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화. 천하풍운
이 시각, 은희도 풀숲에서 고개를 들고 관망 중이었다. 먹구름 안에선 폭음과 번쩍이는 붉은빛이 보였다. 붉은빛은 점점 타오르며 그 영역을 넓히더니, 먹구름 안에서부터 먹구름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은희도 그 순간, 곤림수와 오상이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한창 은희가 긴장하고 있을 무렵, 하늘 위 불바다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가까이 다가왔다. 곤림수였다. 이미 오상의 무변마역에서 몸을 빼낸 것이다.
“가자!”
은희는 크게 기뻐하며 몸을 날려 곤림수의 손을 잡았다. 늪지 속에서 길 안내를 위한 목적도 있고, 같이 힘을 합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순간 두 사람은 늪지를 뚫고 빠져들며, 은희는 곤림수를 데리고 더욱더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하늘을 뒤덮은 불의 파도 안에서 오상이 튀어나왔다. 그는 분노한 얼굴로 두 사람이 사라진 늪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쾅!!!
그때,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부시등의 요사한 촉수가 늪지를 뚫고 튀어나왔다. 곧바로 오상을 덮치려는 행보에, 오상은 피풍의를 잡아 뜯어 크게 휘둘렀다. 꼭 따귀를 때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쾅! 쾅! 쾅!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오상에게 쏘아져 오던 촉수가 사분오열되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동시에 오상은 마치 운석처럼 늪지로 다시 떨어져 내렸다.
쾅!
다시 한 마리 화룡이 늪지를 뚫고 나타나 오상을 향해 쏘아져 왔다.
곧이어 오상의 몸에선 마기로 이루어진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안개는 한순간 거대한 손바닥으로 변해있었다.
마염멸생장, 오상의 공격은 마치 하늘을 뒤덮는 것처럼 아래 쪽으로 휘둘러졌고, 폭음과 동시에 화룡은 사방팔방으로 불꽃을 쏘며 터져나갔다.
오상의 강맹한 공격에 늪지도 사방으로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퍼져나가, 그 위에 거대한 손바닥 자국을 찍어냈다.
그런데 사방으로 터져나간 불꽃이 갑자기 또 수천수만의 화검으로 변하더니 다시 오상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일장에 화룡을 멸한 오상은 그냥 화검을 무시한 채 진흙을 밀어내곤 늪지로 들어가 계속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늪지 속으로 들어가 아예 사방에 꽃을 피운 수많은 화검을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의도 같았다.
곧 늪지 위에 찍힌 거대한 손바닥 자국은 다시 밀려든 진흙에 사라져갔고, 굉음과 함께 지하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선 오상이 다시 늪을 뚫고 튀어나왔다.
오상은 하늘에 서서 싸늘한 눈으로 아래를 노려봤다. 두 사람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드니, 하늘을 호령하던 거대한 기세는 다 사라진 채 먹구름의 잔운(殘雲)만 남아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을 질렀다. 오상은 그 공간을 한순간에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마운(魔雲)을 한순간에 태워버렸다. 무려 그의 무변마역이 한순간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게 무엇을 뜻할까.
무변마역을 깨트릴 수 있는 설파파를 기껏 어렵게 해치웠더니, 무변마역을 깨트릴 수 있는 또 다른 자가 나타났다. 심지어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설파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무변마역을 깨트렸다.
이제 오상에게 은희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상이 둘의 뒤를 쫓았지만, 은희는 황택사지라는 지리적 우위를 이용해 그자와 도망쳤다.
허공에 떠 있는 오상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버렸다. 두 눈은 유독 더 음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구성은 늘 2번째 오상의 출현을 경계해왔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자면 줄곧 걱정하던 그 일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그 신분을 알 수 없는 사람의 경지가 높진 않지만, 법술은 보통이 아니었다. 만약 이대로 시간이 흘러 나머지 성존과 겨룰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기만 하면, 술법이 가진 공격력이 질적으로 높아진다면, 실력으론 어찌하기도 힘든 아주 까다로운 상대가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지금 남아 있는 성존들은 그들 사이에 또 한 사람이 추가되는 걸 막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상도 이제야 깨달았다. 과거 자신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처럼, 2번째 오상이 출현한 것이다. 조금 전 설파파를 죽였다는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졌다. 그의 마음은 급속도로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누님, 호족이 가진 실력을 잘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 어찌 협력할지 한번 이야기해 보지요.”
오상이 법력을 이용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고 연달아 몇 번을 더 외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오상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도망친 이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방금 경솔하게 손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설파파의 추측이 맞았다 할 수 있었다. 그녀를 죽인 오상은 과연 다음으로 곧장 곤림수를 죽이려했다.
그러나 이는 설파파뿐만 아니라, 우유도, 여무쌍, 은희까지도 모두 예측한 일이었다. 이번에 곤림수는 그야말로 큰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무응답이 곧 부재를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미 떠난 이를 두 번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상은 쥐고 있던 피풍의를 던져버렸다. 더는 신분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날아올라 먼 곳으로 사라져갔다.
* * *
빙설성지.
하늘에서 떨어진 불이 주위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수많은 폭음 가운데 빙궁이 무너져 내렸고, 빙설로 뒤덮인 산도 무너져 주변을 다 묻어 버렸다.
설파파의 죽음 이후, 오풍과 곤림수가 빙설성지를 찾아와 그들을 공격했다. 이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과는 자명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빙설성지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진 않았다.
“오풍, 성존께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제압당한 백무애가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이에 오풍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백무애의 금제를 풀어주었다.
“백무애, 우리가 보복을 두려워했다면 여기로 왔을까? 오늘은 널 죽이러 온 게 아니라 네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러 온 것이다. 설파파가 오상의 손에 죽었다. 이제 나머지 사성(四聖)이 너희를 소탕하려 할 거다. 그러니 빨리 도망쳐라. 인간계에 있는 빙설성지 인원들에게도 피신하라 연락하고.”
백무애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헛소리!”
“뭐, 난 이미 알려줬으니, 믿는 건 네 몫이지. 앞으로 닥칠 위험을 어찌 대비해야 할지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할 것도 없이 잘하겠지만 말이야.”
곧이어 오풍이 뒤돌았을 때, 화사한 색으로 얼굴을 가린 곤림수가 누군가를 데려오고 있었다. 이들이 찾으려는 건 연금당한 천영 부부였다.
설락아는 아이를 안은 채, 무너져 내린 빙설성지를 보며 경악했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멈추지 않았다. 소리에 깜짝 놀란 아이는 크게 울었지만, 지금 그 누구도 아이를 달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설락아가 오풍을 발견하고 더욱더 경악했다.
“오풍! 뭘 하려는 거지?”
오풍은 바로 두 사람에게 걸려있는 금제를 풀어주며 경고했다.
“설파파가 죽었다.”
“뭐라고? 헛소리!”
설락아는 믿을 수 없었다. 반면, 천영은 남몰래 두 눈을 번득이며 파괴된 빙설성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지금 이 광경이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그쪽에서 정말 계획에 성공해 설파파를 죽일 줄은 몰랐다. 그 안에 오풍이 끼어있으리란 건 더더욱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그쪽에서 약속을 지켰다는 것이다. 결국 잊지 않고 사람을 보내 천영을 구하러 왔다.
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고분고분 따라야만 살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 천영은 도박을 했다. 이제 보니 자신은 분명 옳은 선택을 한 것 같았다.
이내 오풍이 천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겠지. 선생님께서 당신에게 전하라고 한 말이 있다. 약속한 것이니, 당신 부부와 백무애를 그냥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서로 의지하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수 있겠지.”
이 말은 사실 겸사겸사 전한 것에 불과했고, 곤림수와 오풍이 빙설성지를 습격한 건 천영 부부를 구하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건 예정된 계획으로, 가장 중요한 건 빙설성지의 사람들에게 먼저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우유도는 이쪽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쓸려가거나, 나머지 성존에게 흡수되는 걸 막고 싶었다. 지금은 기회를 틈타 사성의 힘을 깎아낼 때였다. 그들의 세력이 약해져야만 천하를 통제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터였다.
물론 오풍은 이런 때에도 잊지 않고 천영을 구하려는 우유도에게 굳은 신뢰가 생겼다. 처음 무량원에서의 약속과 같이, 우유도는 마지막까지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오풍은 그와 협력하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장손미와 목연택이 죽었다. 여무쌍과 원색은 문제가 생겼고, 설파파마저 유명을 달리했으니 이제 구성 중 절반 이상이 제거되었다. 과거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오풍은 더더욱 확신이 생겼다. 분명 그때 모험하길 잘했다고, 자신이 제대로 정답을 찾은 것 같아 마음이 든든했다.
구성이 다 사라지면, 그는 실력으로 천하 최정상에 오를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얼마나 굉장하겠는가. 그야말로 그의 세대에 새로운 영웅들의 출현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상상이었다.
“저들과 같이 가라고요?”
깜짝 놀란 천영을 보고, 오풍이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 설파파가 죽었어.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는 흩어지는 법이지. 빙설성지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해야 할 거야. 우리가 직접 왔다는 것만 봐도 선생님은 충분한 성의를 보인 거야.
선생님의 체면이 있는 한, 저들은 널 건들지 않을 거야. 저들과 같이 움직이는 게 홀로 움직이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연락하기도 편하고. 그렇지? 물론 기어이 홀로 떠나겠다면 우리도 강요는 하지 않겠어. 알아서 결정해.”
그리고 오풍은 천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곤림수에게 말했다.
“갑시다!”
곤림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풍은 그와 함께 그대로 허공으로 날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둘을 보고, 우물쭈물하던 천영은 그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주안단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중에 또 기회를 봐서 연락하면 되었다. 일단 가지고 있는 주안단만으로도 1년은 버틸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뒤를 돈 순간, 설락아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천영, 도대체 저 몰래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설마 할머님을 해치는 일에 참여한 건가요?”
천영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나와 같이 있을 때, 구성 아래에서 사는 것이 마치 호랑이 옆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면서 수시로 우리의 미래를 걱정했잖소. 이제 자유가 되었으니 오히려 좋지 않소?”
설락아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어쨌든 절 키워주신 할머니예요!”
천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이리됐소. 설파파가 죽지 않았다면, 나를 죽이고, 심지어 당신과 아이까지 죽이려 했을 것이오. 그런데 내가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만약 나를 죽여 복수하고 싶다면, 나는 할 말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설락아는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고에 마음이 복잡했고, 어찌해야 할지 갈피도 잡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