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5화. 빙설각 방문
이른 아침, 끝없이 펼쳐진 설역(雪域)의 하늘.
날짐승을 타고 있던 제갈지가 비행고도를 낮췄고, 옆에 있던 우유도와 운희는 한 설산의 꼭대기를 향해 훌쩍 뛰어내렸다.
날짐승은 그대로 허공을 한번 맴돌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우유도와 운희는 빙설각이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세 사람은 당연히 진짜 얼굴이 아니었다. 날짐승은 곽공 일행이 표묘각에서 도망칠 당시 적지 않게 챙겨서, 여무쌍이 그중 일부를 받아왔었다.
지금 우유도는 그의 거처나, 그와 관련된 곳 부근을 제외한 곳에선 자유로이 날짐승을 탔다. 표묘각의 금지령 같은 건,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 * *
설역 한가운데, 지열 가득한 협곡.
여전히 수행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에 다시 방문한 우유도는 길게 늘어선 점포들을 구경하며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감개무량했다.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었다.
* * *
두 사람의 목적은 채홍객잔이었다.
운희가 나서서 제일 좋아하는 방향 쪽으로 방을 잡았다.
계산대 뒤에는 여전히 초안루가 있었다. 긴 시간이 흘렀어도, 그는 여전히 채홍객잔의 지배인이었다.
초안루 역시 손님으로 온 우유도 일행을 보고 있었다. 우유도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곧 그곳을 지나쳤다.
* * *
객실에 들어선 후, 운희는 객실을 샅샅이 살펴보고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객잔 뒤편의 빙설각을 잠시 살피더니, 다시 객실에 있던 찻주전자를 창틀에 올려두고 창문 옆에서 바깥을 관찰했다.
그리고 우유도는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오후 무렵, 운희가 갑자기 뒤를 돌았다.
“왔어.”
우유도도 눈을 뜨고 법력을 수습한 후, 침상에서 내려왔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펴보니, 설수호(雪水湖) 주변에 여인 둘, 사내 하나가 아이를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 멀지 않은 곳에는 호위들 몇 명이 수시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사내는 천영, 두 여인은 설락아와 사환려였다. 사환려는 아이를 안고 놀아주고, 부부는 그 모습을 보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아이를 보는 천영의 눈빛엔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그 모습에 우유도도 입가에 연한 미소를 그렸다.
또한 사환려가 가끔 찻주전자가 있는 창문을 힐끔 바라보는 것도 보았다.
우유도는 팔짱을 끼고 뒤돌아, 창문 옆의 벽에 기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사환려와 설락아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혹시라도 사여래가 설락아를 해칠까 봐 두려워하는 게 보여요. 사여래가 이번 일을 위해 애를 참 많이 썼다더군요. 사환려에게 몇 번이나 장담하고 나서야 겨우 설득할 수 있었답니다.”
“만약 그 신분과 배경이 없었다면, 그녀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어. 이런 일에 말려들었는데 당연히 두렵지 않겠어?”
이내 우유도의 신호에, 운희가 주전자를 들어 올리고 창문을 닫았다.
* * *
며칠 뒤, 빙설각에 머물던 사환려가 적성성으로 돌아가고, 사환려의 초대로 설락아 모녀가 그녀와 동행했다.
본래 같이 가기로 했던 천영은 서신 한 통을 받고서, 뭔가 변명거리를 만들어 동행하지 않았다.
설락아 모녀와 사환려가 함께 날짐승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 후, 천영은 조용히 빙설각을 벗어나 끝없이 펼쳐진 설산 깊은 곳으로 향했다.
* * *
천영은 변장한 모습으로 조용히 한 빙설 협곡에 들어섰다. 그곳이 바로 서신에 적혀 있던 약속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엔 너무도 낯선 두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영은 오해했다는 듯 바로 뒤돌아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 순간, 우유도가 소리쳤다.
“천영!”
천영은 멈칫했지만, 그래도 빠르게 멀어져갔다.
우유도 곁에 있던 운희가 즉시 움직였다.
퍽- 퍽-
운희는 정말 찰나도 되지 않아 천영을 따라잡았다. 천영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운희에게 밟혀 움직일 수도 없는 신세가 됐다.
운희는 허리를 굽혀 천영이 쓴 가면을 벗겨냈다.
곧이어 우유도가 날아와 그 옆에 내려서더니, 천천히 웃으며 다가갔다.
“뭘 그리 도망치는 거야?”
천영은 이를 악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우유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상의 이름으로 너를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이니, 당연히 너와 오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지.”
순간 천영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대체 누구냐, 너희들!”
우유도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여긴 대화하기 좋은 곳이 아니니, 일단 자리를 옮겨 천천히 얘기하자고.”
우유도는 그대로 몸을 날렸고, 운희도 천영을 붙들고 같이 몸을 날렸다.
* * *
딱히 갈 곳은 없었다. 그저 빙설각에서 더 멀어졌을 뿐이었다. 또 혹시 천영이 누군가에게 미행을 당했을지 우려도 됐기에, 일행은 눈보라에 뒤덮인 한 협곡을 찾아, 그 안의 동굴로 들어섰다.
밖에는 협곡을 지나는 눈보라의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는 도대체 누구지?”
법력에 금제를 받은 천영이 다시금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를 보고 있으려니 운희도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천영은 확실히 뛰어난 미남이었다. 세상 풍파를 이토록 많이 겪기 전의 그녀였다면 이 사내의 매력을 거부하는 건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았다.
이내 우유도는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누군지가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네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거지.”
천영은 굳은 목소리로 외쳤다.
“난 아무 비밀도 없다!”
“그럼 설파파도 네가 오상의 사람이라는 걸 안다는 말인가? 설파파가 사실을 알게 되면 네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 잘 알겠지.”
만약 사실이 밝혀진다면, 천영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천영의 안색이 급변했지만, 그런데도 눈 딱 감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 네가 누군지 상관없다. 그래봤자 죽기밖에 더 할까. 나를 협박할 생각하지 마라!”
“호오, 네가 잊었을까 하나 알려주고 싶은 게 있는데. 딸이 하나 있지? 그럼 한번 맞춰볼래? 설파파는 과연 널 죽인 후에 무슨 짓을 할까?
설파파가 정말 네 딸이 자라 복수하는 걸 그냥 두고 볼까? 난 너보다 그 할멈을 더 잘 알지. 그녀는 설락아의 남편을 죽이고, 원한을 품은 설락아를 절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설마 너만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한 거냐? 너, 설락아, 그리고 네 딸까지. 단 한 명도 살아남는 이는 없을 것이다.”
천영의 안색이 급변했다. 얼굴에 격렬한 경련까지 일었다. 천하에 제일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이 격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우유도는 계속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 왔으니, 너한테 이제 거절할 자격 같은 건 없다. 거절한다면 설락아와 네 딸은 설파파가 처리하길 기다릴 것도 없을 거야. 설락아 모녀가 마침 막 빙설각을 떠났더군. 적성성으로 간다지? 과연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우리 쪽 사람의 실력을 너도 막 봤을 텐데.”
무슨 뜻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영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개자식!”
천영이 비명을 지르며 우유도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었지만, 우유도는 그저 담담히 제자리를 지켰다.
쾅!!!
순간 우유도의 몸에서 호체강기가 뿜어져 나왔고, 천영은 그대로 튕겨 나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이내 우유도는 살짝 고개를 틀어 운희에게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협조하지 않겠다니 별수 없지, 당장 소식을 보내. 모녀를 처리하라고.”
운희는 멈칫했다. 사전에 설락아 모녀를 사로잡기 위해 사람을 배치한 적은 없었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설락아 쪽에 직접 연락할 방도도 없었다. 하지만 운희는 빠르게 반응했다.
“알겠습니다.”
운희가 동굴을 벗어나려던 그때였다.
“잠깐!”
크게 당황한 천영이 고함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하겠다! 네놈들에게 협조하겠다!”
우유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전에 객잔에서 관찰한 상황에도 확신이 없었던 그는, 상대가 미처 정신 차리기 전 그의 반응에서 확신을 얻고 싶었다. 과연 천영에게서 아주 만족스러운 답이 나왔다.
우유도의 손짓에 운희도 멈춰 섰다. 운희는 다시 걸어오며 우유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천영이 정말 모녀의 생사를 신경 쓴다면, 사실 그들을 사로잡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설파파가 모녀를 죽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히 천영을 협박할 수 있었다.
운희는 자신도 모르게 우유도를 돌아보았다. 이런 수작질도 막힘이 없는 것을 보면 처음 해보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역시 우유도가 직접 나서겠다고 한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도대체 내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천영이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난 너를 도와주고 있는 거다. 생각해봐. 그 요괴 할멈이 죽으면 너도 할멈이 네 가족을 죽일까 걱정할 필요 없잖아. 아닌가?”
천영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나보고 설파파를 암살하라는 것이냐? 그건 불가능하다! 난 설파파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이야. 만약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도 내 경지와 실력으로 성공할 리가 없어! 독을 사용하는 건 더 불가능하지. 나는 설파파가 먹는 음식에 접근도 할 수 없다.”
“급하니까 터무니없는 생각부터 하는 건가? 암살은 생각도 한 적 없다. 요괴 할멈을 그리 쉽게 처치할 수 있었다면, 네가 손쓸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었겠지. 넌 당분간 나와 같이 움직여야 할 것이다. 한 달이 지나기 전에 다시 돌려보내 주마. 그때가 되면 어찌해야 할지 자연스레 알게 될 거다.”
순간 천영의 눈에 당황의 빛이 어렸다.
“한 달? 내 약효는 앞으로 반달만 있으면 끝난다. 그때 단약을 받으러 가지 않으면 설파파는 말할 것도 없고, 오상에게도 변명할 말이 없을 거야.”
우유도는 살짝 멈칫했다.
“약효? 오상이 독으로 널 통제하고 있는 것인가?”
천영 역시 약간 흠칫한 기색이었다.
“몰랐어?”
분명 상대는 자신과 오상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도 비밀을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상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내 우유도는 천영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독은 걱정할 것 없다. 사람을 불러 해독해 줄 테니 안심하고 나와 가자.”
이건 허풍이 아니었다. 귀의의 능력이 어떠한지 우유도가 직접 겪었다. 그야말로 해독의 명인이었다. 어쩌면 귀의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을지 몰랐다.
하지만 천영은 더 단호하게 거절하며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필요 없다, 필요 없어.”
우유도는 자신도 모르게 운희를 돌아보았다. 해독할 기회가 있는데도 거절하다니? 우유도는 다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독에 중독된 거지?”
천영은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아 다른 곳으로 주제를 돌렸다.
“내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분명 설파파의 의심을 살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게 무슨 일을 시킨다고 해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울 거야.”
그러나 천영은 우유도에게 진짜 필요한 결과가 바로 그것임을 알지 못했다. 우유도는 설파파가 천영을 데려가길 바라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이런 식으로 움직일 이유도 없었다.
우유도는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누구인가. 상대가 답을 회피할수록 문제가 있음을 더 명확히 알아챘다. 그는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대답해, 무슨 독이지?”
“사실 독이랄 것도 없다. 별다른 독성도 없으니, 해독할 필요 없다.”
천영이 늘어놓은 옹색한 변명에, 우유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내 말대로 하면 되겠군. 데려가.”
운희는 우유도의 신호를 읽고 즉시 다가와 천영을 붙잡았다.
“안돼!”
천영은 공포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치다 결국 동굴 벽까지 밀려났다. 더는 도망칠 곳도 없는 그에게 남은 건 애걸복걸하는 길밖에 없었다.
“조금만 시간을 줄 수 없나? 오상이 약을 보내오면, 반드시 당신을 위해 전력으로 일을 처리하겠다. 그러면 안 될까?”
법력이 없으니 어디로 피할 수 있을까. 사실 법력이 있다 해도 운희의 적수는 될 수 없었다. 운희는 이미 천영을 붙잡고 동굴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천영은 이제 거의 절망에 찬 목소리로 절규하듯 비명을 질렀다.
“주안단, 주안단이다!”
“잠깐!”
우유도가 운희에게 천영을 풀어주라 소리치곤, 천영에게 다가갔다. 한창 그의 턱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우유도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얼굴, 이 얼굴 껍질이 주안단으로 바뀐 것이란 말이냐?”
천영은 참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이 들통난 사내의 얼굴엔 비통함밖에 남지 않았다.
천영은 아름다운 얼굴과 못생긴 얼굴의 차이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비밀을 들켰으니, 지금 그의 심정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할 터였다.
운희는 곁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안단, 그녀는 지금까지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