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2화. 기회
“오풍!”
무량원이 뚫렸다. 방어진법으론 그를 막을 수 없었고, 6대 성지의 호위 인원들이 협력해 천검부를 미친 듯이 뿌렸음에도 오풍을 막을 수 없었다.
굉음이 울리고, 수 대에 걸쳐 지켜온 무량과수가 쓰러졌다. 이제 성경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단 하나의 무량과수가 사라진 것이었다.
무허성지 인원들은 비명을 질러댔지만 오풍은 의연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음속에선 남다른 쾌감이 용솟음쳤다. 자신의 반평생을 가둔 곳이며, 실세했을 땐 치욕을 안긴 곳이었다.
그 스스로 이곳을 파괴했다. 오풍은 당장이라도 고함을 질러 속에 끓어 넘치는 이 울분을 풀고 싶었다.
천검강 수십 줄기가 오풍에게로 쏘아져 왔지만, 오풍은 쓰러진 무량과수를 집어 들고 그대로 휘둘러 버렸다.
쾅쾅!!!
굉음이 울리고, 나무는 박살이 나서 마치 눈송이처럼 사방으로 휘날렸다.
오풍은 이미 하늘 높이 날아올라 흐릿한 그림자로 사라진 뒤였다.
사람들 일부는 죽였지만, 모두 죽이진 않았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오풍의 원한을 산 사람은 모두 다 죽었다. 그는 그렇게 원한을 갚았다.
쫓을 수도, 쫓을 배짱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가루가 되어 버린 무량과수를 보며 다들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오풍이 갑자기 무량원을 파괴하고, 성경에 단 한그루뿐인 무량과수를 없애버렸다. 온 성경이 소란으로 시끄러워졌다. 독무허도 더 이상 내내 숨기려 했던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 * *
초려별원.
원색은 긴 의자에 눕듯이 기대, 깊은 밤 밝은 만월에 취해 있었다.
그때, 원비가 곁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소문에 무량과는 독무허가 훔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오풍이 나타났는데, 선생님께서는 독무허를 찾아가지 않으실 겁니까?”
원색이 웃었다.
“정말 독무허 짓이라면 오풍이 이처럼 헛짓거리를 하는 걸 두고 볼까?”
“설마 그냥 이대로 모른 척하실 겁니까?”
“설명은 꼭 들어야겠지. 하지만 내가 가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는 갈 것이다. 이번 일은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나추의 움직임을 잘 감시해라.”
확실히 원색에겐 계획이 있었다. 지금 그에게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성나찰과 손을 잡는다면, 나머지 오성을 한 번에 죽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 능력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럴 수만 있다면, 독무허가 무량과를 훔쳤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원색은 나방비 곁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나방비는 나추를 억누르는 약점이자, 은희를 움켜쥘 약점이었다. 실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내내 나추의 반응을 살피다가, 나추가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면 인질을 데리고 은희를 찾으러 가야 했다.
“나추가 머무는 곳 근처에 이목을 심어 놓았습니다.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원비의 보고에, 원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원비는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 달빛이 담긴 외로운 눈 하나가 참으로 서글퍼 보였다.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무량과수가 사라져 버렸다. 원색이 원비의 눈을 가져간 후, 그녀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다. 만약 그녀에게 맞는 안구를 찾지 못하면 60년 후 무량과가 익거든 무량과 하나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었다.
사실 그 말에 큰 희망은 없었으나, 이젠 마지막 남은 그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완전히 다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이에겐, 그것도 그 미모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자라면 평생 한 눈으로 살아간다는 건 형벌과도 같은 일이었다. 본디 가지면 가질수록 더 집착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원색도 차츰 원비가 오래도록 말을 잃은 것을 느끼고,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라. 천하에 사람이 얼마나 많아. 분명 적당한 눈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일단 눈앞의 일을 처리하면 내 직접 흑리를 찾아가 독촉하지.”
* * *
하늘 높이 솟은 절벽과 그 맞은편에 자리한 호수. 그리고 그 호수의 맞은편이 바로 한국 경성이었다.
절벽의 한 동굴로 대나성지의 노인 태도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 동굴엔 나추가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성존, 사 선생이 도착해 뵙기를 청합니다.”
저번 은희 일이 있었을 때 태도가 일을 잘 처리한 것을 보고, 나추는 이번에 그에게 본인 수행을 맡겼다.
보고를 들은 나추가 천천히 눈을 떠 고개를 끄덕이자, 태도는 즉시 뒤돌아 동굴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사여래가 빠르게 들어와 나추 앞에 서서 포권으로 예를 올렸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가부좌로 앉아 있던 나추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너보고 여길 찾아오라고 했느냐?”
사여래는 불안함 반, 또 어렴풋이 어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부님, 방비가 원색에게 납치됐습니다. 저…….”
나추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그 일은 내게 다 계획이 있다. 넌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라. 지금 성경 내부에 작지 않은 풍랑이 몰아치고 있다. 난 분명 너희 사형제에게 집을 잘 보라 명했다. 누가 네게 내 허락도 없이 내 행방을 알아보고 여기까지 찾아오라 했더냐?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냐?”
사여래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방비가 납치됐습니다! 저는 남편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제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원색이 직접 움직였다.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들 막을 수 있었겠느냐? 말하지 않았느냐, 자책할 필요 없다고. 내 말은 이제 듣지도 않는 것이냐?”
사여래는 무릎을 꿇은 채로 다급히 해명했다.
“제가 어찌 감히! 다만 원색이 어떤 자입니까. 여색을 좋아하는 자로, 그자의 손에 방비가 있으니 저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하루만큼 더 고통은 커집니다. 제가 어찌 그냥 참을 수 있단 말입니까? 방비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원색이 아무리 호색한이라 한들, 방비에게 손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되었다. 방비에 대한 네 감정을 내가 모두 보았다.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할 것이니, 너는 더이상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거라.”
어떤 일엔 알릴 수 없는 비밀도 얽혀있는 법이었다. 나추는 다른 사람이 알길 바라지 않았고, 거기엔 사여래도 포함돼 있었다. 특히 딸 나방비가 출생의 비밀을 모르길 바랐다. 한마디로, 그런 것만 아니었다면 나추도 거리낄 게 없으니 진즉에 원색에게서 나방비를 빼앗아 왔을 것이었다.
사여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들고 간청했다.
“사부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이미 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귀의와 그 제자를 붙잡았습니다. 만약 이대로 포기하라고 하신다면, 어찌 승복할 수 있겠습니까? 부부의 감정과는 별개로, 어쨌든 방비는 제 아내입니다. 제가 이번 일을 그저 수수방관한다면, 앞으로 제가 어찌 다른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나추의 두 눈이 번뜩였다. 다른 말은 귀에 남지도 않았다. 딱 하나, 그의 머릿속에 남은 한마디가 있었다.
“귀의와 그의 제자를 잡아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사여래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원색이 왜 방비를 납치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그가 먼저 선을 넘었으니, 제자는 그에 대해 복수할 것입니다. 그가 방비를 건드렸으니, 저도 그의 사람을 칠 것입니다.
원색의 한쪽 눈은 그의 심복 원비의 눈입니다. 원비는 본디 아름다운 미인이라 분명 계속 그 상태로 지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귀의와 그 제자를 비밀리에 잡아들였습니다. 그렇게 귀의에게 캐물은 결과, 과연 방비를 구할 기회를 포착해 냈습니다.”
나추도 이게 한 방법일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원비를 붙잡아 딸과 교환하려는 생각을 품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원색이 그의 약점을 잡고 있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나추가 사여래가 생각한 그 방법을 허락할 리는 없었다.
“무슨 기회 말이더냐?”
나추가 담담히 물었다.
“제가 귀의를 심문한 후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당시 원색이 원비의 눈을 이식한 건 아무런 의미 없이 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이식술법은 아무 사람의 눈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어느 정도 육신이 적합해야 합니다.
귀의와 그의 제자는 내내 여기저기를 다니며 적합한 사람을 찾다가 결국 대원성지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러다 원비의 눈이 원색과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원비는 할 수 없이 억지로 원색에게 한쪽 눈을 바쳤답니다.
그 후로 원비는 줄곧 귀의에게 적합한 눈을 찾아달라 재촉했습니다만, 이제 귀의는 제 손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원비는 이제 그 외모를 회복하고 싶다면, 제 허락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원비를 협박하려고? 원비가 승낙이나 하겠느냐? 그녀에게 그럴만한 배짱은 없다!”
“사부님, 모르시는 것이 있습니다. 귀의 말이, 원비에게 가장 적합한 눈은 사실 지금 원색에게 이식된 원비 자신의 눈이라 합니다. 그 눈을 되찾아야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지요. 본디 세상에 자신의 눈보다 더 완벽한 눈이 있겠습니까?
전에 귀의가 적합한 눈을 찾지 못하고 있자 원비가 직접 약곡에 찾아와 귀의와 이야기 나눈 바 있으니, 원비도 알고 있을 겁니다. 사부님, 외모를 향한 원비의 갈망을 얕잡아 볼 수 없습니다. 이건 분명 특별한 기회입니다.”
나추도 제자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밝혀낼 줄은 미처 몰랐다.
원색이 귀의를 찾아 눈을 고쳤다는 건 오성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치료를 마친 눈이라 누구도 그에 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배후에 이리도 오묘한 사정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원비에게 가장 적합한 눈은 바로 원비 자신의 눈이다.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당연한 이치였다.
나추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속으론 묘수라며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눈은 다시 간절해 보이는 사여래 얼굴에 닿았다.
제자는 부인을 구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이 오묘한 묘수를 생각해 냈다. 아마 원색 스스로도 원비의 눈이 다시 원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추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는 더 이상 사여래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원색은 이를 알고 있더냐?”
“이걸 기회로 생각했으니 당연히 그와 관련된 일도 귀의에게 알아보았습니다. 귀의가 말하길, 원색은 눈을 고친 후엔 더는 어떠한 언급도 없었으며, 빨리 원비에게 적합한 눈을 찾아 이식하라고만 했답니다. 그저 원비가 약곡을 찾아왔을 때에만 그에 관해 언급한 것이고요. 그러나 사부님, 원비가 이런 일을 원색에게 곧이곧대로 전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추는 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여인에게 그럴 배짱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 여인이 원해야 할 것이다. 가장 좋은 건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쪽이 우리 쪽을 크게 경계하고 있으니, 그 여인과 만나 얘기 나누긴 쉽지 않구나. 그러니 이 일은 계획을 다시 잘 세워야 할 것이다.”
“사부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원색의 옆에 제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통하면 원비를 불러낼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귀의와 그 제자가 제 손에 있지 않습니까? 원비가 간절할수록 그녀를 불러내는 건 더더욱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 나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색 곁에 사람을 심어 놓았다고? 원색 곁에 그처럼 쉽게 사람을 심을 수 있단 말이냐? 어째서 내가 그 일을 모른단 말이냐? 그처럼 큰일을 너는 어째서 일찍 보고하지 않은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