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화. 친림(親臨)
흑석의 출현에 매우 놀란 태숙비화는 다급히 손을 휘둘러 문밖에 있는 제자들을 물리고는 빠르게 다가가 포권을 했다.
“태숙비화, 흑석 장로님을 뵙습니다.”
안으로 밀고 들어온 일행도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이내 흑석이 입을 열었다.
“태숙 장문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우리가 왜 왔는지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또다시 표묘각 감찰 인원이 폭로됐소. 내 알기로, 감찰 인원 명단은 기운종만 알고 있소. 이에 관해 합당한 변명이 필요하지 않겠소?”
흑석이 직접 와서 문제를 추궁하다니, 태숙비화는 크게 긴장했다.
“장로님, 그 일을 자세히 조사해봤습니다. 곽공이 보내온 명단엔 장로님이 말씀하신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운종은 여태 그 감찰 인원의 신분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말이라면 누가 못할까. 그 일은 우리가 알아서 조사할 것이오. 오늘부터 우리 표묘각은 정식으로 기운종에 입주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일 것이오. 기운종은 분명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믿소.”
입주? 집안에 이들이 있으면 맘 편히 지낼 수 있겠는가?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 무슨 일이 있을 줄 누가 알겠는가. 태숙비화는 더욱 다급해졌다.
“장로님, 이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은 기운종과 절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대의 말은 표묘각의 입주를 거절한단 말인가?”
이는 한쪽에 있던 검은 피풍의 사내의 목소리였다. 음성은 매우 냉담하고, 마치 저 높은 곳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는 이처럼 아주 웅혼했다.
흑석은 즉시 뒤돌아 그 사내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태숙비화는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누가 흑석에게 저런 대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내의 신분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떨리는 일이었지만, 차마 직접 확인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사내가 머리에 쓴 피풍의를 뒤로 넘겼다. 늘어뜨린 장발 아래, 사람을 압도하는 두 호목(號目)이 태숙비화를 싸늘히 보고 있었다.
피풍의로 가려진 사내는 바로 오상이었다.
그때, 흑석이 재빨리 옆에서 당부했다.
“천마성존께서 친림하셨소! 빨리 예를 갖추지 않고 뭐하시오?”
태숙비화는 직접 본 적이 없어 오상이 맞는지 의심하던 차에 흑석의 주의를 받았다. 겨우 이 사소한 일에 오상이 직접 방문했다고? 또한번 소스라치게 놀란 태숙비화가 황공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절을 했다.
오상이 직접 나섰으니, 태숙비화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운종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승낙 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사실 오상이 직접 오지 않았어도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겠지만, 오상이 이처럼 직접 온 바람에 기운종은 변명을 할 기회조차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기운종에 입주한 표묘각 사람들 규모는 태숙비화의 예상을 크게 넘어섰다. 근 1천은 넘어 보이는 표묘각 인원이 기운종에 들어와 기운종의 각처에 입주했다.
그들을 더 두렵게 한 건 오상이 직접 기운종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오상의 심복 흑석은 거의 온종일 태숙비화 곁을 떠나지 않고, 그와 같이 기운종의 크고 작은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 * *
만수문, 종문 의사대전.
나추는 뒷짐을 지고 오연하게 서 있고, 그 아래 장문인 서해당과 장문인 한 무리가 전전긍긍하며 연신 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곳에도 대량의 표묘각 인원이 만수문 입주를 시작했다.
* * *
영종이 단약을 만드는 정산(鼎山)에도 처자호(天字號) 대단로(大丹爐) 앞에 남도림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냉담한 얼굴로 단로 아래에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그의 뒤로, 영종의 장문인 안돈천과 일단의 사람들이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 * *
남주부성 바깥, 산 정상.
우유도는 태양을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천행종 전 장문인 문화가 변장한 채 찾아와 독무허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천행종을 찾아온 일을 알려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문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우리 천행종이 밀정 명단을 노출 시켰다고 의심한다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명단 일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네.”
줄곧 조용히 듣고 있던 우유도가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요. 이번에 밀정 신분을 폭로한 건 접니다.”
우유도 역시 공손포 일을 숨기려 한 것을 빌미로 오성이 몇몇 대 문파를 파고들 거라곤 예상치 못했었다.
이내 문화가 화들짝 놀랐다.
“자네가 한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설마 오성이 뭔가 발견했나?”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뭔가 발견했다면, 망설이지 않고 이미 당신들에게 손을 썼겠지요. 이건 구실에 불과합니다. 이 일이 아니었어도 분명 다른 변명거리를 만들었겠지요. 다만 이번에 마침 이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설마 일이 그리 공교로울 수 있나? 오성이 어째서 직접 우리 천행종에 입주했단 말인가! 또 서해당의 만수문과 안돈천의 영종은?”
문화는 누가 봐도 조마조마한 얼굴이었다.
“문 선배님, 너무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 자금동의 궁임책은 아무 일 없지 않습니까. 또 기운종이 있습니다. 오상이 입주한 기운종 말입니다. 감히 장담하건대, 기운종은 무량과와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또 그 설파파는 제게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이미 성경으로 돌아갔습니다. 오성은 지금 손을 잡고 각자 맡은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겁니다. 분명 무슨 의도가 있겠지요.”
문화가 반문했다.
“어찌 긴장을 안 하겠나? 난 독무허의 코앞에 있네. 서해당은 나추의 코앞에, 안돈천도 남도림의 코앞에 있지. 자칫 잘못하면 들킬 수 있잖는가!
내가 오늘 시간을 내서 찾아올 수 있었던 건, 내가 더는 장문인이 아니라 주요 감시 대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네. 지금 내 사위 두운상은 그야말로 독무허의 사람에게 온종일 감시받고 있어! 서해당과 안돈천의 상황도 비슷하겠지. 그 두 사람은 아마 자네를 만나러 오기도 쉽지 않을 것이야.”
우유도도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오성이 코앞에 있었다. 어찌 걱정이 안 될 수 있을까. 문화는 말할 것도 없이, 우유도조차 긴장하고 있었다. 만약 저들이 들킨다면, 죽어도 우유도를 토설하지 않고 입을 다물 수 있을까.
물론 무량과를 나눠준 몇몇 문파들에 신경을 완전히 끄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저들의 신분이 들통났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일망타진 되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우유도는 무량과를 얻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미 각 문파에 사람을 심어뒀다. 원활한 소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처리한 일이지만, 사실 문제가 생길 시 그들은 이쪽에 바로 급히 연락을 취할 터였다.
저들이 알아서 자신이 무량과를 얻었다는 사실을 폭로할 리도 없고, 지금 상황을 보면, 만약 오성의 수하들이 뭔가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해도, 저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성이 직접 손을 써 검사에 나선다 한들 저들이 그냥 고분고분 검사를 받을 리 있을까? 분명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칠 터였다. 원영기였다. 그 실력이 아무리 못났다 한들, 일단 행동하면 소란이 작진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우유도가 심어 둔 이는 분명 늦지 않게 소란을 듣고 경고를 보내올 테고, 우유도는 소식을 들으면 즉시 이동할 계획이었다. 오성이 이곳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었다.
다만 정말 떠나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 결과는 아주 심각할 것이고, 남주 쪽은 분명 큰 손실을 볼 것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무량과수에서 일찍이 피어난 꽃은 우유도의 계획을 철저히 망쳐버렸다. 오성이 갑자기 저들 문파에 입주하다니. 이건 우유도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일이었다. 오성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 * *
문화를 다독이고 돌려보낸 후, 우유도는 즉시 남주부성으로 돌아와 밀실로 여무쌍을 불렀다. 그리고 문화에게 들은 일을 똑같이 들려주었다.
문화는 비교적 자세한 상황을 제공했다. 서해당 등이 긴장하며 몰래몰래 전해온 소식보다 훨씬 상세한 정보였다.
우유도가 여무쌍에게 이를 알린 건 그녀가 오성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니, 이 자세한 사정을 듣고 뭔가를 알아낼 수 있길 바랐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아 한참을 사색에 잠겼지만, 결국 결론은 전의 분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운종은 병기를 제련하고, 영종은 단약을, 천행종은 부적을, 만수문은 날짐승을 길들이지요. 이들 네 문파는 수행계에서 독보적인 비결을 가지고 있어요. 아무리 봐도 그것 때문에 네 문파를 통제하려는 것 같아요.”
“설마 각 대 문파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해서 수행자들에게 무기, 영단, 부적, 영수(靈獸) 공급을 막으려 한다는 겁니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무기라는 게 통제할 수 있는 겁니까? 천하 수행자들 사이에 유통되는 무기가 적지 않습니다. 그걸 기운종을 통제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무기는 오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운종의 재력이 다른 문파에 비해 부족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닙니까.
영단은 어떻습니까? 수행자들은 영단을 쓰지 않으면 죽는 게 아닙니다. 그래봤자 수행 진도만 크게 깎일 뿐이지요. 저들도 배후에 누군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만약 정말 강제로 통제하려는 것이라면, 우리가 천하 수행자들을 선동할 기회를 주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진짜 그런 의도라면, 오성은 원래부터 통제하고 있던 천도비경에서 수집한 영종(靈種)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부적도 마찬가지지요. 부적을 통제해 봤자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영수의 매매를 통제하는 것은요? 날짐승을 이미 모두 압류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다른 동물을 통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오성의 지금 행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닌 것 같군요. 배후에 분명 다른 목적이 숨겨져 있는 듯합니다. 설마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해서, 대부분의 문파를 통제할 수 없으니 특징 있는 몇몇 문파만 통제한 것일까요?”
우유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내 여무쌍이 반문했다.
“저들이 그렇게 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우유도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오성의 행동이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우유도는 결정을 내렸다.
“저들의 목적이 뭐든, 일단 뭔가 저들의 허실을 알아낼 수 있는지 한번 떠보고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 *
이후 천하 각 문파에 여무쌍과 원색의 이름으로 전해진 전서가 도착했다.
전서엔 오성이 기운종, 영종, 천행종, 만수문을 통제하고 있으며, 천하 수행자들에게 영단과 같은 물건들의 공급을 단절해 수행자들의 힘을 약화하고, 추후 순차적으로 천하 수행자들을 참살해 오성이 좀 더 쉽게 천하를 통치하려 한다고 적혀 있었다.
덧붙여 여무쌍과 원색은 오성의 이런 행동에 염증을 느껴 공개적으로 갈라선 것이라며, 천하 수행자들에게 단결해 각종 방법으로 오성의 이빨과 발톱을 잘라 암살과 습격으로 표묘각 인원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호소했다.
또한 오성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 그들 둘이 손을 잡고 홀로 떨어진 오성을 하나씩 죽여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전서가 전해진 이후, 온 수행계가 뒤흔들렸다. 다시금 소란이 시작되고, 너도나도 의견이 분분했다.
상황이 급변했다. 천하 각지에 분포된 표묘각 이목이 사라졌다. 천하 수행자들은 이미 공개적으로 칠성 사이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칠성 사이의 다툼이라느니, 음모론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그럴싸하게 들려왔다. 더 악독한 건, 우유도는 자신이 장악한 일부 비밀을 퍼트려 상대방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전에 각 문파가 표묘각 인원을 붙잡아 알아낸 비밀이었다. 전부가 아닌 일부만 퍼뜨린 건,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남겨둔 것이었다.
이 비밀들은 모두 표묘각 일부 사람들의 떳떳지 못한 비밀이었다. 그 때문에 표묘각 내부에 적지 않은 소란이 일었고, 인심도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처참하게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과 함께 표묘각이 이미 그 대단한 추포 능력을 상실한 것을 보고, 표묘각을 배신하고 도망치기까지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전에 표묘각 인원을 사로잡는 일에 참여했던 문파의 인심도 흉흉해졌다. 우유도가 비밀을 퍼트릴 당시, 겸사겸사 그 일도 같이 폭로한 결과였다.
더 인정머리 없는 것은 어느 문파가 그 일을 했는지 정확히 밝히지 않아 관련 문파는 다들 전전긍긍했고, 혹시라도 오성과 표묘각이 자신들을 찾아와 복수할까 공포에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