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7화. 들통난 첩자
빙설성지.
천영 부부가 아이를 안고 빙궁에 도착했다. 아이가 보고 싶다는 설파파의 부름을 받고 온 것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만나자마자 설파파는 유쾌하게 미소 지으며 설락아에게서 아이를 건네받아 다정히 어르고 달래주었다.
부부도 설파파가 아이를 안고 여기저기 서성이는 것에 매우 기뻐했다.
그때, 한쪽에 있던 백무애가 갑자기 천영에게 다가왔다.
“일품당(一品堂)을 아는가?”
설락아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했다.
반면 천영의 눈빛은 누가 봐도 당당하지 못해 보였다. 그는 속에서 쓴웃음이 나왔다. 이곳에 불려온 순간부터 이미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
일품당은 빙설각 쪽에 있는 상점으로, 그와 오상 쪽 사람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는 곳이었다. 천영은 빙설성지의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진 줄곧 조심해왔지만,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내비쳤으니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천영은 겉으로는 담담한 모습을 가장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빙설각에 있는 상점 말씀입니까?”
백무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와 그 상점은 무슨 사이인가?”
천영은 의아한 얼굴로 답했다.
“아무 사이 아닙니다. 그냥 그 상점 지배인과 아는 사이일 뿐입니다.”
백무애는 곧 소매에서 밀서 한 통을 꺼냈다. 동시에 어디론가 손짓하니, 심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사람이 빙궁으로 끌려왔다. 한 마리 개처럼 바닥에 내팽개쳐진 자, 바로 일품당의 지배인이었다.
지배인은 미안한 얼굴로 천영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비밀리에 잡혀온 그는 결국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걸 토해내고 말았다.
천영도 보자마자 그 상점의 지배인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다시 들고 있던 서신을 확인했다. 바로 자신이 건넨 그 서신이었다. 안에는 일부 빙설각과 관련된 상황이 쓰여있었고, 설파파의 동향에 대한 정보까지 적혀 있었다.
속에선 쓴웃음이 흘렀지만, 천영은 겉으로 넋을 잃은 듯 서 있었다.
설파파는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아이를 안고 여기저기를 서성였다. 그저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놀아주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듯 굴었다.
하지만 설락아는 어리석지 않았다. 뭔가를 깨달은 그녀는 남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백무애가 물었다.
“천영, 뭐라도 설명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숙부님, 이런 상황에 더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까?”
“네가 화끈하게 인정하니 나도 좀 편하게 말할 수 있겠구나. 넌 정기적으로 약을 받으러 간다고? 무슨 약이냐? 오상이 네게 독약을 먹인 것이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지배인은 물건을 전해주기만 할 뿐, 그것이 무슨 단약인지는 알지 못했다.
천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것이 무슨 약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약효가 사라지면, 마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너는 명령을 받고 의도적으로 락아에게 접근한 것이렷다?”
천영은 입술을 깨물고 있는 설락아를 보며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락아, 처음에 난 분명 의도적으로 당신에게 접근했소.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정말 내 아내라고 생각하오. 당신과 딸에겐 절대 다른 마음이 없소. 정말 후회하오. 하지만 난 오상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소.”
설락아는 눈물을 흘렸다. 사랑하는 남편이 첩자였다니…….
“어째서 좀 더 일찍 알려주지 않은 건가요?”
“감히 그럴 수가 없었소. 내가 죽는 것도 무서웠지만, 당신과 딸아이를 잃어버리는 것도 두려웠소!”
천영은 참담한 얼굴로 외쳤다. 이 말만은 진심이었다.
그때, 설락아가 소매로 눈물을 닦더니, 설파파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할머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아이와 놀던 설파파는 설락아를 힐끗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아, 만약 내가 저 아이를 죽이면 너는 평생 나를 미워할 것이냐?”
설락아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곤 연신 절을 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할머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이것아, 저 아이를 살려줄지 말지는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저 아이는 다른 사람이 보내온 첩자다. 우리 가족을 해치기 위해 온 사람이란 말이다. 만약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면, 내가 저 아이를 어찌 용서하겠느냐? 내가 쉽게 용서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승복하겠느냐?”
이내 천영도 빠르게 달려와 설락아 옆에 무릎을 꿇었다.
“할머님! 제가 락아에게 접근한 후 할머님과 락아에게 결코 해로운 일은 한 적이 없습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그에 설파파가 유쾌하게 웃었다.
“오상이 너를 보내, 우리 쪽에 불리한 일을 시키지 않았단 말이더냐?”
천영은 다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할머님! 제가 락아에게 접근한 것은 빙설성지 때문이 아니라 우유도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빙설성지와는 무관합니다.”
“우유도?”
아무리 노련한 설파파라 해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백무애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바로 성경에서 암살을 당했던 그 우유도를 말하는 것이냐?”
천영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자입니다.”
설파파는 몹시 의아했다.
“오상이 널더러 락아에게 접근하라 한 것이 우유도 때문이라고? 장난하는 게야? 아니면 내가 노망이 든 게냐. 네 말을 도통 못 알아듣겠구나?”
“할머님, 우유도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유도는 천지문의 영호추와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오상이 제게 락아에게 접근하라 한 것은 우유도가 성경에 들어온 것을 알고, 혹시라도 그가 위험에 처할까 봐 저에게 락아의 신분과 배경을 빌릴 것을 주문한 것입니다. 겉으로 제가 그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던 것이지요. 사실 배후에서는 오상이 그를 보호…….”
천영은 영호추에게 받아온 서신과 우유도와 연락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설파파와 백무애는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이 사건의 배후에 이처럼 곡절이 많을 줄이야. 하지만 설파파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우유도 하나 때문에, 오상이 그처럼 심혈을 기울여 네가 그의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은 무엇 때문이더냐?”
천영이 고개를 저었다.
“구체적인 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우유도가 호족의 누군가와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것 같았습니다.”
설파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호족?”
“네, 오상이 호족의 누군가를 찾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찾는 게 쉽지 않아 제게 우유도에게 접근해 그의 신임을 얻으라 했습니다.”
오상이 찾으려는 사람이 호족의 누구일까. 설파파의 두 눈이 번득였다. 곧바로 한 사람을 떠올린 것이다. 은희!
때론 답을 알려주지 않고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것이 나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천영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우유도가 갑자기 암살당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제 임무는 보류되고 지금껏 할 일 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또 갑자기 제게 연락을 취하더니, 락아에게 할머님 최근 열흘간 동향을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내 동향을 알아서 무엇 하려고?”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가 찾으려는 호족과 연관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 보였다? 어째서?”
설파파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오상은 지금껏 호족 사람을 찾는 일 외에 다른 일로 절 찾아온 적은 없었습니다. 할머님, 전 정말로 성지에 해가 되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제게 죄를 대신해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십시오.”
천영은 말을 다 마친 뒤 정성껏 절을 올렸다.
지금 설파파의 눈은 괴이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눈길은 곧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는 설락아에게 닿았다. 설파파는 일어나 품 안의 아이를 다시 설락아에게 건네며 등 뒤로 손짓을 했다.
“모두 데려가라.”
백무애는 즉각 움직여 천영에게 금제를 가했다. 천영은 감히 반항할 수도, 반항할 틈도 없었다.
“할머님!”
설락아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백무애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에게도 똑같이 금제를 가했다.
그 후, 부부와 아이는 백무애의 명령에 따라, 누군가에게 끌려가 어딘가에 연금되었다. 그래도 일단 당장 손을 쓸 태세는 아니었다.
* * *
설파파는 눈보라 가득한 얼음 절벽 위에서 성지의 수많은 누각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영이 진실을 말하는 것 같으냐?”
백무애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붙잡힌 상황에 살고 싶다면 거짓말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당시 락아도 천영이 영호추의 서신을 우유도에게 전달했다고 얘기한 바 있지요. 천영은 전에 확실히 우유도에게 접근한 혐의가 있고, 우유도에게 과하게 친근히 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의도적인 접근입니다. 그때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이제 그 까닭을 찾은 듯합니다.”
설파파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호족은 의심이 많다. 우유도가 어찌 호족과 연관이 있단 말이냐?”
백무애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진실은 알 수가 없지요.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오상과 호족만이 어찌 된 일인지 알 것입니다.”
설파파가 뒤를 돌았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넌 오상이 호족 누구를 찾는 것 같으냐?”
백무애 역시 똑같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
“설마 은희일까요? 황택사지는 외부인이 살긴 어려운 곳입니다. 저번에 은희가 그곳에서 만나자는 서신을 보냈었지요. 혹시 은희가 줄곧 요호족 무리에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요?”
설파파는 다시 뒤돌아 저 먼 곳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그 여인 외에 오상이 이처럼 심혈을 기울여 찾을 사람은 없겠지. 오상과 그 여인은 보통 사이가 아니다.”
백무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성존의 열흘 동안의 동향을 알아내는 것과 호족 사람을 찾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설파파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빙궁에 거주하며 외출을 거의 하지 않으니, 외부인은 내 동향을 알기 어렵다. 내가 여길 벗어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알기가 어렵지. 그렇게 아무나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오상은 내가 빙궁에 있는지, 없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은 게 분명하다. 만약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 그 여인을 찾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열흘……. 어째서 열흘일까. 설마 열흘 안에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건가? 시간을 설정했다는 건 한가지 이유밖에 없다. 저번에 그 여인이 나와 만나고자 했지만, 내가 나가지 않았다. 이번에 그 여인은 오상에게 연락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두 사람은 만날 시간을 정한 것이다.”
백무애는 자신을 바라보는 설파파와 눈을 맞추며 뭔가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오상은 은희가 성존께도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다고 의심하면서도 확신이 없었기에 성존의 동향을 확인하려 한 것이란 말입니까?”
설파파가 웃었다.
“하하! 열흘에서 이미 며칠이나 지났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상은 요 며칠 사이 그 여인과 만날 것이다. 안전을 위해, 그 여인이 만나자고 한 곳은 십중팔구 황택사지겠지. 일단 문제가 생기면 도망가기 쉽도록.
진실 여부를 알아보면 그만이다. 진실이라면 그 여인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두고 봐야겠지. 또 어떻게 요호족 영지에서 여러 차례나 나를 불러내는 지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무애야, 넌 지금 즉시 성경 출입구로 가 비밀리에 사람을 배치하거라. 일단 오상이 성경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면 즉시 내게 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