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화. 주안단(朱颜丹)
그때, 우유도가 천영을 빤히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니까 넌 이 가짜 얼굴로 설락아를 속였구나?”
천영은 우는 듯, 웃는 듯 갈 길을 잃은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락아에게 내 진짜 얼굴을 보일 수 없어!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시키는 일을 다 한다고 해도 그녀가 내 얼굴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난 두 번 다시 그녀도, 아이도 마주할 수 없게 될 거라고!”
결국 운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설락아가 네 외모에만 혹한 것이라면, 그런 여인은 없어도 그만이야.”
천영이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는 없었다. 그에게 속아 넘어간 이가 설락아 한 명이 아니었다. 사실 그가 만난 여인 중 설락아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도 아니었지만, 이제 천영에겐 아이가 생겼고 미래에 마주할 딸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디 타인의 심정을 다 이해할 수 없는 법, 우유도 역시 천영이 지금 미몽에서 깨어나지 않기만 바란다고 생각하며 조언을 건넸다.
“너도 알겠지만, 오상은 네 얼굴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네가 이용 가치를 잃으면 언제든 단약의 공급을 끊을 것이다. 아니, 만약 설락아의 이용 가치가 사라진다면, 이제 네게 두 모녀를 떠나 다른 여인을 유혹하라고 강요하겠지.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넌 지금 목마르다고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있는 거야!”
천영은 다급히 다가가 우유도의 손을 붙잡고 간청했다.
“선생님,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주안단을 얻은 후에 선생님 일을 처리하면 안 되겠습니까?”
우유도는 천영의 가슴을 밀어냈다.
“네게 주안단을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다. 모든 일이 끝나면, 너도 두 모녀를 데리고 떠나도 된다.”
천영은 몹시 놀라고 기뻐했다.
“선생님께 주안단이 충분히 있는 겁니까?”
“우선 돌아가라. 나중에 주안단을 가져와서 너와 교환하도록 하지.”
운희는 우유도의 손짓 하에, 즉시 다가와 천영의 금제를 풀어주었다.
다시 법력을 회복한 천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충분한 주안단이 있습니까?”
사실이라면, 모든 일이 끝나도 더는 오상의 협박에 끌려다닐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지금 수행계 상황을 보면, 오상이 그를 다시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설락아와 딸을 데리고 이름을 바꿔 완전히 숨어 살 수 있었다.
이윽고 우유도는 천영과 더 이상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그와 연락할 방도를 얻고 운희와 함께 그곳을 떠났다.
* * *
눈보라 사이를 가르며 날아가던 도중, 운희가 몹시 궁금한 듯 물었다.
“주안단이 뭐지?”
“마교의 사술이에요. 나름 마교 역대 교주들만 알고 있던 연단비술이라 할 수 있지요. 단약 하나마다 건장한 사내 10여 명의 정혈정화(精血精華)와 영초 일부를 배합해야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주안단은 얼굴을 바꿔주는 단약이에요. 단약을 복용한 이는 법력을 이용해 본인 얼굴을 바꿀 수 있지요. 더 추하게, 더 아름답게도 바꿀 수 있어요. 근데 그 법문이 어쩌다 오상의 손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네요.”
운희는 더 의아했다.
“역대 마교 교주들만 알고 있는 비법을 넌 어찌 알아? 설마 조웅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우유도는 그냥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 마교 교주뿐 아니라, 마전에도 기록돼 있었다. 이향에게 이런 사술이 나온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유도는 오상에게 마전을 주기 전, 내용을 이미 한 부 필사해 놓았었다.
운희는 탄식을 했다.
“난 또 천영이 어찌 저리 아름다운가 했더니, 세상에 그처럼 신기한 단약이 다 있었구나.”
“신기하긴 한데, 단약 한 알에 열 목숨이 필요해요. 무엇보다 그 주안단은 오래 쓸 게 못 됩니다. 단약을 쓸 때마다 강제로 복용자의 본명원기(本命元氣)를 빨아들이지요. 이대로 가면 천영은 언젠가 본인 수명을 다 쓸 겁니다. 결국 어딘가에서 급사하겠지요. 아마 오상이 알려주진 않았을 겁니다.”
운희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럼 열 목숨이 필요한 단약을 대량으로 제련할 거야? 천영을 위해?”
“전 제련 방법을 몰라요. 또 그를 위해 대량으로 제련하지도 않을 거고요.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땐 깨어나야 하는 법이지요.”
* * *
빙설각에 돌아온 천영은 제일 먼저 부인과 딸에게 연락했다. 결국 두 사람은 무사했다. 적성성까지 날아갔어도 그간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우유도는 당연히 사환려가 들통날만한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천영은 그제야 그 신비한 자에게 속았다는 걸 알고, 오상에게 알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여러 고민 끝에 그래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자신이 들통났다는 것을 오상이 알게 되면, 그의 이용 가치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 또한 유쾌한 결말로 끝나진 않을 것이었다.
천영은 고통스러웠다. 일단 잘못된 길로 들면, 그 잘못을 책임질 용기가 없는 자에게 기다리는 건 끝없는 오답뿐이었다. 그는 이제야 이를 깨달았다.
* * *
주안단의 출현으로 우유도는 계획을 수정했다. 문제는 주안단에 대한 천영의 갈망과 천영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여파였다.
그래도 우유도가 직접 움직인 효과가 있었다. 직접 움직인다면 이렇듯 현장에서 유연하게 계획을 수정할 수 있었다.
우유도는 비밀리에 안돈천에게 연락해 주안단의 제련비법을 넘겨주었다. 영종의 연단 능력이면, 분명 다른 사람보다 잘 만들어 낼 터였다.
또 특별히 오상의 비법임을 강조했다. 이 당부를 듣는다면, 안돈천도 어찌 비밀을 지켜야 할지 알고 있을 거라 믿었다. 이런 일은 안돈천이 알아서 처리하면 그만이니, 굳이 함께 의논할 필요는 없었다.
다행인 건, 영종은 제국 경내에 있고, 현재 제국은 전쟁 중이라 사람이 죽는 건 예사였다. 그러니 제국에서 주안단을 10알쯤 만들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사실 더 중요한 건 안돈천의 결정이었다.
우유도는 안돈천에게 딱히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당부는 하지 않았다. 어떤 일들은 따로 당부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려 주안단 10알이었다. 100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안돈천에게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무고한 자를 죽이진 않을 테고, 어찌 처리해야 할진 본인이 제일 잘 알 터였다.
만약 안돈천이 기어이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다 해도, 우유도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우유도 역시 그 과정을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딱히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 * *
상자엔 맑고 투명한 빛의 아름다운 분홍색 단약 10알이 담겨 있었다. 우유도는 잠시 그 단약을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맞은편의 여무쌍은 우유도가 결정을 내렸단 걸 알았다.
“오상을 이용해 요괴 늙은이를 죽이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오상을 제외한 팔성 중 유일하게 혼자 오상의 ‘무변마역’을 뚫어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오상은 그녀를 잡아 둘 능력이 없어요.”
우유도는 탁자 위의 상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화성공법이 그 요괴 할멈의 천적이라니, 우리 쪽 사람과 오상의 협력을 시도해 볼 수 있겠지요.”
“말했다시피, 원색의 일이 반면교사에요. 하마터면 전멸할 뻔했어요. 확신이 없다면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지금 또 모험하려 하는군요. 지금 도야는 당신 사람에게 모험을 강요하고 있어요. 그러다 모든 걸 다 잃어요.”
“나도 위험하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지요. 결과가 어떻든, 조금 희생이 있다고 해도, 결국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 겁니다.”
우유도는 성나찰이 모험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런데도 몇몇 성존을 접몽환계로 끌어들였고, 하마터면 성나찰이 죽을 뻔했었다.
이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주 위험했다. 하지만 그래도 시험해봐야만 했다. 이미 오성과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오성과 부딪혀 보지 않으면 애초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마지막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누군가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안전하게 오성을 무너뜨린다는 건 근본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유도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보고, 여무쌍도 그냥 화제를 돌렸다.
“홍랑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네요.”
“지금 홍랑은 폐관하고 원영기를 돌파하고 있습니다.”
우유도는 여무쌍에게 진실을 숨기지 않았다.
여무쌍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구성이 오랫동안 지켜온 물건이 우유도에게 이익이 될 줄이야. 각 문파에서 감찰 인원을 차출해 성경으로 불러들인다는 계획은 결국 우유도 같은 대도(大盜)를 불러 들여왔다. 그렇게 성경에 진입한 우유도는 무량원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물건을 훔쳐냈다.
다시 우유도가 입을 열었다. 여무쌍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요마령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풍관아 일은 어찌 처리할 생각입니까?”
여무쌍은 천천히 차를 음미하며 대답했다.
“어떤 일들은 뒤로 미루고 기다리는 게 제일 좋은 처리 방법이지요.”
우유도는 침묵했다.
* * *
한 달이 흐르고, 세 사람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협곡에서 다시 만났다.
천영은 상자에 담긴 주안단 10알을 보고 기쁘기도, 걱정스럽기도 했다.
기쁜 것은 정말 상대가 주안단을 대량으로 가져왔기 때문이고, 걱정은 그런 상대가 시킨 일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이건 그에게 죽으라고 등 떠미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말이 없는 천영을 보고, 우유도가 먼저 운을 뗐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건 그저 네게 보여주기 위해 가져온 것이고, 나중에 일이 끝난 후에 더 주도록 하지.”
천영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저보고 어떻게 설파파를 마주하라는 말입니까?”
“네가 설파파를 찾아가지 않으면, 내가 이번 일을 폭로해 만날 수밖에 없게 만들어줄게. 그럼 결과도 같겠지? 내 말을 잘 따르면 살 가능성이 있다.”
천영은 축 처진 모습으로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
“제게 선택의 여지는 없겠지요.”
“없다. 이런 일로 널 찾아온 이상, 네게 거절할 기회 같은 건 주지 않아. 탓하려면 처음부터 오상에 홀려 이 분쟁에 말려든 너 자신을 탓해야겠지.”
* * *
함음산 지하, 소름 끼치는 대전 내부.
흑석이 들어와 오상에게 두 손으로 밀서를 바쳤다.
“은희가 보내온 서신입니다. 다시금 성존과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오상은 기운종에 자리 잡는다고 통보했지만, 줄곧 거기 있는 건 아니었다. 몰래 기운종을 벗어났고, 그곳에서 처리할 일들은 모두 흑석에게 맡겼다.
곧이어 흑석은 오상 팔의 한 마리 흉악한 용 같은 문신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신을 확인한 오상은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