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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744화 (843/1,000)

1744화. 천하제일의 미인

한국 황궁.

대내총관 창덕이 상소를 살피고 있는 섭진정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폐하, 연국 쪽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섭진정이 붓을 내려놓고,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호오? 상건웅이 정말 사람을 보냈단 말이냐?”

창덕이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예, 방금 도착했습니다. 이미 지금 거화궁(居華宮)에 입궁했습니다.”

섭진정은 크게 흥미가 동한 듯 벌떡 일어나 미소를 지었다.

“가자! 가서 얼굴이나 보자꾸나.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무려 두 나라의 제왕이 잊지 못하는지 오늘 짐이 직접 보아야겠다.”

창덕이 곧장 앞으로 나와 길을 열었고, 섭진정을 거화궁으로 이끌었다.

* * *

이윽고 섭진정은 백의를 입은 아름다운 한 여인을 만났다. 하지만 여인은 머리에 비단이 달린 사립(纱笠)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선녀 같은 기품이 느껴졌다. 실로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방 안의 궁녀들이 분분히 절을 하며 예를 올렸다. 반면 여인은 천천히 무릎을 굽혀 반준례를 올렸을 뿐 소리는 내지 않았다.

섭진정은 일어나라 손짓하고는 여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여인의 얼굴을 가린 비단을 거뒀다.

도무지 눈길을 돌리려야 돌릴 수가 없었다. 섭진정의 시선은 그대로 여인의 얼굴에 박혀버렸다.

미인은 바로 이전 송국 황제 목탁진이 총애하던 아작이었다. 목탁진은 살을 에는 듯한 고통으로 아작을 상건웅에게 보냈고, 아작은 그렇게 상건웅의 총애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 한국이 상조종을 도우려는 모습을 보이자, 조급해진 상건웅은 사신에게 한국과 소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한국의 대전략은 이미 결정된 상태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신이 무슨 말을 해도 섭진정은 당연히 다 거절하기 바빴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작을 보내면 한번 생각해본다고 언급했었다.

섭진정도 그저 둘러대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었다. 아무리 급해도 상건웅이 그런 치욕을 감수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상건웅이 정말 그 미인을 보내왔다.

물론 섭진정도 아무 까닭도 없이 아작을 언급한 건 아니었다. 그도 처음부터 아작에 관한 생각이 없었다면, 아무리 둘러댄다 해도 그녀를 언급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목탁진이 총애하던 여인이 상건웅에게로 간 뒤, 상건웅은 그 수많은 후궁 중 오직 이 여인만을 총애했다고 전해졌다. 두 제왕의 성격은 판이했고 좋아하는 것도 달랐다. 그런데 둘 다 한 여인을 그토록 총애했다. 섭진정은 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두 제왕이 모두 흠뻑 빠진 것인지, 내내 궁금했었다.

섭진정은 곧 아작이 쓴 사립을 풀어 아무에게나 던져버렸다. 창덕은 빠르게 다가와 두 손으로 사립을 받아 들었다.

폭포처럼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아작은 화장기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백옥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선녀가 따로 없었고, 사람의 영혼을 흔들만한 경국지색이었다.

긴 속눈썹 아래엔, 맑고 빛나는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보였다. 그녀는 섭진정의 진한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 힘겨워 고개를 살짝 한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백조처럼 길고 아름다운 목이 드러나 더욱더 시선을 끌었다.

여인은 이토록 아름다운 미모를 반짝이고 있지만, 정작 그 속이 얼마나 엉망으로 뒤엉켰는지 누가 헤아려줄까.

그녀는 목탁진의 사랑한다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국난이 닥치자 목탁진은 물건을 건네듯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보냈다.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목탁진은 눈물을 보였었다.

그 후 상건웅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고, 아작도 그 말을 서서히 믿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고난 앞에 별다를 게 없었다. 처음 목탁진이 그러했던 것처럼, 상건웅도 다시 또 자신을 타인에게 선물로 떠나보내 버렸다.

헤어질 적엔 상건웅도 눈물을 보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목탁진과 단 하나도 다른 것이 없었다.

참 서글프고도 서글펐다. 아작의 앞에 또 다른 제왕이 나타났다. 벌써 3번째 제왕이었다. 지금 그녀의 심정은 말로 다 형언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섭진정은 계속해서 아작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내 그가 한참 참고,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후궁 중 이 여인과 비교할 수 있는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야말로 천향국색(天香國色)이라 할만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섭진정은 단 한순간에 목탁진과 상건웅이 왜 그토록 이 여인을 총애했는지 깨달았다.

섭진정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아작의 희고 보드라운 턱을 잡아 자신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렇게 또 한참을 감상한 섭진정이 감탄을 내뱉었다.

“천하 제일 미인이로다!”

지금 그 한마디에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한국 황제가 직접 치하한 말이라며 순식간에 온 천하로 퍼져나갔다.

황제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눈치 빠른 창덕이 뒤로 물러나며 주위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곧 궁녀들은 동시에 물러나고 문도 굳게 닫혔다.

사람들 모두가 물러가자, 섭진정은 마음이 더욱 동하기 시작했다.

“짐을 보고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냐? 말을 해 보아라, 네 목소리를 듣고 싶구나.”

그때, 밖에서 다급한 창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대사마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급한 일이라고 하옵니다.”

섭진정은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을 나서며 창덕에게 당부를 남겼다.

“이곳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네가 반드시 성심껏 신경을 써주거라.”

“알겠습니다!”

창덕이 대답했다.

* * *

한 누각.

섭진정은 매우 어두운 얼굴을 한 대사마 금작을 만났다.

예를 받고, 섭진정이 바로 물었다.

“무슨 급한 일이기에 그러시오?”

금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상건웅이 총애하던 후궁을 폐하께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이군.’

섭진정은 좀 민망한 얼굴로 답했다.

“대사마, 오해하지 마시오. 짐은 당시 그저 사신을 물리기 위해 둘러댔을 뿐이오. 상건웅이 사람을 진짜로 보내올 줄은 생각지도 못 했소.”

이내 금작이 굳은 얼굴로 두 손을 강하게 맞잡으며 포권을 했다.

“폐하, 그 여인은 불길한 여인입니다. 목탁진이 그녀를 얻고 결국 어찌 되었습니까? 상건웅도 그녀를 얻고 상조종을 떨치지 못하게 됐습니다. 상건웅이 상조종에게 반서를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반면교사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 여인은 나라를 망치는 요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주 불길한 여인이니, 죽음을 내려주시옵소서! 간청합니다. 그리한다면 조정과 천하 사람들의 비방을 피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섭진정은 잠시 침묵하다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금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찌 그리 웃으십니까? 설마 노신이 무엇을 잘못 말씀드린 것입니까?”

섭진정이 손사래를 쳤다.

“대사마가 충심으로 하는 말인데 잘못일 리가. 그런데 목탁진이 그리 죽은 게 그 여인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상건웅이 상조종 때문에 밤잠을 설친 게 설마 그 여인의 잘못이란 말이오?

일국의 군주가 조정을 잘 경영하고 문(文)으로 나라를 통치하며, 무(武)로 공을 세운다면 가녀린 여인이 이 거대한 천하에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이오? 목탁진과 상조종은 자신이 잘못해 나라를 망친 것이오. 그 죄를 연약한 여인에게 뒤집어씌우다니, 우습지 않으시오?”

금작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사실 어떤 말이든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겨우 한번 본 여인을 이처럼 강경히 두둔하고 나섰다. 금작은 비로소 더욱더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얻은 소식에 따르면, 아작은 방금 도착했다. 황제가 본 것도 한 번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제왕끼리 한낱 물건처럼 주고받은 한 여인을 위해 군기대신인 자신의 호의를 비웃고 있다니, 금작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제왕이 한 여인을 너무 과하게 총애한다면, 여인에게 아무 죄가 없을지라도 그런 존재는 아주 큰 죄가 되었다.

본디 뭔가에 푹 빠져 원대한 포부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따뜻한 고향은 영웅의 무덤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만약 한 여인 때문에 황제가 조정 일을 소홀히 하게 된다면……. 그땐 어찌한단 말인가!

금작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설마 그 여인 때문에 상건웅의 조건을 승낙하셨습니까?”

섭진정이 정색했다.

“대사마, 그게 무슨 말이오? 상조종을 도와 연국에 내환을 심어 놓자는 것이 우리 한국의 대전략이오. 겨우 여인 때문에 하룻밤 사이 덥석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지! 심지어 짐은 상건웅이 여인을 보낸다고 말을 들어주겠다 약조한 적이 없소! 오직 상건웅 혼자의 바람일 뿐이지. 대사마, 걱정하지 마시오. 어찌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 그 여인에 관해 고민할 것 없소.”

금작도 마음이 좀 놓였지만, 여전히 포기하진 않았다.

“폐하, 미인계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여인이 정녕 연국에서 폐하를 미혹시키려 보낸 요녀라면 어찌하실 것입니까? 후환을 남겨선 안 됩니다. 폐하, 그 여인을 죽이십시오! 노신이 폐하를 위해 전력을 다하겠나이다!”

이는 즉, 황제가 손쓰기 싫다면 본인이 대신 죽여주겠다는 말이었다.

섭진정은 조금 기분이 상한 듯, 목소리가 굳어졌다.

“뛰어난 미색으로 짐을 현혹한다……. 설마 대사마의 눈에 짐이 위국의 현승천으로 보이는 것이오? 대사마에겐 짐은 그저 어리석은 혼군일 뿐인가?”

금작은 다급히 포권을 했다.

“아닙니다! 노신, 그런 뜻으로 올린 말씀이 절대로 아니옵니다!”

“됐소. 상건웅이 사람을 보내온 건 짐에게도 퍽 의외였소. 원래는 받지 않으려 했는데 대사마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제 짐은 그 여인을 반드시 받아야겠소. 어디 짐이 목탁진이나 상건웅과 비교해 어떠할지 보시오. 그 여인을 반드시 남겨, 짐의 심지를 연마해보겠단 말이오.”

금작은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말을 찾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황제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심이라면, 오히려 자신의 설득이 반발심을 일으킨 것이니 되레 황제의 경쟁심을 부추겨 일을 망친 것이 아닌가!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금작도 당분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물러가겠다고 말한 뒤, 대총관 창덕에게 살짝 눈짓을 보냈다.

창덕은 어쩔 수 없이, 직접 금작을 배웅하며 그를 따라 움직였다.

* * *

인적 드문 곳에 도착했을 때, 금작이 걸음을 멈췄다.

창덕은 허리를 숙이고 서서, 그의 안색을 조용히 살피고 있었다.

이내 금작은 길가의 푸르른 잎사귀를 만지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잘 지내시던 폐하께서 갑자기 왜 연국에 그 여인을 달라고 한 것이오? 혹시 대총관이 폐하께 말씀을 드린 것이오?”

창덕은 깜짝 놀랐다. 그런 이야기는 절대 함부로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 그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그런 일은 주군의 뜻에 따라 행하기만 할 뿐, 먼저 나서서 현혹해서는 안 되었다.

자고로 군주가 제일 범하기 쉬운 잘못이고, 조당의 수많은 이가 가장 꺼리는 것이 바로 황제가 미색에 빠지는 일이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여색에 미치는 것이지, 궁극적으로 말하면 나라를 망치는 길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제 곁의 환관이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도, 규모도 아니었다. 그 능력이 온 조정을 압도할 정도가 아니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만약 이런 이야기가 퍼진다면, 아마 수많은 사람이 그를 죽이려 할 터였다. 그에게 목숨이 몇 개라도 더 남아있던가?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른 창덕은 다급히 포권을 하며 연신 허리를 숙이며 우는소리를 했다.

“대사마! 정말 억울합니다. 저 같은 일개 신하가 폐하께서 갑자기 아작을 언급하신 까닭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늘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소인은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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