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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782화 (881/1,000)

1782화. 물러날 길을 빼앗아 갔소!

곧이어 주전자를 내려놓은 우유도 역시 공손포를 지그시 응시했다.

“공손 장문인, 그대에게 크게 실망했소. 이 차를 마시면, 당신과의 모든 은원은 사라지는 것이오.”

자신 쪽으로 내밀어진 찻잔을 보고, 공손포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물었다.

“도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백리갈은 표묘각 사람이오. 당시 백리갈이 당신을 찾아왔을 때부터 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소.”

순간 뭔가가 심장을 뚫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공손포는 한참을 그렇게 딱딱히 굳어 있다가 결국 씁쓸한 낯으로 물었다.

“그럼 어째서 지금까지 절 살려두신 겁니까?”

우유도는 손짓으로 공손포에게 차를 들길 권했다.

“난 줄곧 이 모든 게 당신 잘못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소. 만약 당신이 초려산장 정보 중추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표묘각도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겠지.

‘공손일(公孫一)’이 죽으면, ‘공손이(公孫二)’가 또 생기는 건 당연한 이치이니, 통제가 가능한 상황에서 표묘각과 반목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소. 또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고.

난 이해가 되지 않소. 홍랑의 말은 너무도 명확했소. 이미 당신에게 대놓고 자금동이 당신을 알고 있다고 말해줬지. 자금동 영역에서 당신은 어찌 자금동이 앞으로도 당신이란 내통자를 계속 숨겨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오?

홍랑은 이미 당신을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했소. 심지어 내 얼굴을 보여주기까지 했지만, 당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속 둘러대기만 했소.

이제 난 어찌해야 하오?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됐고, 마음속 응어리는 쉽게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설혹 지금 모든 걸 말한다 한들 내가 앞으로 당신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난 일전에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소. 누군가 초려산장을 배신한 사람은 있어도, 감히 나를 배신한 사람은 아직 없다고. 왜냐하면, 배신은 곧 죽음이니까. 사람이란 자신만의 법도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 당신은 지금 내게 물러날 길을 빼앗아 갔소!”

“저를 죽이려는 겁니까?”

우유도가 담담히 말했다.

“이미 내 얼굴을 봤소. 당연히 표묘각에 사실이 흘러가는 걸 막아야지.”

공손포의 어조가 한층 강렬해졌다.

“지금 밖은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이런 시기에 제가 갑자기 죽는다면, 표묘각은 분명 누군가 표묘각 이목을 죽였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 당당했군. 표묘각 일은 걱정할 필요 없소. 당신은 내가 첫째로 죽인 표묘각 사람도 아니오. 감히 실행에 옮긴다는 건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기 때문 아니겠소?”

공손포는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저는 오량산의 장문인입니다!”

그러나 우유도가 그저 담담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것도 걱정할 것 없소. 당신에게 오량산 고위층을 불러 대화를 나눠 보게 하지 않았소? 고위층에 내통자가 있다는 건 그들 모두가 알게 됐소. 당신이 이미 나를 위해 판을 깔아 줬으니, 난 그걸 잘 이용할 것이오. 오량산 권력은 어떠한 잡음도 없이 인계될 것이오. 자, 차를 마십시다!”

속았다! 공손포가 내내 자신했던 안전감은 한순간 철저하게 무너졌다.

공손포는 갑자기 일어나 뒤로 몸을 날렸으나 밀실 입구에 누군가 홀연히 나타나 그를 막아섰다. 운희의 등장이었다.

운희와 손속을 겨룬 그 순간, 공손포는 대경실색했다. 자신과 상대의 경지가 이토록 분명한 차이를 보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공손포는 그야말로 아직 무슨 일인지 미처 파악도 못 한 채 운희에게 제압당했다. 어느 순간 눈 떠보니 다시 밀실로 끌려온 상태였다. 눈앞은 어지럽고, 법력에 금제까지 가해져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앉으시오.”

우유도가 턱짓으로 말했다.

공손포는 안달이 났다. 설혹 자신이 이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도망치며 소란을 일으키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 협상의 여지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의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그때, 입구에 원강이 나타났다. 그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밀실로 들어온 원강은 한쪽에서 싸늘한 눈으로 공손포를 노려보았다.

공손포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운희가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공손포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고, 우유도의 턱짓에 원강이 지필묵을 가지고 왔다.

“오량산에 서신을 남겼으면 좋겠소. 당신이 사라지는 이유를 잘 적는다면, 깔끔하게 보내주겠소. 나도 일이 좀 수월해질 것이고, 그대도 추하지 않게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겠지.”

공손포는 우유도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자신이 밀정이라는 서신을 적게 해, 오량산의 권력 인계를 좀 더 순조로이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한낱 벌레도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 않던가. 공손포는 쉽게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도야, 제가 초려산장을 위해 수년간 충성을 다한 부분을 생각해주십시오! 제발 살길을 열어 주십시오!”

하지만 우유도는 어떠한 여지도 없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놓친 건 이미 놓친 것이지. 쓰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게. 다만 그대도 일문의 지존이니, 마지막을 너무 추하게 장식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군.”

말을 마친 우유도는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이젠 공손포를 향한 시선도 거둬버렸다. 그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담담해 보였다.

차를 모두 마신 우유도가 찻잔을 내려놓자, 원강이 공손포의 어깨를 짚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끌고 가려는 태세였다.

“잠깐!!!”

다급히 손을 든 공손포가 결국 씁쓸한 얼굴로 어렵게 입을 뗐다.

“쓰겠습니다.”

원강이 조용히 물러나고, 공손포는 천천히 붓을 들었다. 느리게 먹을 묻히며 고민하던 그는 짧은 글을 써 내려간 후, 다시 붓을 내려놓았다.

관방의는 양손으로 종이를 받쳐 들곤 우유도에게 보여주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자신이 표묘각 밀정임을 인정하며, 오량산 사람들에게 죄를 빌고 참회하며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우유도는 그제야 맞은편의 공손포와 눈을 맞추며 간단히 턱짓했다.

“마십시다!”

관방의는 유서를 잘 접어 품에 넣고는 한쪽으로 물러났다.

공손포는 눈앞에 있는 찻잔을 빤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그러쥐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찻잔의 찻잎까지 단번에 털어넣었다.

찻잔을 다시 내려놓은 그가 우유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야, 도야께서는 이미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우두둑-

공손포의 머리가 그대로 등 쪽까지 돌아갔다. 부릅뜬 그의 눈엔 더 이상 우유도가 담기지 않았다. 입가론 핏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쪽에 있던 원강이 빠르게 움직여 공손포의 머리를 꺾어버린 것이었다.

공손포는 죽기 전 마음속 의문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원강은 그의 마지막 기회도 꺾어버렸다. 원강이 세상에 가장 혐오하는 건, 바로 배신자였다.

털썩-

쓰러진 몸은 아직도 경련이 일었으나, 운희는 그대로 공손포를 끌고 나가선 땅에 묻어버렸다.

우유도는 여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천천히 차를 따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홍랑, 가서 처리해.”

관방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그곳을 벗어났다.

결국 한 주전자를 다 비운 우유도는 매우 쓸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도 제 곁의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각자의 생각이 있기에 딴마음을 품은 사람을 근절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가끔은 이런 일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었다.

* * *

공손포가 사라졌다. 그래도 오량산은 원활히 움직여야 했다. 오랫동안 경영한 정보망을 이렇게 포기할 수 없었다.

또한 표묘각 밀정 공손포의 죽음에, 여무쌍은 곽공한테 일전에 밝히지 않은 범위에 있던 다른 지역 밀정을 처리하라 전했다. 한마디로 그들의 신분을 모두 밝히게 한 것이었다. 결말은 당연히 도망 혹은 죽음뿐이었다.

만약 공손포 혼자 문제가 생긴다면, 당연히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관해 어찌 움직여야 하는지는 앞서 우유도가 당부한 것이 있기에, 관방의는 이제 사전에 들은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안다면 더 이상 어려운 일도, 큰일도 아니었다. 큰일을 처리하기엔 자신감이 없을 수 있지만, 관방의에게 이는 조금도 어려울 게 없었다. 제경 홍랑의 명성은 한순간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관방의는 오량산 고위층을 불러 공손포가 이 서신을 남긴 후 도망쳤다고 전했다. 오량산 고위층은 서신을 확인하고 말문이 막혔다.

어제 자신들을 불러 대화했던 사람이 표묘각 밀정이었다. 그 표묘각이 숨긴 이목이 바로 자신들의 장문인이었다. 자금동이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장문인은 결국 신분이 들킬 것을 직감해 도망친 것이었다.

장문인이 사라졌어도 오량산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오량산은 그들의 기반이었다.

관방의는 각 고위층에게 권한을 나눠주었다. 각 장로는 각자 권한을 할당받고 새 장문인을 세우는 일을 미뤄두었다. 장문인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장문인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긴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우유도의 뜻이었다. 일단은 뒤로 미루고 시간이 길어지면, 관방의가 나눠준 이익에 등 떠밀려 장로들은 자신들이 쥔 권한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터였다. 그때가 되면 상황은 그대로 굳어질 게 분명했다.

우유도는 오량산이 한 사람의 명령으로 손쉽게 초려산장을 벗어날 수 있는 문파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 때문에 이번 기회에 오량산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려 했다. 이 모든 걸 통제하는 사내는 곁에 심복을 통제하는 것과 방대한 조직을 통제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순간부터 오량산은 다시 태어났다. 겉보기엔 하나의 문파였지만, 서서히 문파라는 성질을 잃고, 진정한 정보 조직으로 거듭났다. 이후로 오량산은 더는 장문인 없이, 문파의 각 파벌은 각자 초려산장을 따르기 시작했다.

오량산은 그렇게 초려산장이 거느린 여러 정보 조직 중 하나가 되었다.

* * *

화산(火山).

이름 모를 어딘가의 이 화산은 기운종이 무기를 제련하는 곳이었다.

갈색 산 표면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고, 화산 주위론 수려하게 솟은 산봉우리가 있었다. 그 울창한 산 위에, 수많은 누각이 끝없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이 바로 기운종 종문이 자리한 곳이었다.

현재 종문 의사대전엔 태숙비화가 한참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가 끝난 뒤, 태숙비화가 몹시 놀란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또 표묘각 밀정이 발견되다니? 정말 한도 끝도 없단 말인가?”

보고한 제자가 대답했다.

“누가 보내온 정보인지는 모릅니다. 그 문파에서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그 밀정은 이미 도망쳤다고 합니다. 지금 표묘각은 우리 기운종이 밀정의 신분을 누설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헛소리! 곽공이 우리 쪽에 전해준 명단을 이미 표묘각에 올려보내지 않았더냐? 명단에 없는 사람 일인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그는 마침 종문에서 표묘각이 사람을 보내 이번 일을 추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진국 황궁에서 종문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들어왔다.

“여러분! 먼저 이 사람의 말을 들어 보시오.”

대전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돌린 곳에, 문밖의 제자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숫자는 어언 10여 명이었다. 그들은 선두에 있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표묘각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 밀고 들어오는 사람은 태숙비화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천마성지의 장로, 흑석이었다.

그 뒤엔 검은 피풍의로 온몸을 가린 큰 체구의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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