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화. 건드릴 수 없는 자들
이내 여무화는 아이를 화단 위에 올려놓고,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중상을 입은 후여서인지 발걸음이 왠지 붕 뜬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그는 꿋꿋이 걸음을 옮겨 이 신비로운 이 앞에 포권을 했다.
“저희 가족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공. 성함을 알려주시면 나중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낯선 이는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자업자득인 것을 두고 무슨 보답을 논하는가? 됐네, 왕야께선 금주가 혼란해지는 걸 원치 않으시기에 나를 보내신 거야. 소천진 쪽엔 그를 통제할 사람이 따로 있으니, 앞으로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네.
오늘 내가 여기 나타난 건 그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동천부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자네 가족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 오늘 있었던 일을 묻거든, 소천진이 그 어미의 애원에 마음이 흔들려 복수를 포기했다고 하게.”
소천진이 떠나는 것을 본 해여월은 이미 그 자리에 무너져 우느라 이 낯선 이의 말을 듣지 못했다. 반면 여무화는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야? 용친왕 말씀입니까?”
낯선 이는 그를 빤히 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상조종을 제외하고 누가 있겠는가.
아무튼 여무화는 다시 연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일의 경중은 압니다. 절대 누구에게도 오늘 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휙-
바람 소리에 고개를 드니, 이미 여무화의 앞은 텅 비어 있었다.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무화는 상조종 휘하에 저런 고수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소천진을 너무도 쉽게 격파했다.
어쨌든 소천진이 다시 오지 않을 거란 말에, 여무화도 마음속 무거운 돌을 확실히 내려놓았다. 저 실력자가 그렇게 말했고, 그가 소천진에게 하는 말까지 들었으니, 아마도 틀림없을 터였다.
“하아!”
여무화가 탄식했다. 빚을 졌다. 어찌 보답해야 할까. 아니면 상조종은 과연 어떤 보답을 원할까. 여무화는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소천진이 다시 찾아오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반대로 소천진을 풀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여무화는 마음대로 이 빚을 잊고 살 수는 없었다. 앞으로 상조종과 만동천부 사이에 어디를 더 우선시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내 여무화가 뒤돌아 가슴 미어지게 울고 있는 해여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소천진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늘 소천진이 해여월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그녀의 모든 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여무화는 침울해졌다. 비록 소천진이 자신들 부자를 죽여 원한을 갚지는 못했지만, 그 독한 말들은 확실히 해여월에게 복수가 되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는 소천진을 막을 힘이 없었다. 소천진은 단 한 수에 그를 무력화 시켰다. 그것만으로도 소천진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사내가 되어 가족이 상처받는 걸 그냥 지켜만 봐야 한다는 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여무화는 그렇게 쓸쓸히 걸음을 옮겨 해여월을 부축했다.
해여월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지금 해여월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무너졌는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이대로 계속 바닥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여무화는 다친 몸에도 해여월을 안아 들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눕혀주었다. 곧 다시 나와선 아들도 안고 들어갔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엔 태양이 이미 높게 걸려있었다. 여무화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금 등골이 오싹해지고 있었다. 소천진의 수법은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이처럼 아무 인기척도 없이 수많은 사람을 재우다니, 어떻게 한 것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이런 수법은 수행자들이나, 속세의 전장에 사용하면 큰일이 아닌가? 더욱 괴이한 건 다른 모든 이가 당했음에도, 자신들 세 사람은 아주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분명 무슨 약물이 틀림없어 보였다.
오늘 여무화는 귀의의 명성을 뼛속 깊이 새겼다. 그는 감히 자신이 건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윽고 여무화가 요상영단을 꺼내 입에 넣어주자,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 * *
작은 객잔, 한 객실.
귀의가 뒷짐을 지고 서서 수시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에 무심은 한쪽에서 차를 따라 귀의에게 건넸다.
“사부님, 별일 없을 겁니다. 사제도 곧 돌아올 겁니다.”
“하아, 그 마음속의 원한을 잊어버리길 바랐건만. 해여월은 건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건 천리를 거스르는 일이니. 부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사람을 붙여주었어야 했어.”
천하에 풍운이 몰아치고 있었다. 귀의는 자신의 명성으로 인해 소용돌이에 얽혀들고 말았다. 두려웠다. 분명 이제 더 큰 파도가 밀려들 텐데, 귀의는 당장이라도 약곡으로 돌아가 몸을 숨기고 싶었다.
제자 무심은 교훈을 얻어 마음을 접고, 고분고분 같이 돌아가기로 했지만, 무상은 마음속 원한은 쉽게 지우지 못했다.
그렇게 귀의는 무상의 원한을 확실히 해결한 후, 두 제자를 데리고 약곡으로 돌아가 최대한 이 피바람을 피하려 했다.
그래도 귀의는 무상이 너무 큰 살겁을 일으키길 원치 않았다. 너무 많은 이가 죽는다면, 귀의도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무상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기에, 그가 직접 움직여 상당한 공을 들인 끝에 무상을 위한 특별한 약물을 만들어 주었다.
휙-
돌연 한줄기 흰 물체가 문을 뚫고 방으로 들어와 벽에 박혔다. 정확히 말하면 종이 한 장이 벽을 가르고 그사이에 반쯤 박혀 흔들리고 있었다.
쾅!
문이 열리고, 뭔가 움직임을 감지한 안보여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안보여 또한 그 종이를 보았고, 귀의와 무심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뒤 창으로 빠르게 다가가 밖을 살펴보았다.
거리엔 너무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종이가 문을 뚫고 들어와 벽에 박혔다. 손을 쓴 사람의 경지가 범상치 않아. 누가 노부를 지켜보고 있는지 모르겠군!”
귀의가 한번 웃어 보이고는 허공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종이가 벽에서 빠져나와 귀의에게 빨려 들어갔다. 종이에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무심도 가까이 다가와 귀의와 함께 내용을 살폈다.
「제자를 잘 간수하라. 다시 또 금주에서 경거망동한다면, 그의 생명을 취할 것이니 그때가 되면 그 누구도 탓하지 못할 것이다!」
귀의가 옆에 있는 무심을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했느냐?”
잠시 멈칫한 무심이 다급히 부인했다.
“금주에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귀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큰일이다. 네 사제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구나.”
안보여가 즉시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요?”
그 말이 끝난 순간, 세 사람이 동시에 뒤들 돌았다.
입구엔 사립을 쓴 무상이 서 있었다.
무상은 안에 들어와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부 귀의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도 잊고 한쪽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세 사람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사제, 괜찮아?”
무심이 다가가 물어도, 무상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이내 귀의가 다가가 그의 맥을 짚으며 법력으로 무상을 살펴보았다. 몸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복수했느냐?”
조심스러운 사부의 질문에, 무상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에 귀의의 분노가 커졌다.
“못난 놈, 말해라. 무슨 일이 있었느냐!”
“누군가 막아섰습니다…….”
무상은 다소 쉰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안보여가 대경실색했다.
“그 경지로도 상대가 안 된단 말입니까? 누구기에?”
무상도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원영기의 수행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왜인지 무상의 머릿속엔 해여월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그 장면이 떠나가질 않았다.
한편, 귀의는 깜짝 놀랐다. 원영기 수행자? 제자가 아무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안보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설마 사성이 나타난 건가요? 말도 안 돼요. 사성이 어째서 그런 작은 인물을 직접 보호한단 말인가요?”
성존에 대한 칭호는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있었다. 구성은 이제 사성이 되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너무 빨리 바뀌는 칭호에 혀가 다 꼬일 듯했다. 계속 바뀌는 칭호도 너무 생소해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귀의는 얼굴이 굳어졌다. 말도 안 된다니, 귀의는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사성이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쓸모가 있으니 그를 살려둘 것 아니겠는가. 어쩌면 체면을 조금 세워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성이 아니라면, 그것이야말로 두려운 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원비의 안구를 뽑게 하고, 무량과를 훔치고, 원색과 설파파를 죽였다. 구성 중 벌써 다섯이 사라졌다. 그들이 못 할 짓이 무엇일까.
하필 지금 수행계에서 그 일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두렵지 않았다. 정말 두려운 사람은 그처럼 암중에 숨어 있는 자였다.
그들은 구성과 대립하는 자들이었다. 하나하나가 목숨을 걸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감히 그런 사람 일에 끼어들라고?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고서야.
지금은 온 수행계가 늦가을 매미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누구도 감히 나서서 어느 한쪽 편을 드는 이가 없었다. 귀의가 잘난척하며 끼어들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 앞에선 신비로운 척, 대단한 척 위세를 부릴 수도 있겠지만, 일부 사람들 눈에 그와 약곡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귀의가 누군가의 강요로 무슨 짓을 했는지 잊었을 리 있을까. 앞에 나타나 손을 쓰고도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 걸 보면, 믿는 게 있어 두렵지 않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한마디로 언제든 죽일 수 있으니 원하면 한번 시도해 보라는 자신감이었다. 귀의는 모든 걸 깨닫고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여무화에게 중상을 입히게 한 것만 해도 네 사정을 많이 봐준 것이다. 우리 일행 행적이 이미 저들 손아귀에 있으니, 우리를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됐다, 지금 풍운을 일으키는 저들은 감히 우리가 건들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건들면 안 되는 사람들이야! 어서 짐을 챙겨라. 여긴 곧 난리가 날 것 같으니,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망가자꾸나!”
* * *
끝없이 펼쳐진 하늘 위, 2마리 날짐승이 날고 있었다. 그 위에 탄 사람들의 시야에 서서히 성도(聖島)가 비쳤다.
“도착했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둘을 깨워.”
나추가 뒤돌아 말했다.
그의 뒤에는 독무허가 나방비를 부축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마리에는 남도림이 사여래를 부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아직도 나추가 나방비를 어디에 숨겨놓았었는지 알지 못했다. 나추는 그저 잠시 홀로 어딘가로 사라지더니, 이처럼 나방비를 데려왔다.
지금 두 성존은 나추의 수하로 정교한 변장을 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었다. 나추가 요구했고, 나름의 일리가 있어 잠깐 불편하게 지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