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4화. 눈은 있으나
초려별원의 격렬한 싸움이 지속되던 도중,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사 선생님! 각주님을 찾았습니다!”
“알았다!”
사여래도 기쁘게 소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하늘에서 한 사람이 유유히 내려섰다. 마치 주위를 한바탕 휩쓸고 가는 청룡이 강림한 듯한 느낌이었다.
대원성지 사람들 입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추가 돌아온 것이다.
나추의 등장에, 대원성지 쪽은 즉시 싸움을 멈추고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원색이 나서지 않으니, 춘도 감히 남아 있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망치는 와중에도 춘은 원비를 잊지 않았다.
* * *
춘은 그대로 마루로 뛰어가 하나뿐인 원비의 눈에 비녀를 찔러넣었다.
콰당!
원비는 의자에 앉은 채로 뒤로 넘어갔다.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끝내 하나 남은 눈마저 잃고 말았고, 비녀는 텅 빈 안구를 타고 머릿속을 헤집었다.
모두 다 잃어버린 눈 사이론 붉은 선혈이 눈물처럼 흘렀다.
춘은 원비가 죽었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도망쳤다.
그간 춘이 원비를 얼마나 증오했는지는 지금 원비의 처참한 상태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춘은 이 긴박한 상황에도 기어이 원비의 한쪽 눈마저 망가뜨리고 달아났다.
* * *
페허 가운데에서 나추는 조용히 손짓했다. 사여래 등은 즉시 수하에게 신호를 보내 더는 대원성지 인원을 추적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내 나추는 싸늘한 눈으로 천천히 뒤를 돌았다.
“누가 너희보고 독단적으로 이곳을 공격하라고 했느냐? 원 뚱땡이에게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았단 말이더냐?”
육지장은 안절부절못했지만, 사여래는 모든 걸 자신의 잘못으로 돌렸다.
“사부님, 전 사부님께서 원색을 저 멀리 유인하신 것을 보고 방비가 아직 이곳에 갇혀있다는 생각에 기회를 보다 공격한 것입니다. 이대로 원색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다신 기회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이곳을 갈아엎었습니다. 더는 사람을 숨길 곳도 없고, 방비도 찾아냈습니다.”
나추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비를 찾았다고?”
“네! 방금 여기서 찾았습니다.”
나추가 냉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색은 돌아오지 않았고?”
“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추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방금 이곳을 벗어날 때만 해도 본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원색이 그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원색이 갑자기 또 추격을 포기하길래, 나추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런데 점점 생각할수록 원색이 몹시 이상해 보였다. 분명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왜 그리 오랫동안 쫓았단 말인가?
그제야 나추는 원색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난장판이 된 지금을 목도한 것이다.
“성존! 사 선생님!”
갑자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누군가 한 사람을 안고 달려왔다. 나방비가 그 품에 안겨있었다. 입술도, 안색도 모두 검푸르게 물든 너무도 낯선 모습의 나방비가.
그가 보고하길, 처음 발견 시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얼마 후 나방비가 중독된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사여래는 몹시 깜짝 놀랐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속은 아주 덤덤했다. 모두 다 연기였으니까. 그는 진작부터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우유도는 원색의 몸에서 단약 일부를 찾아냈지만, 어떤 게 해약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혹시 나방비에게 함부로 복용시키지 못하겠다면, 그냥 귀의에게 데려가는 것이 방법이라고도 전했다.
만약에 귀의도 방법이 없다면 귀의에게 단약을 보이라며, 사여래에게 단약도 다 넘겼다. 기회를 틈타 별원에서 찾은 것이라며 보여주면, 귀의처럼 능력이 뛰어난 자는 분명 해약을 찾을 방법이 있을 터였다.
이내 나추는 직접 나방비의 몸을 살폈다. 어쨌든 자신의 딸이었다. 딸의 상태가 매우 중한 걸 보니, 전에 원색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건 필시 보통 독이 아닌 것 같았다. 나추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흑리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라.”
그러던 그가 다시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원 뚱땡이가 수작질을 부리고 있으니 아무래도 내가 직접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 너희는 지금 즉시 철수해라.”
나추는 나방비를 건네받아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누구도 뒤를 따를 수 없었고, 사여래 일행도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서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나추는 하늘에서 품 안의 딸을 내려다보며, 서서히 얼굴을 굳혔다.
딸을 구한 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원색을 죽여 그 입을 막지 않으면, 딸의 구명이 무슨 소용일까. 어쩌면 원색의 분노만 건드려 비밀이 폭로될 수도 있었다. 그게 바로 사여래를 질책한 이유였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딸을 구한 제자와 수하들에게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복잡한 상황 앞에, 나추의 마음만 먹구름처럼 짙어졌다.
* * *
다 무너져 가는 마루에선 육지장은 원비의 시신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신은 아직 따뜻했다. 피도 채 굳지 않은 걸 보면, 방금 막 세상을 떠난 게 분명해 보였다.
죽은 모습은 썩 고상하지 않았다. 눈은 있으나 눈동자는 없는, 참혹한 죽음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내 한쪽에 있던 사여래가 다가와 육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네! 여긴 오래 머무를 곳이 아니야. 원색이 오면 우리가 아주 곤란해질 수 있어. 시신은 대나성지로 데려가 장사지내지.”
“그 무슨 농담입니까. 이 여인이 살아 있었다면 대나성지로 갈 수 있겠지만 죽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이 여인을 성지에 안장하도록 하시겠습니까?”
사여래는 침묵했다.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그리 떳떳한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죽어 버렸으니, 그냥 이대로 묻자는 얘기였다. 나추도 이번 일을 많은 사람이 알길 바라지 않을 터였다.
“어찌 처리할 것인가?”
사여래가 한숨과 함께 물었다.
육지장은 고개를 들고, 폐허가 된 하늘을 밝히는 별빛을 눈에 담았다.
“그냥 여기로 하지요. 근처에 터가 좋은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이곳에서 장사지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생각이 나거나 여유가 되거든 가끔 찾으면 될 것입니다. 특별히 뭔가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육지장은 원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과 함께 보낸 첫날 밤도, 끝내 구해주지 못한 그물 속 간절한 그 눈빛도, 모두가 생생히 살아있던 현실이었다.
짧은 인연은 기어이 그의 가슴에 상처 하나를 새기고 떠났다. 육지장도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하아!”
사여래가 한숨을 내쉬곤, 알아서 하라는 듯 육지장의 등을 두드리며 떠났다. 그렇게 대나성지의 사람들도 빠른 철수를 시작했다.
* * *
조그만 마을, 한 작은 농가 마당.
나추는 뒷짐을 진 채, 여명을 머금은 하늘빛을 맞으며 서 있었다.
곧이어 귀의가 문 발을 젖히고 나와 나추 앞에 포권을 했다.
“성존, 방비 각주님은 무사하십니다. 며칠만 지나면 회복하실 겁니다.”
“널 죽이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인 것 같구나.”
나추가 그를 힐끗 보고 말했다.
귀의는 그저 허리를 깊이 숙인 채 침묵했다.
이내 나추는 그대로 안에 들어가 딸을 안고 저 먼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잠시 후, 무심이 은편 여러 개를 들고나왔다.
“사부님, 이것 보십시오.”
귀의의 시선은 즉각 은편 위 핏방울에 닿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사부님, 이 방비 각주의 피가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혈색을 보면 정상인 같지만, 이 피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굳질 않습니다. 어째 요혈(妖血)같기도 합니다. 혹시 중독됐기 때문일까요?”
귀의는 화가 났는지 다소 언성이 높아졌다.
“독은 모두 해독됐다. 그런데 무슨 독이란 말이더냐? 사람을 데려간 후에 독이 발작하기라도 바라는 것이냐?”
무심은 다시 핏방울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럼 이건 어찌 된 일입니까?”
귀의는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그 의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건 인간과 요괴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가지는 특징이다.”
무심은 깜짝 놀랐다.
“아! 그럼 방비 각주님은…….”
귀의는 즉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빠르게 주변을 훑는 귀의를 보고, 무심은 가슴이 섬뜩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이런 말은 밖에서 함부로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
귀의가 여전히 손으로 제자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그때, 날짐승 하나가 머리 위를 스치며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사여래였다.
“너희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귀의는 그제야 손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생님, 각주님은 이미 성존께서 데려가셨습니다.”
사여래가 즉시 물었다.
“독은 어찌 되었나?”
“별문제 없을 것입니다.”
사여래는 안도했다.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 드디어 모두 다 지나갔다. 그는 곧 포권으로 정중히 공로를 치하했다.
“수고했네. 그대들은 자유가 됐네. 난 일이 있으니 이만 가보지.”
귀의가 다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선생님, 원비가 이번 일을 알았으니 저희를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각주님을 치료한 공을 봐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사여래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게. 원비는 이미 그 누구에게도 입을 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어. 이번 일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네.”
귀의가 깜짝 놀랐다.
“그 말씀은, 원비가 이미…….”
사여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이미 죽었어. 자네들은 안전하네.”
사여래는 그대로 날아올라 공중을 맴돌던 날짐승을 타고 떠나버렸다.
그는 딱 원비의 죽음만을 알렸다. 원색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알릴 생각이 없었다.
* * *
“구성 중 또 하나가 갔구나…….”
구름 속에서 사여래는 홀로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에 초려산장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나방비를 미끼로 내세우기까지 했었다. 위험한 순간을 지나 원색을 독살하는 것엔 실패했지만, 다행히도 원색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이 흉험한 일로 원색의 목숨을 앗았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 * *
마당에 있던 사제는 아직도 서로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원비의 눈은 아직 그들에게 있었다. 처음부터 원색에게 끼워준 눈은 원비의 것이 아니었다. 제경 전쟁터의 시신 한 구에서 채취한 눈이었다.
원비의 안구는 여전히 비밀 제조한 약수에 잠들어 있었다. 애초에 이식을 위한 원비의 눈은 필요가 없었다. 언젠가 마지못해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막연히 생각한 미래였었다.
원비는 결국 그토록 염원하던 눈을 지척에 두고, 세상과 작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