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1화. 도광검영(刀光劍影)
나추가 떠나자, 드디어 원비가 나타났다. 잡아 온 나방비를 관리한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두려웠기에 숨어 있었다.
간단하게, 원색이 나추의 딸을 잡아 왔으니 나추는 이에는 이라는 생각으로 원색의 심복을 붙잡으려 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자리를 피해 있는 것이 좋았다. 나방비를 풀어 주기 전엔 원비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냥 저렇게 떠났단 말입니까?”
원비는 다소 의외였다. 나방비를 잡아 왔을 때, 원비는 사실 매우 두려웠다. 여기서 한차례 악전고투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인질을 잡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겠지.”
원색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모든 진실을 알려준 건 아니었다. 진정한 목적은 원색만이 알고 있었다.
은희의 말이 원색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당연히 은희가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만들 방법을 고민했고, 결국 딸이란 최고의 약점을 잡아 왔다.
그러나 전에 황택사지에서 경솔했던 그 행동으로, 행여 일을 그르친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은희가 생각을 바꿔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그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지금 은희의 딸을 붙잡은 건 은희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녀가 딸의 생사도 신경 쓰지 않는 무정한 어미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일단 시도는 해 봐야 했다.
하지만 나추의 딸을 납치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추는 절대 그냥 두고 보지 않을 테고, 절대 그를 속일 수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 대나성지에 쳐들어가 사람을 납치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직접 움직이면,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원색은 당연히 나추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나추에게 나방비의 안전을 보장하며 이번 일을 은밀하게 진행하겠다고 한 목적은 딱 하나뿐이었다.
원색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비밀을 홀로 알고, 남몰래 은희와 협력하길 원했다.
그런 의미로, 원색은 나추가 이번 일을 확대하지 못하게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게 바로 나방비를 납치한 진짜 목적이었다. 이대로 나추가 나방비를 데려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 * *
초려별원의 소란은 곧바로 성 밖에 있는 동굴로 전해졌다.
“나추에요.”
여무쌍은 청삼 사내의 묘사를 듣고, 곧바로 누구인지 맞혔다. 우유도 역시 나추를 본 적이 있어 듣자마자 나추임을 알았다.
우유도는 주변을 서성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방비를 납치해 왔으니, 나추가 여길 찾아온 건 당연한 수순이지요. 그런데……. 단 한 번의 손속도 겨루지 않고, 그리 고분고분 떠났다니. 은희의 일과 나방비는 이제 원색에게 뛰어난 칼자루가 된 것 같군요.”
“원 뚱땡이가 인질을 곁에 두기 위해 여기에 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도야가 은희를 통해 부린 수작이 성공했어요. 원 뚱땡이는 협조하고 싶지만, 주도권은 잃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또 나추가 개입해 문제를 확대하는 것도 원하지 않고 있어요. 나추는 원 뚱땡이가 은희와 협력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아마도 원 뚱땡이에게 속아 넘어갔을 거예요.”
“흥!”
우유도가 냉소 지었다.
* * *
송국 경성 일대.
산 위에 새로 지은 한 장원, 이곳은 상청종 종문이 위치한 곳이었다.
종문 일을 모두 의논한 후, 당소소가 다시 예전 일을 끄집어냈다.
“장문인, 이렇듯 매일 표묘각에 보고해야 하는 원종은 대체 어떤 신분인지 전혀 알지 못하지요. 만약 문제가 생기면 우리 상청종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 표묘각에 보고하는 일, 우리가 굳이 해야 할 필요 있을까요?”
당희가 담담히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원종의 진짜 신분은 간산월입니다.”
“간산월이 맞든 아니든, 우리가 먼저 나서서 그 일을 맡지 말았어야 했어요. 경성에 3대 문파가 있으니,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충분했을 테고요.”
나원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무군 체면 때문이 아니겠는가. 가무군의 뜻이 그러하고, 원종 곁에 위충까지 있으니, 일 처리하기 더 편하기도 하고 말이지.”
소석이 말을 이었다.
“당 장로, 이미 그리 처리하기로 한 일이니. 이제 와 다시 이야기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설마 지금 와서 표묘각에게 손 떼겠다고 하란 말인가?”
당소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저는 이 천하가 갈수록 뭔가 심상치 않아지는 것 같아 그렇지요. 오랫동안 수행계에 몸담아 왔지만, 이런 소란은 처음이에요. 너무 불안합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일을 줄이자는 거지요.”
나머지는 침묵했다. 사실 이는 가무군 때문만이 아니었다. 원종의 일은 조웅가까지도 그들에게 반드시 협력하라는 연락을 보낸 바 있었다.
조웅가의 전언은 지금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당소소를 제외한 모두가 알았다. 당소소와 조웅가의 관계는 남편과 아들의 죽음이 얽혀있기 때문이었다.
또 이번 일에 조웅가가 개입한 것을 보고,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은연중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가무군만으로 부족했나? 여기에 조웅가가 여러 차례 당부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건 혹시라도 뭔가 실수가 있을까 걱정하는 모습이 아닌가.
원종은 가무군을 따르고 있었다. 대체 뭘 두려워하는 것일까? 표묘각이 알면 안 되는 건 무엇이 있을까? 다들 이번 일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특히 지금은 천하에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기에, 다소 안절부절못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가무군과 조웅가가 동시에 한 부탁을 상청종이 어찌 거절한단 말인가? 거절한다면, 더는 송국에 머물 수는 있겠는가?
* * *
“대공자님, 약곡 쪽에서 답장이 왔습니다. 문제없습니다.”
소삼성이 서재로 들어와 서탁으로 조용히 걸어왔다.
한참 공문을 살피던 소평파는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붓을 내려놓고 굳은 얼굴로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쪽에서 성나찰이 장손미와 목연택을 죽였고, 여무쌍도 처리했다고 했었지. 지금 여무쌍은 살아 있고, 성나찰은 인간계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그 둘이 서로 손을 잡았다.
이제 온 수행계에 계엄령이 내려왔으니, 지금 상황을 보자면 육성이 제대로 마음먹은 것 같구나. 이제는 그물을 던지고 반격을 하려는 것이다.
반면, 그쪽에선 귀의와 그 제자에게 그대로 그물에 몸을 던지라니 마냥 앉아 죽는 날을 기다릴 생각은 없어 보이는구나. 아마 반격하려는 것이겠지.
느껴지지 않느냐? 도광검영(*刀光劍影: 일촉즉발의 상황)이로다. 사방에 살기가 등등하니 양측이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은 피할 수 없구나. 서로 죽고 죽이는 판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피바람이 몰아치겠구나!”
“대공자님, 판이 너무 큽니다. 우리가 가진 자원과 힘으로는 개입도 불가능합니다. 걱정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소평파의 얼굴이 다소 서글퍼졌다.
“귀의와 그 제자는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 앞으로는 그저 끌려다닐 수밖에 없겠지. 이제 그쪽에서 그들에게 알아서 함정으로 들어가라고 하니, 난 혹시라도 예상치 못한 일로 유아가 말려들까 걱정이구나.
양쪽의 모략이 드러나면, 결국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이 이번 승부에 쓸려나갈지 알 수가 없구나. 유아가 일단 말려들면, 너와 나라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느냐? 지금 우리는 이미 그 흐름에 휩쓸렸으니, 마음대로 벗어날 수도 없게 됐다.
이제 그들에게 장기 말로서 부림을 당할지, 버리는 말로 버려질지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노소야, 이제는 정말로 좀 후회가 되는구나.”
소삼성이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소평파도 우려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가무설이 우릴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 뿐이다!”
* * *
산중, 관도.
마차 한 대가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었다. 사립을 쓴 무상은 마부석에서 주변을 경계하며 자신들을 막아선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다시 누군가가 마차 뒤에 나타나 마차의 퇴로까지 막아섰다.
“무슨 일이냐?”
마차 안에서 귀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한 사람이 산속에서 뛰쳐나와 마차 앞에 섰다. 사여래였다.
마차를 포위한 이들은 모두 품에서 각자 천검부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수십 장의 천검부가 무상의 움직임을 방비했다.
사여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흑리, 나와 같이 가줘야겠다!”
무상과 나란히 앉아 있던 안보여는 매우 놀랐다. 그녀는 천도비경에 직접 참여했었기에 사여래의 얼굴을 알았다. 전임 표묘각 각주였다. 그가 직접 나서 마차를 가로막은 것이다. 안보여의 충격도 상당했다.
마차 문이 열리고, 귀의가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폈다. 그도 곧 사여래를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사여래도 약곡을 들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이내 귀의가 나와 허리를 숙이고 포권을 했다.
“사 선생님을 뵙습니다. 소인이 어떤 잘못을 범했기에, 사 선생님께서 이처럼 직접 나서신 것인지요?”
마차 안에서 무심과 곽만은 조용히 마차 바깥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사여래가 냉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흑리, 곧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냥 나와 가줘야겠다.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고분고분 협조한다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그의 손짓에, 날짐승 수 마리가 날아와 허공을 맴돌았다. 이제 인간계 세력은 날짐승을 타고 다닐 자격이 없지만, 사여래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귀의는 한숨이 나왔다. 남명의 명을 받았을 때부터, 이 여정에 문제가 생길 것을 알았지만,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이 사여래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남명의 지시는 너무나 명확했다. 이번 여행에서 누구의 손에 잡히든,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할지 이미 확실한 지시가 내려왔다.
원비의 한눈을 뽑아낼 때만 해도, 배후에 있는 자의 의도를 고민했었다. 그리고 후에는 원비에게 결국 자신의 눈이 가장 좋은 눈이라는 말을 암시하곤 오래도록 원비에게 눈을 이식해 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귀의는 누군가 원색을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사여래가 직접 나선 걸 보니, 대나성지까지 얽혀있는 일 같았다. 거기에 자신이 받은 지시를 생각하면, 귀의는 누군가 진지하게 원색에게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뭘 또 어쩌겠는가. 귀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원색이 죽어야지만, 그와 그의 제자는 해방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원색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들이 어찌 될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따라오라는 말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여래가 직접 나선 일이었다. 귀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귀의가 마차에서 내리자, 안에 있던 무심과 곽만도 마차에서 내렸다.
무심은 침울한 얼굴이었다. 이제 와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소유아를 도우려는 것이었는데, 후회가 있을까. 다만 유일하게 그의 마음에 돌처럼 얹힌 이는 바로 사부였다. 자신이 사부의 발목을 잡았다는 게 참 한스러웠다.
사부의 말이 옳았다. 세상엔 자신들이 감히 건드리면 안 되는 일이 있었다. 세상일은 생각처럼 그리 간단치 않고, 일단 얽히면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무심은 비로소 자신이 너무 천진난만했다는 걸 알았다.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귀의 일행 다섯 모두가 날짐승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