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5화. 기회
산중, 거대한 나무 아래.
우유도는 사여래와 단독으로 만났다.
“나방비는 어찌 됐습니까?”
“귀의가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 했네. 나추가 이미 데려갔어.”
우유도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만약 나방비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은희를 어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이번 일이 끝났으니, 나도 성경에 돌아가 봐야겠어. 지금 표묘각은 곽공이 장악하고 있네. 그는 곧 본인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워지겠지. 또 지금 표묘각 내부 주요 직위는 모두 대원성지 사람들이네. 원색의 죽음이 밝혀지면 표묘각은 혼란에 휩싸이겠지. 각 문파를 대상으로 하는 조사도 좀 늦춰질 것이네. 자네도 숨 쉴 시간을 좀 벌었군. 하, 아무튼 자네도 몸조심하게.”
사여래는 진심으로 우유도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 일을 통해, 사여래는 우유도를 깊이 신뢰하게 됐다. 우유도가 나방비를 지키겠단 약조를 위해 극히 위험한 모험을 했고, 사람들은 모두 원색의 손에 죽어 전멸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처럼 믿을만한 이에게 무엇을 더 불안해할까.
“곽공이 나와서 말인데, 마침 할 얘기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돌아가기 힘드실 겁니다. 저한테 날짐승이 없으니 움직이기 불편합니다. 선생님이 두 사람을 천도봉으로 데려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여래가 깜짝 놀랐다.
“천도봉을?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원색이 죽었습니다. 그건 지금 외부인이 모르는 정보지요. 곽공은 손에 표묘각의 대권을 쥐고 있습니다. 지금 이게 표묘각에 큰 타격을 줄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여래는 조용히 두 눈을 번뜩였다.
우유도도 계속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에 우린 나추의 손을 빌려 원색을 죽일 생각뿐이었지요. 일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몰랐습니다. 결국 원색은 죽었지만, 나추가 죽인 건 아닙니다.
지금껏 우린 원색이 이리 비밀스레 죽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나추조차 원색의 죽음을 모릅니다. 외부인 중 누가 원색의 죽음을 알겠습니까? 일단 외부에서 원색의 죽음을 알게 된다면, 곽공이 어찌할 것 같습니까?”
“말할 것도 없지, 과거와 똑같을 것이네. 나머지 오성은 분명 원색의 세력을 쓸어 버리려 할 것이고, 곽공은 당연히 도망치고 숨어들겠지.”
“그냥 이대로 숨어버리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 그가 가진 권력을 이용해 뭔가를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수동적으로 표묘각 조사를 기다리는 건 방법이 아닙니다. 큰 기회가 왔으니, 이번에 표묘각에 큰 타격을 입혀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오성이 더는 조사를 이어갈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사여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당부하지 않을 수 없군. 육성이 비록 각지에 몸을 숨기고 있지만, 그건 단지 빠르게 반응하기 위해서일 뿐, 서로 간에는 분명 계속 연락하고 있을 것이네. 나추가 곧바로 원색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온 것이 바로 그 증거지. 원색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분명 의심할 것이네.”
“그건 저도 생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들이 원색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곧바로 어쩌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어느 정도 공백기가 있겠지요. 제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 시간 차입니다.
표묘각을 무너뜨리지는 못해도 큰 타격을 입힐 수는 있을 것입니다. 어제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사람을 시켜 원색의 시신을 파내게 했습니다. 이번에 그 시신을 곽공에게 전해 주십시오. 다른 것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좋네! 이런 일이 있었으니, 하루 이틀 늦게 돌아가도 큰 문제 없겠지.”
그저 사람을 실어다 주는 것이니, 사여래에게도 별 어려울 게 없었다.
* * *
왕부.
지금 상조종은 폐허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상숙청과 남약정도 그 곁을 지켰고, 등 뒤엔 남주의 문무백관이 조용히 자리해 있었다.
남주부성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지만, 왕부는 이미 폐허가 되었다. 사실 왕부는 물론, 초려별원까지 모두 다 초토화가 되어버렸다. 간혹 우연한 행운으로 피해를 스친 건축물만 군데군데 외롭게 서 있을 뿐, 상황은 처참했다.
변사들은 폐허 속을 뒤지며 수시로 시신들을 찾아냈다. 수행자들의 시신도 있었지만, 그보단 남주부성의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다. 개중엔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도 수없이 구출하고 있어, 다들 고통의 눈물을 흘렸다.
겨우 하룻밤 사이 남주부성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목숨을 잃었을까. 거의 5분의 1에 달하는 구역이 파괴됐으니, 그 공포의 깊이는 쉬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직도 여기저기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살아남은 이들도 가족의 시신 앞에 비통한 슬픔을 토해냈다.
상조종은 이 모든 걸 지켜보며 허리춤의 칼을 움켜쥐었다. 수행자들은 감히 백성들이 주거하는 곳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저 공포에 질린 백성들을 보라, 이건 그야말로 백성의 목숨을 초개로 여긴 짓거리 아니겠는가!
상조종의 가슴엔 엄청난 분노가 들끓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 하나 없는 실정이었다.
상숙청 역시 눈앞의 참상을 목격하고 몹시 침울해하고 있었다.
그때, 한 수신 호위가 다가와 보고했다.
“왕야, 몽 사령관님이 뵙길 청하십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조종은 일단 남약정에게 일을 일임했다.
“뒤처리는 남 선생에게 맡기겠소. 만약 군이 필요하다면 여러분들께서 많이 도와주시오.”
남약정이 포권을 했다.
“알겠습니다!”
옆에 있던 장수들도 동시에 포권했다.
“존명!”
* * *
왕부는 초토화되었으므로 몽산명은 남주부성 한 관아에 임시로 기거 중이었다. 상조종은 곧장 그의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안에는 몽산명 뿐만 아니라 우유도와 관방의도 있었다.
잠시 멈칫했던 상조종은 급히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도야를 뵙습니다.”
우유도는 예를 거두라 손짓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왕야께 큰 폐를 끼쳤습니다. 단지 죄송하다는 말로 보상할 수 없겠지요. 그래, 사상자는 얼마나 됩니까?”
상조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사상자들을 다 추리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좀 더 기다려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이번에 죽은 사람만 1천이 넘을 테고, 수많은 사람의 집과 점포가 폐허가 됐습니다. 다들 돌아갈 집을 잃었습니다.”
우유도는 곧 관방의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관방의가 소매에서 전표 한 다발을 꺼냈다. 상조종은 당연히 깜짝 놀랐다.
“도야, 이게 무엇입니까?”
“이제 와 죄송하단 말은 소용이 없겠지요. 이번 일은 제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 왕야께서는 후진국 점령지를 위해 남주에서 대량의 재물을 빼냈습니다. 아무래도 넉넉하지 않으시겠지요. 이건 금 1천만 냥입니다. 왕야께서는 저를 대신해 사상자들의 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의 거처와 점포도 다시 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망설이는 상조종을 보고, 몽산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야, 받으십시오.”
상조종은 결국 전표를 받으며 질문했다.
“도야, 어제저녁 갑자기 수많은 천검부가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각 국가의 대군이 싸울 때도 이처럼 많은 천검부를 사용하지는 못합니다.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큰일이 생겼으니 궁금하시겠지요. 오늘 온 것도 왕야께 설명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어제 나추와 원색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대나성지와 대원성지의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충돌한 것이지요. 또 왕야께 말씀드리자면, 원색은 이미 죽었습니다. 나추가 아니라, 우리가 목숨을 꺾었습니다.”
순간 상조종도, 몽산명도 너무도 놀라 말문이 막혔다.
우유도는 다시 당부를 이었다.
“원래 이번 일은 왕야께 알려드리면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은 백성이 죽었어요.
이건 왕야께 드리는 제 변명입니다. 다만 왕야와 몽 사령관님께서는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극비입니다. 이 문을 나서는 즉시 차라리 잊어버리십시오. 그 누구에게도 언급해선 안 됩니다. 그저 할 일 하시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왕야께 큰 해가 될 것입니다.”
* * *
성문 밖 산중.
나추의 등장으로 대원성지 인원 모두가 이곳에 숨어들었다.
춘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시간이 지나도 원색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남주부성으로 밀정도 들여보냈지만, 여전히 원색을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딜 갔단 말인가. 나추와 원색은 공개적으로 남주부성에서 싸움을 벌였다. 너무 큰 소란이었다. 당연히 비밀로 할 수 없었다.
곧바로 수행계에도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인간계 백성들 밀집 구역에서 그리 큰 소란을 벌였으니, 분분히 나추와 원색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춘을 비롯해 모두가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할지 막막했지만, 나추는 당연히 원색이 대나성지를 기습해 딸을 납치해갔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당연히 딸을 구하기 위해 원색에게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사성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원색이 나추의 딸을 납치한 이유가 뭐지?
* * *
천도봉 표묘각.
건물 사이로 나와 방으로 들어간 곽공은 서탁에 앉자마자 멈칫했다. 서탁 앞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분명 그의 방이었지만, 그의 물건이 아니었다. 주위를 살핀 곽공은 법력으로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 상자 안에는 반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원색의 것이었다. 곽공은 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반지를 들어 자세히 살펴봐도 틀림없었다.
그러다 곽공은 반지 아래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북산암곡(北山巖谷)으로. 반드시 극비로 신속히 움직여야 함.」
원색의 물건이 아무 이유 없이 그의 몸을 떠날 리 없었다. 곽공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물건을 수습한 후에 신속히 움직였다.
남주에서 그처럼 큰 소동을 벌였건만, 지금까지 원색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춘 쪽도 마찬가지였다. 원색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진짜 이유를 알아볼 차례였다.
막 문을 나서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곽공은 마침 걸어오던 악광명과 마주쳤다. 악광명의 손엔 잘 접힌 보고서가 들려있었다.
“선생님.”
곽공은 바로 그의 말을 막았다.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하자.”
악광명은 다급해보이는 곽공을 보고 즉시 뒤를 따랐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지.”
악광명도 더 이상은 뒤따를 수 없었다.
이후 날짐승을 꺼내 온 곽공은 그 누구도 데려가지 가지 않고 홀로 움직였다. 서신엔 극비가 강조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북산암곡은 표묘각 총단 북쪽에 위치한, 풀 한 포기 자리지 않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협곡이었다.
곽공은 잠시 공중을 맴돌며 살펴보곤 협곡 안쪽으로 날짐승을 몰았다. 그런데 날짐승에서 내려 직접 주위를 둘러봐도 누구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창 답답해하고 있을 무렵, 협곡 안에서 누가 쏘아져 나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곽공은 허둥지둥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두 사람이 교차했다. 두 사람의 실력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차이가 났고, 곽공은 단번에 상대에게 제압당했다.
능력으로 치자면 곽공은 그가 사부 원색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몸을 보면 어찌 봐도 원색은 아니었다.
곽공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제갈지였다.
가면을 쓴 그는 곽공을 짊어진 채 그대로 뒤돌아 산을 타고 오르더니, 부근에 있는 암벽 속 동굴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