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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765화 (864/1,000)

1765화. 불살불방(不殺不放)

실내에는 어떠한 물건도 없었다. 그야말로 텅텅 빈 데다 어두컴컴했다.

그곳에 나추는 뒷짐을 진 채, 움푹 들어간 벽에 놓인 초라한 유등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와 반항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원비도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저를 가지고 영애와 교환하려 하시는 것입니까?”

나추는 살짝 뒤를 흘겨보았다.

“좋은 질문이다. 원 뚱땡이가 널 구하자고 교환에 응할 것 같으냐?”

원비는 기분이 상했다.

“저를 여기로 유인한 것이, 바로 그것 때문 아닙니까?”

“넌 그 뚱땡이에게 네가 가지는 의미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구나. 그게 아니면 그놈이 왜 내 딸을 납치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거나.

그가 아무 이유 없이 내 딸을 건드리진 않았을 거다. 그리고 이왕 건드렸다면 아무 성과 없이 풀어주지도 않겠지.

그런데 너와 교환을 해? 네 목숨은 아무 가치도 없으니 뚱땡이는 절대 승낙하지 않을 거다. 사실 내 말도 필요 없이, 너조차 확신하지 못하겠지.”

원비는 기분이 더 나빠졌다.

“설마 성존께서 절 유인한 게 겨우 이간질을 위해서입니까? 잘 아시겠지만, 절 풀어주지 않으면, 우리 성존께서도 영애를 풀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말했다시피 넌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 내가 널 죽이든 풀어주든, 원색은 쉽게 딸을 풀어주지 않을 거다. 이걸 가지고 말싸움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으니 더 중요한 얘기를 하지. 오늘부터 넌 내 사람이 되어라.”

원비가 고개를 살짝 틀며 미소를 그렸다.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지금 절 포섭하려 하시는 것입니까?”

“잘 들어라. 원색이 줄 수 있는 건 나도 다 줄 수 있다. 거기에 원색이 줄 수 없는 것도 줄 수 있지.”

원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설마 성존께 무량과라도 있단 말씀입니까?”

“원색이 네게 줄 수 없는 것, 네 눈을 네게 주마.”

원비의 표정이 급변했다. 나추에게 자신의 눈을 고칠 방법이 있다고?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원비, 아직도 모르겠느냐? 설마 못 봤느냐? 귀의의 목숨이 내 손에 있다. 네 눈을 고칠 수 있는 사람 목숨줄을 내가 쥐고 있다는 말이다.”

원비도 순간 그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굳어버렸다.

나추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내 기분에 따라 저들을 언제든 죽일 수 있다. 저들 몇 명 죽인다 해도 원 뚱땡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 설 요괴는 말할 것도 없고, 오상을 포함한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나를 질책하지 않을 것이다.

원비, 그러니 네가 한번 말해보아라. 내 저들쯤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온전히 내 기분에 달린 것이다. 너는 내가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내가 저들을 죽이길 바라느냐, 살려두길 바라느냐?”

원비는 거칠어진 호흡으로 나추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는 나추가 직접 움직인 일이기에, 귀의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나추는 다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미색이구나. 한 눈이 없다는 것이 실로 안타깝군.”

원비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머릿속 저울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해득실을 따져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매듭지어야 했다.

그녀는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들을 죽이든 살리든, 성존 뜻대로 하십시오!”

나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원 뚱땡이가 중용하는 이유가 있었군. 확실히 기개가 있구나. 나도 기개 있는 자를 좋아하지. 좋다. 자신을 내려놓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에게 겨우 눈 하나로 협박하는 것도 치졸한 짓이지. 그럴 필요도 없고, 나도 그런 소인은 되고 싶지 않다. 한눈을 포기할 각오가 됐다니……, 좋다. 널 곤란하게 하지 않으마. 이만 떠나도 좋다.”

원비가 멈칫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풀어준다고? 하지만 성존 같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확신이 없었던 원비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정말 이대로 절 풀어주신단 말입니까?”

“네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느냐? 가려면 가고, 남으려면 남아라. 결정은 언제나 네 몫이다.”

원비는 천천히 뒷걸음질하며 포권을 했다.

“성존의 하해와 같은 마음은 저 같은 자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습니다. 성존께서 베풀어 주신 관용에 감사드립니다.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원비가 뒤돌아 걷는데, 뒤에서 다시 나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내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있군. 너는 얼마든 보내줄 수 있지만 귀의와 제자들은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원비는 우뚝 서서 살짝 뒤돌아보았다.

“성존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관용만으로도 이미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들에 관한 일까지 바라는 건 주제넘은 짓이지요. 그 또한 저들의 운명인 것을 누굴 탓하겠습니까.”

“나는 그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원 뚱땡이에게 알려야지. 네 눈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지 그뿐이다.”

원비는 순간 한쪽 눈을 부릅뜨며 휘청거렸다. 마치 벼락에 맞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 나추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녀의 한쪽 눈에선 비통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나추는 다시 담담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처럼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이지? 하긴, 원 뚱땡이가 어떤 사람인지, 오랫동안 따른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넌 지금 그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 네 목숨을 걸고 한쪽 눈을 포기했다. 나는 그걸 직접 보았지. 그러니 나는 믿지만, 과연 원 뚱땡이도 그걸 믿을까?”

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믿을 것이다, 아마도 믿겠지. 하지만 네 아름다운 용모를 돌려줄 수 있는 이가 나한테 있는 이상,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을 바꿀 줄 누가 알까. 뚱땡이가 베갯머리에 의심스러운 자를 두려 할까? 이제 원 뚱땡이가 널 어찌 대할지, 안 봐도 훤히 그려지는구나. 너도 예상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는 분명 신중할 것이고, 넌 머지않아 대원성지 권력 중심에서 밀려날 것이다. 넌 더 이상 그의 심복이 될 수 없고, 어쩌면 다시는 그에게 다가가는 것도 어려울 수도 있겠지.

이 말이 현실이 될지, 아닐지는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권력을 잃으면, 넌 대원성지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새롭게 권력을 쥔 자, 너를 방비할 테고 넌 참으로 어려운 나날을 보내게 되겠지. 평안한 죽음만이 유일한 행복이라 느낄 정도로.

원비, 넌 똑똑한 사람이다. 그런 자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해도, 그는 고마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넌 과연 그럴 가치가 있다고 보느냐?”

원비는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이게 정녕 보내준다는 것입니까?”

“나는 지금 널 돕는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네 눈을 치유하길 바란다. 귀의가 말하길, 적합한 눈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더군. 자신의 눈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눈이라고. 네게 제일 알맞은, 네가 잃어버린 그 한 눈이 지금 원색에게 박혀있지. 난 지금 너를 위해 그걸 되찾아주려는 것이다.”

“그를 죽이려는 것입니까?”

원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연한 추측이었다. 원색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다시 안구를 파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리 놀랄 것 없다. 원색이라고 나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으냐?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원비, 네 눈을 강제로 파낸 사람이다. 정녕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가치가 있다고 보느냐? 귀의가 내 손에 있다. 안구를 다시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 즉시 너를 예전처럼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정말로 네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냐?”

원비가 비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그리 쉽게 죽일 수 있다면, 지금껏 기다릴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러니 너를 찾은 것이다. 넌 지금 그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지. 그러니 어떻게 그를 처리해야 할지는 네게 달려있다. 네가 안에서 협력만 해주면 일은 아주 쉬워질 것이다.

나중에 내가 널 토사구팽할까 두려워할 필요 없다. 확실한 보장을 해주마. 지금 내 제자 육지장이 여기로 오고 있다. 그 아이는 지금껏 홀몸이었으니, 너와 정식으로 혼인을 시켜주겠다. 그러나 앞으로 너희 부부 사이까진 약조해줄 수 없다. 모든 건 네게 달려있겠지.

이제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명분일 뿐이다. 난 최소한 제자의 부인을 함부로 죽일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다. 대나성지에선 과거와 같은 권력을 휘두를 수 없을지 모르나, 평생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죽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외모도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원비가 이를 악물었다.

“저는 원색의 여인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육지장이 저를 받아들이겠습니까?”

“걱정할 것 없다. 원색의 여인을 차지하는 일이다.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겠느냐? 또 혼인 후엔 차차 손을 쓸 것인데, 대체 뭘 걱정하는 것이냐?”

* * *

산속 동굴.

밀서가 도착했다. 우유도는 내용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여무쌍에게 서신을 건넸다.

“성공했습니다!”

여무쌍도 서신을 확인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이 없다면 나추는 움직이지 않았을 거예요. 예상했던 일이지요.”

서신을 들고 들어온 운희는 이미 서신의 내용을 확인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확인했다. 죽이지도 않고, 놓아 주지도 않는 나추의 ‘불살불방(不殺不放)’ 한 수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이 퇴로가 끊겼다.

운희의 생각처럼 어렵지도 않았고, 너무나 쉽게 성사되었다. 이건 그녀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방법이었고, 덕분에 안계를 크게 넓힐 수 있었다. 운희는 이런 사람들과 같이 지내며, 정말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때, 원강이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여무쌍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 그녀의 눈빛엔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원강도 여무쌍을 힐끗 바라보더니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그는 여무쌍이 조금 껄끄러웠다.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부인’이라고 불러야 했으니……. 그 말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올 리도 없고, 그날 여무쌍과 말싸움을 한 이후 원강은 은연중에 그녀 앞에서 위축이 되곤 했다.

원강은 바로 우유도에게 밀서부터 건넸다.

“궁임책 쪽에서 긴급 전서를 보내왔어요.”

긴급 전서? 우유도는 빠르게 내용을 살폈다. 이번엔 여무쌍도 목을 길게 빼고 내용을 같이 확인했다.

본디 정말 뭔가 두려워하면 그 두려워하는 것이 온다고 했던가. 표묘각에선 운희와 왕소의 행적에 관심이 생겼고, 자금동에게 두 사람을 초려별원으로 복귀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궁임책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변명은 날짐승을 쓸 수 없으니, 복귀하는데 며칠이 필요하다는 것뿐이었다.

“분명 별원에 머무르고 있는 대원성지 사람들 솜씨일 겁니다.”

“예상한 일이에요. 저들이 별원에 머무른 후, 두 사람은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요. 시간이 길어지면 당연히 관심이 생길 것이었어요. 원색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들은 절대 방심하지 않을 테니까요.”

“도운산에서 초려별원으로 최대한 빨리 복귀하라는 명령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최대 5일밖에 없습니다. 만약 나추 쪽에서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아주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사여래에게 나추가 최대한 빨리 손을 쓸 수 있도록 재촉하라고 해야겠습니다.”

여무쌍이 대답했다.

“아마 소용없을 거예요. 움직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움직인다면 분명 어떤 확신이 있어야만 할 거예요. 절대 경거망동할 사람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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