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2화. 깨어난 와호(卧虎)
무너진 갱도 안에서도 다들 놀란 모습이었다. 이들은 법력으로 일정 공간을 만들어낸 뒤, 호랑이 울음이 들려온 무너진 통로 쪽을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놀란 시선들이 바쁘게 오갔다. 말없이 서로를 보며 대체 이 소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었다.
한창 분주히 시선이 오가던 중, 은아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잊었던 뭔가가 생각난 듯 원망 가득한 눈망울로 우유도를 쳐다보았다.
“도도, 날 때렸어.”
그 소리에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호랑이 울음소리?”
관방의의 말에, 제갈지가 바로 물었다.
“그가 들고 있던 칼이 혹시 서문선의 삼후도요?”
여무쌍은 무척이나 놀랐다. 믿을 수가 없었다.
“와호(臥虎)가 깨어났다고?”
운희도 머뭇거리며 말했다.
“와호가 깨어나면 천하무적…….”
다들 방금 그 소리가 원강에게서 비롯됐다는 걸 믿지 못하는 듯했다.
이제껏 원강을 걱정하던 우유도조차 호랑이 울음에 온 신경이 사로잡혔다.
* * *
지하도가 무너진 곳은 원색이 공격한 쪽이었다. 손속을 겨루던 부분도 조금 무너졌지만, 원색 뒤편은 멀쩡했다. 앞서 충분히 뒤로 물러난 까닭이었다.
스스슥-
호랑이 울음소리에 지하도 천장에서 모래가 바스락거리며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지하도는 뚫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흙들이 습기를 머금고 있어 먼지가 심하게 나진 않았다.
지하도는 원강이 허리를 굽힌 곳 등 뒤까지 무너져 내렸다. 남은 거리는 겨우 반 장(丈) 정도였다.
흙들은 원강이 있는 곳까지 굴러떨어졌고, 칼끝을 바라보는 원강은 그대로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원강이 삼후도를 이런 위력을 발휘할 정도로 휘둘러 본 건 처음이었다. 그 역시 적응되지 않아 얼떨떨했다. 하마터면 영혼까지 그 단 한 번의 칼질에 빨려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정기신을 모두 칼에 집중했던 까닭에 회수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입과 코를 통해 금빛 안개가 폐까지 순환했고, 원강도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눈꺼풀이 걷힌 시야엔, 밝게 빛나는 두 점이 맺혔다. 원색이 몸에 걸치고 있던 야명주였다.
야명주는 원색의 몸에 아주 절묘하게 붙어 있었다. 옷 좌우에 작은 주머니 2개가 달려 있고, 그 작은 주머니엔 가릴 수 있는 천이 별도로 달려 있었다. 야명주 2알은 바로 그 주머니 위쪽 단추에 달린 것 같았다.
평소엔 주머니 속에 달려 보이지 않지만, 어두운 곳에선 언제든 꺼내 주위를 밝힐 수 있었다. 누가 봐도 게으른 이가 쓰기 편하게 만든 것이었다.
원색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그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원강은 다시 두 눈을 굳히고, 힘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지하도가 무너진 방향에선 원색의 공격력이 만들어낸 기류가 원강을 옷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전방을 향하는 기류는 원색의 옷도 함께 흔들어댔다.
그 바람 끝에, 원강은 비로소 뭔가를 발견하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원색의 상반신 가슴 한 곳이 갈라졌다. 정확히는 베인 자국이었다.
그 아래 바람이 일자, 원색의 피부에 한줄기 혈선이 드러났다.
휘몰아치는 기류 속에서 원색이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렇게 해야만 안정적으로 설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호랑이 울음소리가 천천히 가라앉고, 지하도 천장에서 떨어지던 모래도 비로소 추락을 멈췄다. 주변을 휘날리던 바람 소리도 사라졌다.
원색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미소는 어째 좀 추해 보였다. 시선은 원강이 든 칼끝에 머물렀다. 원색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는 꼭 원강에게 묻는 듯, 스스로에게 묻는 듯 아주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단 일도로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삼후도? 노호는 쉽게 울고, 분호는 소리가 없으며, 와호는 깨우기 어렵다지. 와호가 깨어나면 천하무적이라던데, 정말인가? 함정이군. 너희는 함정을 파고 날 기다리고 있었어. 맞지?”
원강은 싸늘한 눈으로 중얼거리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적이 쓰러지지 않았으니, 원강의 전의도 당연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 * *
천장이 무너진 반대편에선 다들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원색이 이겼다면, 지금껏 자신들을 쫓아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우유도는 더 이상 이대로 기다릴 수 없었다. 원색을 만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제 다 집어치워 버렸다. 원강을 지킬 수만 있다면 목숨이 위험해져도 상관없었다.
우유도는 원색에게 자신이 꽤 이용 가치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기에 제일 먼저 나서서 신속히 무너진 지하도를 파내기 시작했다.
이쪽은 무너진 곳이 길지 않아서인지, 땅을 파내는 건 간단했다.
곧이어 우유도가 머리부터 빠르게 빠져나왔다. 그의 시야를 가장 먼저 찾은 건 여전히 굶주린 늑대처럼 먹이를 노리는 듯한 원강의 모습이었다.
허리를 구부린 채 두 손에 칼을 움켜쥔 원강의 맞은편엔, 마찬가지로 원색이 두 다리를 앞뒤로 하고 서 있었다.
대치한 두 사람은 그대로 굳어버린 조각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원강은 형형하게 원색을 노려보고 있었고, 원색은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곧 뒤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며 관방의가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녀 역시 눈앞의 대치 장면을 보고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운희 역시 부상도 무릅쓰고 뛰쳐나왔다가, 눈앞에 미소를 띠고 있는 원색을 보고 멈칫했다.
아무 반응도 없음을 이상히 여긴 나머지도 하나같이 모두 다 뛰쳐나왔다. 단, 원방만은 거북이처럼 뒤에 숨어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엔 여무쌍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녀 또한 눈앞의 상황이 매우 의아했다. 제일 이상한 건 원색의 반응이었다.
은아는 방금 들은 기괴한 호랑이 울음소리에 불안을 느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우유도에게 다가가 소매를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컥…….”
그때, 원색이 신음을 내뱉었다. 기침 같기도, 숨결 같기도 한 무언가를.
원색은 더 이상 무엇도 숨길 수 없었다. 가슴은 끝내 붉은색을 내비치더니 서서히 앞섶을 피로 물들여갔다. 이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피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뚝- 뚝-.
붉은 핏방울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
모두의 시선도 자연스레 원색의 발치로 향했다. 흐르는 핏물은 그의 발아래 몸을 누이며 조그만 피 웅덩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
이제 다들 뭔가를 깨달았다. 모두의 시선이 양손으로 칼을 움켜쥔 원강에게 향했다. 하나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야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원강은 전의를 죽이지 않고 여전히 뛰쳐나가겠단 자세로 원색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든 그를 공격할 각오가 돼 있었다.
이윽고 지하도는 피비린내로 물들었다. 핏물은 땅을 적시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 원색의 얼굴은 창백하게 옅어져 갔다.
그는 더 이상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듯, 느리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주인은 쓰러지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흔들리는 각도는 점점 더 커지고, 원색의 상반신은 불가사의한 각도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곧 그의 가슴이 갈라지며 상반신이 뒤로 접혔고, 거대한 몸은 완전히 뒤로 넘어가 버렸다.
쿵-!!!
“……???!!!”
굴을 뚫고 나온 모두가 경악했다. 넋이 다 저 멀리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 천하의 원색이, 대원성존이……. 죽었다.
그때, 박쥐 하나가 어둠 속에서 날아와 지하도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휙-!
원강이 바로 칼을 휘두르자 뭔가가 아래로 추락했다. 박쥐는 두 쪽이 되어 쓰러진 채 바닥에서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원강은 칼을 쥔 채 드디어 일어나, 진중히 원색을 향해갔다. 원색의 시신 곁에서 원강은 끝없이 침묵했다. 동시에 머릿속은 깊은 사색에 잠겼다. 지금 그는 방금 자신의 일도를 되새김질하며 그 의미와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유도 등도 천천히 걸어와 원색의 시신을 내려다봤다. 가슴은 거의 잘리다시피 갈라져 있었다. 등 쪽 일부 피륙만이 붙어 있을 뿐, 가슴은 철저하게 갈라진 상태였다. 그 사이로 흘러나와 주변을 물들인 피가 진정 역겨웠다.
정녕 원색이 이렇게 죽었단 말인가? 원강에게? 다들 시신을 보다 침묵하는 원강을 바라봤다. 여전히 꿈을 꾸는 듯했다. 조금 전 그 놀랍던 광경에서도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 더욱 충격적인 결말과 만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우유도가 원강에게 물었다.
“네가 죽인 거냐?”
원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요.”
“방금 3번째 울음소리를 들었어. 바로 그 3번째 호랑이 와호였어?”
원강은 손에든 칼을 보며 다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싸우는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어. 그냥 호랑이 울음소리 3번만 들었지. 싸우는 과정도 아주 짧았고. 설마……. 단 한칼에 죽인 거냐?”
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 한칼이었어요.”
‘허……!’
다들 가슴이 섬찟했다. 단 한칼에 원색을 죽였다고?
운희처럼 상황을 알고, 원강이 최근 실력이 크게 진일보했다는 걸 아는 사람조차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원강이 성나찰과 완력으로 겨룰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단 일도에 원색을 참살했다는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와호가 깨어나면 천하무적이라고 했지.”
질문인 것 같았다. 이는 삼후도를 든 원강 스스로가 제일 절절하게 느끼고 있을 터였다. 원강은 잠시 원색의 시신을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하무적이요? 어쩌면요. 하지만 그게 전 아닐 거예요. 원래 이 칼은 수행자의 손에 갔어야 했던 건지도 모르죠. 나 같은 사람 손에 있다면 분명 천하무적은 이루지 못할 거에요.
원색은 방심했어요. 저도 원색이 제 일도를 피하지 못할 줄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원색은 당황한 것 같았어요. 그게 아니라면 전 원색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못했겠죠. 지금 이런 환경에서 원색을 만난 게 아니었다면, 아마 접근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거예요.”
원강을 아는 이들은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원강은 비행조차 하지 못하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 원색 같은 고수를 뒤쫓을까.
원강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스스로의 힘을 알았다면, 지금 이 결말을 알았다면, 그렇게 사력을 다해 어서 도망치라고 외쳤을 리도 없었다.
조금 전 그는 틀림없이 아무 확신도 없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나선 것뿐이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모든 걸 걸고 나섰던 것이었다.
이내 여무쌍이 이야기했다.
“그렇게 스스로 비하할 필요 없어요. 원색은 기술을 익히고 있는 사람으로 도검불침의 몸을 가지고 있지요. 구성이 모두 있었을 때도 아무도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못했어요. 그런 원색이 오늘 당신의 일도에 참살당했군요. 그것만 봐도 당신의 일도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 수 있지요.
서무선이 와호가 깨어나면 천하무적이라고 했어요. 아마도 이 칼이 기회가 오면 모든 걸 베어버리는 위력이 있음을 뜻하는 것일 거예요. 그러나 천하에 진정으로 당신의 일도를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원강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복잡해 보였다.
뒤에 숨어있던 원방은 그야말로 괴물을 보듯 원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중요한 일이 있으니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오. 여긴 오래 머물 곳이 아니오!”
우유도는 재빨리 사람들을 추스르며, 원강에게 이곳을 처리하라 손짓했다. 원강은 즉시 원색의 몸을 수색해 쓸만한 물건을 모두 회수했다. 이에 운희도 거들며 원색의 시신은 깊은 땅속에 그대로 묻었다.
일행은 빠르게 그곳을 떠나 지하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거칠 것 없던 원색의 삶 역시, 산 아래에 흔적 없이 묻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