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1화.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는 곳, 그 이름 전쟁터라!
제경.
성곽 위에서 고원달은 아주 초췌한 모습으로, 성곽 바깥에 또 다른 성벽이 생겨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호연무한은 병력을 이끌고 느긋이 도착한 후, 급하게 공성전을 벌이지 않았다. 그저 대군을 지휘해 경성 바깥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흙을 쌓아 올리고, 흙산을 앞으로 무너뜨리고, 그리고 그 위에 또다시 흙산을 쌓고 다시 앞으로 무너뜨렸다.
흙산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이젠 흙 무너지는 곳이 제경 성벽과 같은 높이까지 올라올 지경이었다.
호연무한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공성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 조급히 경성을 탈환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이렇게 천천히 땅을 쌓아 올린 후 대군이 밀고 들어오면 결국 큰 사상자 없이 경성을 손쉽게 탈환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 앞에 활과 같은 예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흙산을 향해 화살을 쏜다 한들 무슨 효과가 있을까. 그렇다고 나가서 싸우자니, 그건 오히려 저쪽에서 환영하는 것이었다.
고원달은 창자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처음부터 잘못된 길을 택했다. 제국을 배신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고품이 증오스러웠다. 이제야 그도 자신이 고품에게 이용당했음을 깨달았다. 고품이 애초 자신에게 지원군을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아직도 모를 수는 없었다.
고품에게 속아 제경을 공격해 들어간 그 순간부터, 후진군과 제군의 30만 지원군은 제경을 포위했고, 고원달의 대군은 다신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진국이 지원군을 보낼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느긋이 도착한 호연무한은 어떠한 걱정도 없이 이곳에서 아주 느릿하고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제경을 공략하고 있었다.
고원달을 더욱 그를 슬프게 하는 건, 표묘각이 갑자기 명령을 내려 천하의 날짐승을 모두 몰수해 갔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도망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도망치려면 저 수많은 적군을 뚫고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절망, 그 한마디 외엔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비애에 잠긴 건 고원달만이 아니었다. 영허부 장문인 상임선, 수정각 장문인 장봉, 대악산 장문인 낙언진 역시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고, 비통했다.
세 장문인도 현재 고원달과 같이 성벽 위에서 같이 시찰을 돌며 이젠 성벽 높이를 훌쩍 넘어가는 맞은편 흙산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저 흙산이 앞으로 한 번만 더 넘어지면, 성벽과 흙산 사이의 공간을 메울 수 있고, 그 정도 언덕이면 제군이 총공격하기에도 문제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공성을 한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순리대로면 자신들이 높은 곳에 위치해서 이래쪽에서 쳐들어오는 적군을 맞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눈앞엔 적군이 당당히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제군이 이 정도까지 공사를 진행했다는 건, 언제든 마지막 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 장문인의 마음도 참담했다. 다들 고품의 비겁한 수단에 치를 떨었다. 고품은 이딴 방식으로 자신들을 이용하고,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전쟁이란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는 곳이라더니, 오늘에야 그 말을 뼛속 깊이 새겼다.
본디 전쟁터를 누비는 장수들은 전술이란 목적 아래 온갖 수법을 쓰고, 전쟁터 병력과 세력을 버리는 패로 이용하기도 했다. 큰 계획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개의치 않고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돼서야 그 방대한 계획의 자초지종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세 장문인도 자신들이 완벽하게 속았음을 알았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마냥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속아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걸 깨달았어도 때는 이미 늦은 법, 이제 와 고품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이는 문파 간의 은원처럼 서로 한번 싸우고 끝나는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보통 문파 간 은원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이들이 나서서 고품의 비겁함을 욕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것이, 아마 이번 일과 상관없는 사람들은 고품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칭송할 것이 분명했다.
전쟁에선 오직 승패만이 존재했다. 과정이라는 것이 모두 용인되는 것이 바로 전쟁터였다. 따질 것도, 애초에 따지러 갈 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들에겐 고품을 욕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이들은 고품을 욕하는 전서를 보냈지만, 고품은 미동도 없었다. 그냥 후진군이 전면 철수할 줄은 몰랐다며 전장에 변화가 생겨 전략을 수정했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결론적으로 유감 표명, 그게 다였다.
물론 고품은 세 문파와 약속한 건 꼭 지키겠노라며, 진국 조정이 천하에 공표한 것이니 결단코 어기지 않겠다고 확답을 주었다. 그러나 그 뒤엔 세 문파가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기만 하면 약조를 지킬 테니 혹시 누군가 진국을 배신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를 덧붙였다.
끝으론 지금 제국이 이 지경이 되고 제국 황제와 호연무한의 두 아들이 죽은 건 모두 그들의 죄니 포위망을 뚫을 때 조심하란 당부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건 당부도, 뭣도 아니었다. 세 문파에게 진국을 배신할 생각하지 말고, 목숨 걸고 제경을 지키든, 아니면 알아서 포위망을 돌파하란 경고였다.
세 문파는 정말 피를 토할 정도로 분노를 느꼈다. 제경을 지키라고? 수백만이 제경을 포위하고 있었다! 호연무한이 저렇게 나오는데, 사상자를 제외하면 30만도 채 안 되는 인원으로 어찌 제경을 지키란 말인가!
포위망 돌파는 더 말 같지도 않은 얘기였다. 수백만 대군을 돌파한들 그 후엔 뭐 낙원이 기다리고 있겠는가?
세 문파는 이미 진, 위 전쟁에서 원기가 크게 상했다. 한 번만 더 손실을 본다고 해도 문파 세력은 남아나지도 않을 터였다. 그 소수의 인원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진국이 정녕 약속을 지켜 3개 주를 준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받아도 제대로 지킬 수도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필부무죄(*匹夫無罪: 힘이 없는 자, 죄는 아니다), 회벽기죄(*懷璧其罪: 옥 즉, 귀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탐하는 자가 있어 죄가 됨)라 했던가.
힘없고 만만한 이들을 다른 문파들이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으니, 준다고 넙죽 받는 건 그냥 죽고 싶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진국은 약속을 지켰건만,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건 순전히 나의 잘못인데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랴. 그렇다고 주는 것도 거절한다면, 더더욱 누구도 원망할 길이 없었다.
더 환장하는 건, 표묘각이 모든 날짐승을 몰수했다는 것이었다. 이건 거의 혈로를 뚫고 돌파해야 한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수백만 대군을 정면으로 뚫고 나간다? 심지어 저들 중엔 수많은 수행자가 섞여 있었다.
하……. 정말 상상만으로도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 * *
중군 군막.
제국 황제 호진을 필두로 많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호연무한은 즉각 서탁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포권으로 예를 올렸다.
“폐하!”
그 뒤로 호진을 따라 들어온 3대 문파 장문인 우문연, 북현, 삼천리에게도 포권을 했다.
호진은 예를 거두라며 손짓하곤 호연무한의 앞을 우물쭈물 서성였다.
그는 진정으로 호연무한을 존경했다. 일단 지금만 봐도 호연무한이 있었기에 군의 사기가 유지될 수 있었다.
사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지금은 호연무한의 위엄으로만 군심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정세를 이렇게라도 안정시킨 건 오로지 호연무한의 공이었다. 그가 아니면 군심은 진작에 흩어져 각자 살길을 찾아 도망쳤을 터, 이제 호연무한이 없는 제국은 그 즉시 멸망으로 치달을 것이었다.
이 외에도 호진이 호연무한에게 크게 감사하는 건, 호연무한이 바로 자신을 지지해줬기 때문이었다. 호연무한은 도망친 수많은 황자 중 호진을 지지해주어서, 호진이 최종적으로 황위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상 지금 병권을 가진 호연무한만이 황위의 새 주인을 지목하고 지지할 수 있었다. 그만큼 호연무한의 한마디는 3대 문파의 말보다 더욱 영향력이 컸으며, 3대 문파도 현재 호연무한과 대립을 피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사실 이런 시기에 황제가 된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최소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황자들을 보자면 나쁜 일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황족들은 그 존귀하고 높은 태생이 무색할 정도로 초라한 취급과 그들로선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을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에 반해 호진의 가족만은 아주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호진도 장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런 시기에 신분을 내세워봤자 역경에 처한 장병들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현 제국 황실은 황자가 죄를 범해도 백성과 동일한 처벌을 하고 있었다. 호진은 황족에게 경고하기 위해, 황족의 대우를 요구하는 황족 2명을 이미 사형에 처했다.
배가 뒤집힐 참이었다. 일치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필요도 없었다. 이는 민심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황족 귀부인들도 잡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최소한 빨래나 요리 같은 일상생활 같은 건 스스로 해결했고, 다들 장병들이 먹는 것과 같은 걸 먹었다. 곱게 자란 황족들의 손엔 하나둘 물집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렇듯 다들 고생인 반면, 황제 호진과 가족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과는 상황이 달랐다. 최소 머리가 잘려 나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소유아는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를 포기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먼저 나서 일했고, 장병들과 같은 것을 먹었다. 시간이 나면 호연위와 호청청의 딸은 친딸처럼 돌보기도 했다. 친아들을 돌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호연무한의 손주는 가장 먼저 돌봤다.
그녀는 지금 자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호연무한의 지지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의 마음가짐은 처음부터 다른 황족들과 달랐으니, 고생해도 고생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호진은 소유아를 보면 늘 흡족했다. 그녀는 경중을 아는 여인으로, 지금 이런 상황에서의 행동도 그를 매우 만족시켰다. 소유아 역시 명문대가의 아가씨이지만, 다른 귀족들이 가진 그 흔한 허영심이란 고질병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며칠 새 그는 양쪽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이 며칠 사이에 수년은 늙어버린 듯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현 제국의 상황에 황제는 정말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긴 밤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어도 악몽에 시달리는 날이 허다했다.
제국의 수많은 땅은 이미 텅텅 비어 버렸다. 고품의 전략적 압박하에, 수많은 제국 백성이 난민이 됐고, 이전 위국의 땅으로 계속 넘어가고 있었다.
고품이 큰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대결하는 게 아니라, 각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군의 전략적 허점을 공략하며, 제군이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을 줄여가고 있었다.
그 모든 건 바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인심은 더욱 흉흉해져가니, 호진이 아무리 노력해도 물 같은 사람의 마음을 되돌릴 수가 없었고,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다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각자의 희망을 향해 나아갔다.
본래 배불리 먹고,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실속 없는 그림의 떡이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그걸 실제라 믿는 이는 없었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호연무한이 먼저 침묵을 깨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