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
여무쌍은 곧 정보를 정리하는 밀실에 도착했다.
마침 벽에 있는 구멍에선 돌돌 말린 밀서가 떨어져 내리더니, 길을 따라 서탁 한쪽으로 굴러갔다. 원강은 그 서탁에 앉아 들어오는 밀서를 하나하나 번역하며 살피고 있었다. 여무쌍은 그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야의 기분이 안 좋아요.”
원강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오?”
여무쌍은 원강의 등 쪽으로 다가가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원강은 여무쌍을 밀어내고 싶었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 위해 일단은 참았다.
여무쌍은 그 기회에 더욱더 원강에게 몸을 기대며 방금 있었던 일을 귓가에 대고 조용히 들려주었다.
여무쌍은 요즘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천천히 원강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이제 원강도 전처럼 격렬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도 천천히 접촉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 * *
기운종 누각.
흑석이 빠르게 들어왔다. 오상은 한창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림엔 한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림은 생동감 있고, 극도로 아름다웠다. 바로 은희의 초상이었다.
대부분은 오상이 망치질이나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오상의 서화 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라 할 수 있었다. 흑석도 당연히 이를 알았기에, 손뼉을 치며 감탄을 내뱉었다.
“성존의 그림은 정말 천하 일절이신 것 같습니다!”
오상은 계속 붓질하며 대답했다.
“그녀가 요괴일 줄 몰랐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식어가는 걸 보니,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질 것 같더군. 그러니 기억이 날 때 모습을 남겨둬야지.”
흑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무슨 일이냐?”
흑석이 곧 허리를 숙였다.
“빙설각 쪽에서 천영과 연락을 담당하던 일품당이 이미 잡혀들어간 상태였습니다. 빙설각 사람들이 도망친 덕에 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천영 부부가 빙설성지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설파파에게 문제가 생겼고, 빙설성지가 무너진 후 천영 부부는 어디로 갔는지 행적이 모호합니다.
빙설성지에 있는 이목이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빙설성지가 무너질 당시 그곳을 공격한 사람과 천영 부부가 만나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내내 움직이던 오상의 붓이 멈췄다.
“천영, 주안단, 마전이라. 하! 인제 보니 요괴 할망구가 과연 함정에 빠진 것이구나. 내가 이용당했다.”
“성존께서 조사를 명하신 것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초려산장과 관련 있는 화성공법 수행자는 천화교 제자인 곤림수 내외가 있었습니다. 당시 우유도가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소란이 있어, 당시 성존께도 보고드렸었습니다.”
“천화교의 절학을 익혔다는 그 사람 말이더냐?”
흑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곤림수도 마침 성경에 들어왔고, 우유도가 암살을 당했을 때 실종되었습니다. 또 실종된 곳이 공교롭게도 황택사지입니다.
또 한 가지, 곤림수는 원래 성경에 천화교 제자로 들어왔지만, 우유도에 의해 다시 그의 휘하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초려산장과 연관이 깊은 화성공법 수행자를 꼽으라면, 그자를 빼고 다른 자를 찾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곤림수의 부인이자 화봉황의 별호를 가진 그의 사매 섭운상은 줄곧 초려산장에 있었는데, 우유도가 죽고 난 이후 초려산장이 자금동에서 쫓겨나고 잠깐 그들과 같이 남주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사라져 행적이 묘연해졌습니다. 그 일은 곤림수가 실종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외에도 우유도가 죽은 후, 초려산장은 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상조종에 의해 온 남주와 안팎의 모든 일이 안정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모든 일이 상조종의 역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상이 중얼거렸다.
“곤림수!”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초려산장에 있는 이목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습니다. 오량산 장문인 말입니다. 하지만 그자도 2번째 표묘각 인원 명단이 폭로됐을 때 실종됐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신분이 들통나 도망쳤다곤 하는데, 꽤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표묘각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조용히 지내는 것 같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성존의 명령에 따라 조사를 시작하니 이상한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그것도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말입니다.
심지어 그 모든 문제는 겉으로 아주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초려산장의 물길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지요. 여태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고, 그 안에 심어 놓은 이목도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요.”
오상이 냉소를 지었다.
“원색은 식탐이 많았지. 덕분에 알아서 적의 소굴을 찾아 들어갔군, 그것이 아예 죽여달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흑석도 퍽 우습다고 생각하며 동의를 표했다.
“초려산장을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 원색의 죽음도 이해됩니다. 성존의 말씀처럼 초려산장이 적의 소굴이라면 원색이 갑자기 그곳에 쳐들어가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원색이 갑자기 찾아와 자리 잡을 줄은 그 누가 알았을까요. 분명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을 겁니다.”
오상은 붓을 들어 붓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은희가 그때 원색에게 연락한 건 우연이 아니었겠군. 아마 은희가 고의로 자신의 신분을 폭로하고, 원색은 자연스럽게 나방비를 납치했을 테고, 나방비가 납치되니 나추가 자연스럽게 나섰겠지.
나추가 나서서 소란을 피우면 원색의 거주지는 들통날 것이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원색은 어쩔 수 없이 초려산장을 떠날 수밖에 없지. 그럼 초려산장의 위기도 해소되리라 생각했을 거야. 결국, 원색은 철수한 게 아니라 실종됐지. 지금 보면 그사이 뭔가 다른 이들은 모르는 일이 있었을 거다.”
“성존, 근원을 찾았으니 다른 성존이 돌아오면 손을 쓸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오상은 다시 종이 위로 붓을 놀렸다.
“이미 배후를 찾았으니, 급할 것 없지. 일찍 손쓰나, 좀 늦게 손쓰나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보단 최근 며칠간 하나 고민 중인 일이 있다. 만약 성나찰이 저들 손에 있다면, 어째서 원색과 설파파를 처리할 때 성나찰을 동원한 흔적이 없는 것일까? 그러한 힘이 있다면 사용하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다. 혹시 나추 쪽이 이번에 황택사지에서 마주칠지도 모르겠구나?”
이 마지막 말에, 흑석의 두 눈이 번뜩였다. 돌연 뭔가를 깨달은 것이다.
그쪽에서 함정을 파고 설파파를 처리했다. 그럼 분명 이쪽에서 나방비를 이용할 것도 대비했을 터였다. 한마디로 황택사지는 지금 사전에 대비가 돼있을 테니, 어쩌면 성나찰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흑석은 이번에 왜 오상이 같이 가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이번에 황택사지로 향한 세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오상은 알 수 없는 위험을 피함과 동시에, 세 사람을 먼저 보내 허실을 파악하고자 한 것이었다.
어쩌면 오상은 세 사람 중 누군가 돌아오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아마 이런 걸 차도살인(*借刀殺人: 타인의 손을 빌려 사람을 죽임. 음흉한 수단을 쓰는 것을 비유하기도 함)이라 칭하는 것일까.
오상은 다시 붓을 떼고 그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판단이 옳다는 게 확인됐으니, 지금부터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
흑석은 바로 포권을 했다.
“예!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초려산장 처리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원영기 수행자 12명이 모두 초려산장에 숨어있진 않겠지. 자칫 잘못하면 다시 그들을 찾긴 쉽지 않을 테니 믿을 만한 사람들을 모아 한 가지 일에 집중해라.
바로 초려산장에서 나오는 모든 서신을 중간에 가로채 복사한 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밀서를 해독하는 것이다.
초려산장은 근원이다. 분명 다른 원영기 수행자들과 소식을 주고받을 것이다. 서신을 해독하면 원영기 수행자들이 누구인지 찾아내라.
잊지 마라, 그들을 모두 찾아내지 않으면, 우린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손을 쓰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손을 쓰면 일망타진해야 한다. 반드시 조심해라. 느릴지언정, 절대 경거망동해선 안 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는 나머지 세 사람은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
흑석이 엄숙한 얼굴로 포권을 했다.
“알겠습니다!”
* * *
나추는 한자리에 서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조금도 휴식을 취하지 않고, 이틀을 서 있었다. 표정도 거의 변화가 없었다.
사여래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꼭 어둠이 그를 뒤덮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는 점점 시간이 흐르며, 이틀이나 꿋꿋이 견디는 나추의 인내심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이번에 아주 단단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머리에 화관을 쓴 나방비도 조용해졌다. 피곤한 탓이었다. 법력으로 피로를 몰아낼 수도 없으니, 그저 사여래의 다리를 베고 누워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꽃향기에 묻힌 꿈이라도 꾸는 듯, 참 한가로운 표정이었다.
이내 나추는 고개를 들어 태양의 위치를 확인한 뒤, 천천히 뒤돌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줄곧 나추를 살피던 사여래는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때, 나추가 돌연 법력을 이용해 크게 외쳤다.
“이틀이 지났다. 은희, 온 것을 알고 있다. 나와라!”
그의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나방비는 깜짝 놀라 일어나선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다, 다시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직 정신도 채 차리지 못한 채 사여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사여래는 나방비를 살짝 밀어낸 후,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추가 다시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딸을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여기 데려왔다. 바로 여기 말이다. 결국 마주해야 하는 진실이고 누구도 도망치지 못한다. 당장 나와라!”
나방비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딸? 본인을 말하는 건가?
주위는 여전히 조용했다. 싸늘한 눈으로 주위를 한참 둘러보던 나추는 갑자기 허공을 움켜잡았다.
휙-
법력이 휘몰아치며 사여래가 곧바로 날아올라 나추에게 끌려갔다.
펑!!!
곧이어 나추가 후려친 일장에 사여래의 가슴이 터져나갔다. 가슴엔 바로 구멍이 뚫렸다.
사여래는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었다. 위험이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는 건 알았지만, 나추가 기회도 주지 않고 이렇게 손을 쓸 줄은 몰랐다.
나방비의 눈도 커다래졌다. 너무 놀라 넋을 잃은 그녀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꼭 믿을 수 없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와라!”
나추가 소리치며 다시 허공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이번엔 넋을 잃은 나방비가 그대로 빨려 들어가 나추에게 목을 붙잡혔다.
"안돼!”
한 여인의 참담한 고함과 함께 누군가 늪지에서 뛰쳐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 내려선 그녀, 은희였다.
은희는 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는 사여래를 보고, 다시 나추에게 목이 붙잡혀있는 나방비를 바라보았다. 비통한 은희의 눈에 담긴 감정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놓아줘요! 당신 딸이잖아요! 어찌 그 아이를 죽이려 할 수 있지요?”
은희는 암중에 숨어 나추가 딸을 죽이지 않을 거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나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여래를 죽여버렸다. 제자였고, 사위였던 사여래를. 깜짝 놀란 은희는 딸마저 위협하는 그의 앞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