칫하며 물었다.
“무슨 검 말입니까?”
“동곽 선생님의 패검이요. 부왕께서 당시 제게 주시며 상청종에 갈 때 반드시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우유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처음 만날 때 내게 준 그 검 말입니까?”
상숙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동곽 선생님께서 당시 패검을 부왕께…….”
짝!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유도가 본인의 이마를 내리쳤다. 기억이 난 것이다! 그는 곧바로 상숙청을 보며 정색했다.
“군주, 그처럼 중요한 물건을 왜 여태 말씀하지 않은 겁니까?”
상숙청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당시 관방의는 그녀에게 얼굴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서만 물었었다. 이에 상숙청도 동곽호연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만 떠올렸지, 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된 이유를 찾자면, 상숙청도, 관방의도 이게 어떤 일에 얽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얼굴 치료에 관해 물었으니, 그에 관한 대답을 한 것일 뿐, 두 사람의 잘못이라고 할 건 하나도 없었다.
우유도 역시 상숙청이 마치 잘못한 사람처럼 난감해하는 것을 보고, 급히 쓴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군주 잘못이 아니지요. 이건 내 잘못입니다. 분명 직접 봤던 물건이면서 떠올리지 못했다니.”
그리고 우유도는 즉시 관방의를 돌아보았다.
“검은?”
“방에 걸려 있을 거야.”
관방의는 우유도가 말하는 것이 그 패검임을 바로 알아들었다.
“지금 당장 가져와.”
매우 중요한 일 같아 보여서 관방의는 별말 하지 않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우유도는 자리에 앉아, 불안해하는 상숙청을 진정시켰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차 드시지요.”
상숙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도야, 혹시 부왕이 계획하신 큰일이 제 얼굴과 연관이 있는 건가요?”
상숙청은 혹시 자신이 무슨 큰일에 지장을 초래한 것은 아닌지, 매우 불안해했다. 우유도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답했다.
“군주,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확실한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약조하겠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다른 사람 모두에게 비밀로 한다 해도 군주에게는 반드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일은 군주가 직접 움직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 추측이 맞다면, 영왕께선 군주를 위해 뭔가 남겨뒀을 겁니다. 쉽게 말해, 영왕은 군주 얼굴의 반점을 없앨 방법을 남겨뒀다는 말입니다.”
반점을 없앨 방법? 상숙청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우유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군주,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나와 얘기한 건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해선 안 됩니다. 왕야께도요.
만약 이 일의 심각성을 모르고 혹시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한다면, 군주의 목숨은 물론 왕부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럼 남주는 처참한 학살로 피가 강처럼 흐를 테지요. 그것도 육성이 직접 움직여서요. 단순히 겁주는 말이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말을 마친 뒤, 우유도는 무료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은아를 돌아보았다. 아마 저 먹보라면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알아듣지 못했을 터였다.
상숙청은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무슨 음모를 꾸몄기에 육성이 직접 손을 쓸 정도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상숙청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라버니도 도야께서 아직 살아 계신 걸 알고 있나요?”
우유도가 빙그레 웃었다.
“당연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군주의 오라버니가 감히 어찌 자금동이 내쫓은 초려별원을 받아들일 생각을 했겠습니까. 몽 사령관과 남 선생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셋뿐입니다.
가능하다면 군주께선 그들을 너무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내가 살아있음을 알고 있다는 걸 그들에게 알리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내가 죽은 것처럼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 퍼지면, 성경은 남주를 쓸어버릴 것입니다.”
상숙청은 다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때, 관방의가 우유도가 원래 가지고 다니던 패검을 가지고 돌아왔다.
우유도는 검을 받고, 서탁에서 벗어나 자세히 한번 살펴보았다. 끝에서 끝까지 아주 꼼꼼하게,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오랫동안 몸에서 떼놓지도 않았던 검이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살펴본 것은 처음이었다.
곧 상숙청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우유도의 옷을 꼭 붙든 은아를 자신 곁으로 끌어왔다. 은아가 도야에게 방해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지금 곁에 있는 세 사람은 우유도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은아의 눈엔 우유도가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게 참 재미있어 보였다.
보검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다 우유도가 갑자기 검을 뽑아들었다.
챙!
빛나는 광채와 함께 그의 눈은 검신에 적힌 네 글자에 머물렀다.
「벽혈단심(碧血丹心)」
전엔 별생각이 없었던 이 글자가 지금 이 순간 유독 눈에 띄었다. 우유도는 눈을 가늘게 뜨다가 홀연 미소를 그렸다.
“정말 이 검일 수도 있겠어. 진정 뭔가 있을 수도 있겠군.”
관방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야가 성경에 간 이후 그 검은 줄곧 내게 있었어. 가끔 심심할 때마다 몇 번씩 꺼내서 살펴봤는데 별다른 게 없던데? 무슨 문제가 있나?”
“내가 수년간 가지고 다녔고, 몇 번이나 이 검으로 전투를 치렀지. 막무가내로 휘둘렀었지만, 별다른 문제를 발견하진 못했어. 오늘 군주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이 ‘벽혈단심’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겠지.”
관방의가 얼떨떨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그 글자를 반복해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별다른 것이 없어 보여, 얼굴엔 의문이 떠올랐다.
상숙청도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야, 혹시 그 검은 불 속에서만 그 진실을 알 수 있다는 뜻인가요?”
우유도는 상숙청을 한번 보며 빙그레 웃었다.
“맞습니다. 바로 맞췄습니다.”
“그저 한번 추측해 보았을 뿐이에요.”
상숙청은 조금 부끄러워했다.
이내 우유도가 관방의에게 말했다.
“가서 준비 좀 해봐, 진실이 어떤지 한번 시험해보면 되지.”
“뭘 준비하라는 거야? 둘이서 도대체 무슨 수수께끼를 하고 있는 건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관방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상숙청조차도 뭔가 알아차린 듯한데, 자신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지능이 바닥을 치는 것만 같았다.
우유도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관방의만 빤히 쳐다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보니 놀리는 게 분명했다. 관방의는 즉각 상숙청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상숙청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벽혈단심이란 글자와 연관이 있어요. 누군가 검에 적힌 이 글을 본다면 일반적으로 검이 충성스럽길 바라는 마음을 검면에 새겼다고 생각하고 말 거예요. 하지만 만약 이 검에 뭔가 비밀이 있다면, ‘단심’이란 글자는 검이 숨긴 비밀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지요.
결론적으로 저 네 글자는 비밀을 여는 열쇠일 가능성이 매우 커요. 홍 언니, 간단히 말하면요. 검이 어떤 상황에서 피처럼 붉게 달아오를까요?”
“불로 단조를 할 때 몸이 붉게…….”
관방의는 말하는 동시에 뭔가를 깨달았다.
* * *
이윽고 여무쌍을 데려다주고 온 운희와 원강이 밀실로 들어왔다. 원강의 손에는 서신이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상숙청이 이곳에 있고, 우유도가 가면을 벗고 상숙청과 만나고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때, 상숙청도 원강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원야?”
그녀도 소문을 들어, 원강이 마교의 성자가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불어 원강이 실종됐다는 것도, 팔이 한쪽 잘렸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실종된 게 아니었나? 어째서 여기 나타난 거지? 그러고 보니, 양팔도 멀쩡했다.
상숙청도 이제 이곳 사람들 비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임을 깨달았다.
“군주님.”
곧 원강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챙!
우유도가 보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상숙청에게 말했다.
“군주께서 나를 위해 의관총을 만드셨다지요?”
상숙청은 그 질문에 민망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정을 생각해, 그곳을 자주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제 군주께서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의관총에는 앞으로도 계속 방문해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강과 운희, 관방의 모두가 저도 모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우유도는 상숙청에게 의관총이 가지는 의미, 그것을 담담히 축소했다. 아니, 어쩌면 그냥 무시해버린 건지도 몰랐다. 지금 상숙청이 어떤 심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내 상숙청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 알겠어요.”
“이곳은 오래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의심받을 수도 있고, 저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직접 배웅해드리진 못하겠습니다.”
상숙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숙였다.
“제가 도야를 방해한 것 같네요.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우유도의 신호에, 관방의가 상숙청의 안내를 자청했다. 은아는 우유도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상숙청의 말은 따르는 편이라 결국 할 수 없이 상숙청에게 이끌려갔다. 그렇게 온 방법 그대로 떠나갔다.
곧이어 우유도는 검을 가로로 들고 살펴보며 감탄을 뱉었다. 이 예상이 맞는다면, 자신이 줄곧 찾으려던 비밀 핵심이 늘 바로 제 곁에 있던 것이었다. 상숙청은 이 검을 간과했고, 이는 우유도 본인 역시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다시 되돌아보면, 동곽호연은 자신의 신물로 영왕에게 패검을 주었다. 영왕은 그걸 다시 상청종에 돌려주라고 했다. 당시 까마귀 장군의 일을 총괄하던 동곽호연은 중요한 뭔가를 이 검 안에 넣어뒀을 가능성이 있었다.
간과했다, 이건 분명 자신이 간과한 것이었다.
그 질문은 당시 관방의도 물었던 질문이었으나, 사실 조금 전 우유도는 그냥 화제를 돌리고자 상숙청에게 그 질문을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