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6화. 고 대인의 견해
그때, 석요가 손을 들어 상건웅을 진정시켰다.
“폐하,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고 대인이 그렇게 말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일단 다 들어본 후에 결정을 내리시지요.”
“흥!”
상건웅은 소매를 한번 털어내고 뒷짐을 진 채 고견성을 쳐다보았다. 어디 무슨 말을 할지 두고 보겠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조금 냉정함을 찾은 상건웅은 고견성이 아무 이유 없이 그리 말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방금 고견성의 말은 너무 기분이 나빴다.
“한국에게 아무 이익이 없는데, 저들은 어째서 상조종을 돕고 있겠습니까? 노신은 저들이 호의로 저란다고 믿지 않습니다.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한국은 의도적으로 상조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연국 내부에 우리가 서로 견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내부에서 견제하는 연국은 한국에게 쓸데없는 수작을 부릴 수 없고, 한국이 원할 때 연국은 힘을 집중해 대응할 수 없게 됩니다. 이번 한국의 행동은 상조종을 지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조정과 상조종의 갈등을 심화시키려는 의도이기도 합니다.
폐하,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한국이 정말 출병하면 어쩌실 겁니까? 일단 한국이 출병하면, 우리 쪽에서 출병해도 무엇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조정의 체면만 크게 구겨지겠지요. 일단 조정의 군대가 패배하면, 연국 신민들이 조정을 어찌 보겠습니까? 그럼 상조종만 더 기세등등해질 뿐입니다.”
상건웅이 반문했다.
“그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르오? 그래서 고 대인은 한국이 반드시 출병할 것이라 어찌 단정하는 것이오?”
황제의 압박에도 고견성은 침착했다.
“폐하, 상조종이 어째서 지금처럼 병력이 분산된 상황에 그런 짓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조정이 좌시하지 않을 것을 모르겠습니까? 조정이 좌시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추잡스럽게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분명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반드시 출병해 자신을 도울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많은 이런 위험을 굳이 감수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순간 대전은 침묵에 휩싸였다. 고견성의 말이 옳았다. 정말 상조종에게 확신이 없다면, 어찌 감히 저리 움직일 수 있을까. 확신, 그건 한국이 반드시 출병할 거란 증명과도 같았다.
일순 깊은 사색에 잠긴 사람들을 보며, 고견성이 다시 가볍게 운을 뗐다.
“조정이 양보하는 게 꼭 손해 보는 것만은 아닙니다. 반면에 상조종은 집어삼킨 저것들을 모두 소화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시 고견성을 돌아봤다.
그중 낙명검이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했다.
“고 대인, 그게 무슨 뜻이오?”
“알만한 이는 다 알겠지만, 제국은 이미 힘이 다했습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진국은 본디 갑옷은 단단하고 무기는 날카로웠습니다. 이젠 한 손에 곡창을 쥐고, 다른 손에 전마의 자원까지 움켜쥔다면 병력을 몰고 동진하는 건 필연이겠지요. 진국이 어떤 야심을 가졌는지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진국이 서병관을 나서면 누가 막아서겠습니까? 조정 병력이 서병관 앞에 있으면 조정이 막아야겠지요. 하지만 용친왕의 병력이 서병관 앞에 있다면 당연히 용친왕이 막아야 할 것입니다.
조정의 병력이 진국과 싸우게 되면 진국이 가진 날카로운 무기로 인해 조정은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용친왕의 병력이 진국과 싸우게 된다면, 용친왕의 병력은 큰 손실을 보겠지요.”
다들 두 눈을 번득이며 생각에 잠겼다. 드디어 고견성의 의도를 깨달은 것이다. 비로소 평정을 되찾은 상건웅도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만약 진국이 동진을 시작했을 때, 상조종이 패하면 조정 군대가 진국과 싸워야 할 것이오. 그때가 되면 막을 수 있는 것이오?”
“폐하, 조정이 진국과 싸워야 하는 순간이 그리 쉽게 오진 않을 것입니다. 한국은 그저 장식이 아닙니다. 상조종이 패하는 것을 지켜만 보겠습니까?
진국이 서병관을 나서면, 한국은 반드시 상조종과 연합해 혈전을 벌일 겁니다. 양측이 연합하면 진국도 그리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승리한다 해도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요.
일단 상조종 병력이 후진국 영역에서 패한다면, 또 진국 병력이 우리 쪽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혹은 우리 조정이 나서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상조종의 병력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순간이라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상조종은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반면 한국은 후진국 영역을 제하고도 광대한 토지가 있고 한국 본토엔 수많은 백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상조종이 전멸하다시피 하면, 한국에게 상조종은 더는 이용 가치가 없을 겁니다.
한국이 홀로 진국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때는 분명 우리 연국에게 와서 같이 진국에 대항하자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가 와도 우리 연국은 절대 홀로 싸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이용 가치가 없어진 상조종은 폐하께서 딱 한마디만 하시면, 한국은 분명 용친왕을 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금동에게도 상조종은 더는 이용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후진국의 이익은 잃어버렸지만, 자금동은 아직 연국 본토에 적지 않은 이익이 남아있으니 그들을 지켜야 합니다.
더욱이 자금동은 그 전에 상조종을 지지하며 진국과 싸울 테니 상조종이 패한다면 분명 자금동도 큰 손실을 볼 겁니다. 그때 폐하께서 말씀만 하시면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금동도 상조종을 버리는 패 취급할 겁니다. 아마 자금동은 상조종을 붙잡아와 폐하께 진상하고 처리를 맡길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상건웅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에게 상조종은 눈엣가시였다. 상조종이 꽁꽁 묶여 자신 앞으로 끌려와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상상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고견성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에 진국과 싸워 이길 수 있는지와 별개로 조정은 지금 눈앞의 일만이 아니라 반드시 마지막까지 저항할 힘을 남겨둬야 합니다. 일단 조정 세력이 타격을 입어 조정에 저항할 힘이 없을 때, 상조종이 기회를 틈타 황위를 찬탈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두 분 장로님께 여쭙겠습니다. 만약 상조종으로 연국의 인심을 안정시키고 진국에 대항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영검산와 소요궁은 어떤 선택을 내리실 겁니까? 여전히 폐하를 보호하시렵니까?”
두 장로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노신은 남주 쪽 세력과 철천지원수라 할 수 있습니다. 노신은 결코 모든 일이 상조종 뜻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겁니다! 폐하, 출병해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폐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고견성이 진정성 가득한, 힘찬 목소리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석요와 낙명검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 대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가 탁 트이는 것 같습니다!”
석요의 감탄에 이어, 낙명검도 말을 덧붙였다.
“폐하, 고 대인 말씀이 실로 맞습니다. 참으로 노련한 계책입니다!”
상건웅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장탄식을 내뱉었다. 가슴이 은은하게 아려왔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작을 보내도 무엇 하나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면, 자신의 사랑을 그리 보낼 이유가 무엇이었단 말인가.
마지막 결과가 고견성의 말대로 진행된다면, 나중에 한국은 자신들에게 부탁해야 할 때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그때 아작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날이 온다면, 무슨 낯으로 아작을 마주한단 말이지?
목탁진에게서 아작을 데려올 때부터 수많은 사람의 비방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그 여인을 다른 사내에게 보냈다. 나중에 다시 돌려받게 된다면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들을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그는 일국의 군왕이었다. 과연 만조백관이 제멋대로인 군주의 행동을 받아들일까? 아마 대연의 아버지로서 어찌 모범이 될 것이냐며 난리를 피우겠지…….
상건웅의 마음에 거친 폭풍이 일었다. 폐부에서 심장을 찌르는 듯한 후회가 빠르게 돋아났다. 아, 참으로 애통하고도 애통했다. 이젠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었다. 상건웅은 이제야 비로소 잔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아, 과인의 아작이 떠났구나!’
* * *
초려별원 밀실.
의자에 기대앉은 우유도는 손에든 정보를 살피며 두 눈을 번득였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결국 조용히 소리를 냈다.
“천하제일 미인?”
한쪽에 있는 관방의가 그 말을 듣고 같잖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운희와 여무쌍은 저도 모르게 관방의를 힐끗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과거 관방의 또한 천하제일 미인이란 명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관방의는 아작처럼 일국의 황제로 인해 얻은 명성은 아니었다. 당시 관방의가 만나는 사람은 천하의 하류 인생들이 많았던 반면, 아작은 오직 황제들만을 접했다. 그것만으로 두 미인의 격차를 가늠하긴 힘들었다.
“세 제왕이…….”
홀로 중얼거리던 우유도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물었다.
“혹시 이 아작이란 사람, 본 적 있어? 정말 절세미인이라는 말인가?”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운희는 만나볼 기회가 없었고, 여무쌍은 아작이란 사람은 여태 안중에도 두지도 않았었다.
그때, 관방의가 담담히 말했다.
“궁금하면 가서 보면 되잖아. 도야 능력이면 얼굴 한번 보는 것쯤이야.”
우유도가 대충 대답했다.
“확실히 궁금하네. 대체 얼마나 미인이면 제왕이 셋이나 미쳤단 말이지?”
사실 우유도와 마찬가지로 운희와 여무쌍도 매우 궁금했다. 그토록 매력적인 여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냥 보고만 싶은 거야? 그럴 필요 없이 그냥 데려와 도야의 여인으로 함께 지내는 것도 문제없지 않아?”
질투인 것 같았다. 우유도는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관방의를 보더니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홍랑이야말로 진정한 천하제일 미인으로 보이는데.”
어째 마음에도 없는 말처럼 들렸다. 운희는 슬그머니 웃었고, 여무쌍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작 관방의는 눈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그만해! 나한테 미인이라 치켜세워봤자 사람들이 다 늙은이 놀린다고 배꼽 빠지게 웃을 거야. 난 다른 뜻이 아니야. 아작이란 여인을 동정할 뿐이지. 너희 사내들에게 천하제일 미인이란 평가를 받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우유도는 못 들은 척 들고 있던 종이를 한 장 넘겼다. 종이는 고견성이 ‘무명씨(無名氏)’란 이름으로 전해온 소식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고견성이 이미 연국 조정을 잘 요리해 현재 상조종 눈앞의 위기를 잘 해결해 뒀다는 얘기였다.
우유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견성 한 사람이 지니는 가치가 가끔은 천군만마를 넘어섰다. 지금도 최소한 남주 병력의 손실을 피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던가.
“왕야 쪽에서는 아마도 줄곧 조마조마하고 있었겠지. 홍랑, 직접 왕야에게 가서 조정에선 출병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해줘.”
우유도가 종이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관방의는 살짝 코웃음을 치고는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