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화. 용서할 수 없는
두 사람은 묵묵히 몸을 일으켜 은희를 천천히 눕혀주었다. 은희를 눕히자 과연 아름다운 은호의 모습으로 변했고, 털에도 아직 붉은 핏물이 맺혀있었다. 은호는 그렇게 잠을 자는 것처럼 조용히 누워있었다.
곤림수와 오풍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족장…….”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요호족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화봉황도 눈물을 흘렸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은희와 꽤 잘 지냈다. 은희가 얼마나 선한 이였는지, 그 선한 여인이 어쩔 수 없이 요호족을 이끌며 이리 같은 자들에게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생생히 느꼈었다.
진관과 가정걸도 괴로운 얼굴이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내지 않았는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방비는 석탁에 있는 은호를 보며 여전히 침묵했다. 다만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은 여전히 멈출 줄을 몰랐다.
찰싹! 찰싹!
갑자기 어디선가 따귀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흑운이 자신의 뺨을 때리는 소리였다. 그는 스스로를 독하게 때리며 후회의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야! 다 내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우유도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내가 노족장을 죽였어! 내가 노족장을 죽였어!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야…….”
흑운을 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노족장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고 있어 다른 것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결국 흑운이 입과 코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것을 보고, 오풍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풍은 흑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법력으로 자해를 막고 조용히 토닥였다.
“어찌 그 모든 걸 예측할 수 있었겠소. 누구의 잘못도 아니오. 탓하려면 그 개자식들을 탓해야하지 않겠소? 이미 벌어진 일이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바로 그때, 밖에서 누군가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나추가 죽었습니다! 나추가 죽었습니다…….”
한 장로가 빠르게 뛰어 들어왔다. 그의 품에 나추의 시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안의 상황을 보자마자 넋을 잃어버렸다.
툭-
힘을 잃은 그의 품에서 나추의 시신이 떨어졌다.
장로는 빠르게 요호족이 모인 곳으로 가 무릎을 꿇은 이들을 흔들었다.
“어찌 된 일이오? 어찌 된 일이오……!”
그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것 같았다.
이내 나방비가 멍하게 몸을 일으켰다. 들고 있던 서신도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지금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나방비는 조용히 나추의 시신 앞으로 다가갔다.
나방비의 시야로 죽은 나추가 가득히 담겼다. 가슴에 남겨진 상처도 선명했다. 머릿속에선 순식간에 여러 장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사여래를 죽이던 나추, 나추의 가슴을 꿰뚫은 자신, 마지막으로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던 은희의 눈……. 수많은 장면이 엉망으로 떠돌아다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방비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손엔 아직 아버지의 피가 남아 있었다. 그것을 지긋이 바라보던 나방비의 머리칼이 다시 서서히 검어지기 시작했다. 송곳니와 귀도 줄어들고, 날카롭게 돋아난 손톱도 다시 줄어들었다. 나방비의 모습은 다시 인간과 다를 바 없어졌다.
털썩…….
나방비는 끝내 쓰러졌다.
인기척에 다들 뒤를 돌았다가 깜짝 놀랐다. 곤림수는 바로 달려와 법력으로 나방비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 * *
밀실 내부.
쾅!!!
우유도가 서탁을 후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하마터면 탁자가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센 힘이었다.
요호족이 보낸 소식으로 우유도도 나추의 죽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또 하나의 성존을 처리했다는 기쁨보단,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밀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은희와 모든 연락을 끊으라 하지 않았나? 아무 연락도 안 되는데 어째서 은희가 나추와 만나고,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우유도는 대부분 냉정하고, 이성적인 편이었다. 이처럼 흥분한 모습은 극히 보기 드물었다. 밀실에 있는 모두가 침묵했다. 매우 큰 일이었다. 와야 할 사람은 다들 모였지만, 여기서 그 답을 알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흑운은 자책감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소식은 이를 빨리 우유도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오풍이 슬픔에 잠긴 요호족을 재촉해 보내온 것이었다.
여무쌍도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우유도의 지시에 따르기만 했다면 이런 일은 없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봤자 사여래의 죽음까지였다. 나방비에게 문제가 생길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그중 가장 안전해야 할 이는 오히려 은희였다. 우유도 측은 은희에게 변고가 생길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은희가 죽었다. 기나긴 시간 요호족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심지어 상찬 부부와도 인연이 있는 인물이 이처럼 예상치 못한 일로 목숨을 잃다니, 여무쌍도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었다.
물론 지금 여무쌍도 우유도 쪽에 섰기에 안타까운 마음일 뿐, 여전히 구성의 입장이었다면 그녀 역시 은희를 죽이려 손을 쓰고 있었을 터였다.
이내 주변을 서성이던 우유도가 걸음을 멈췄다.
“혹시 요호족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여무쌍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너무 화가 나 정신 줄을 놓쳐버렸나? 우유도가 흥분할 때면 판단력도 다 흐트러지는 듯했다.
“도야,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건 알고 있죠? 그 일은 도야가 왕존과 직접 만나 그에게 지시한 일이에요. 그걸 지금 저희 탓으로 돌리다니요? 저희는 맡은 임무를 다 잘 처리했어요.”
물론 여무쌍도 우유도가 분노한 연유를 알았다. 앞서 일을 완벽히 처리하지 못해서 사여래가 목숨을 잃었다. 우유도는 그에 대해 크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은희까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은희는 원영기 수행자들과 비교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녀를 잃었으니, 어찌 분이 터지지 않을까.
“조용히 있으시오.”
원강의 담담한 목소리에, 운희가 힐끗 눈길을 돌렸다. 어째 부부로서 배우자를 타이르는 듯한 태도였다.
여무쌍도 원강을 한번 돌아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여무쌍의 말을 듣고 우유도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그도 자신이 너무 과하게 흥분했다는 걸 인지했다. 지금은 정말 뇌도 거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막 내뱉고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언제든 수많은 역경이 나타날 수 있었다. 모든 걸 지휘하는 사람으로서, 우유도는 어느 때보다 오판을 내려선 안 되는 시기였다.
그렇게 우유도가 감정을 추스르는 걸 보고 원강이 나섰다.
“도야, 이건 왕존이 도야 뜻을 제대로 전하지 않았거나 은희가 도야의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난 일일 거예요. 황택사지 범위가 저리도 큰데, 몸을 숨긴다면 나추 쪽 사람이 우연히라도 만날 가능성은 없겠지요. 더군다나 이런 일에 왕존이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 유일한 가능성은 후자겠네요. 나중에 저쪽에 연락을 취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에요.”
그는 사건을 분석하는 입장에서 성경 지도도 가리켜가며 이야기했다.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쉰 우유도는 침묵에 잠겼다. 냉정을 되찾고 고민해보니, 원강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물어봐, 당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알려달라고 전해.”
“알겠어요. 그리고 요호족에서 나방비를 어떻게 처리하냐고 물어왔어요.”
원강이 고개를 끄덕인 후, 질문을 이었다.
우유도는 서탁 위 서신을 바라보았다. 서신엔 나방비가 변신한 일이 언급돼 있었다. 우유도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일이었다.
“나방비가 요괴로 변신하다니.”
“은희 딸인데 몸에 요호족 혈통이 어느 정도는 흐르고 있겠죠. 큰 자극을 받고 요호족의 혈통이 깨어난 것 같아요. 안 그랬으면 갑자기 요괴로 변신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깨어난 나방비가 그토록 강한 실력을 갖출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남도림과 바로 손속을 겨룰 수준에 도달하다니. 정말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될 거예요. 일단 치료를 잘 끝내야죠.”
우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도 우유도가 중요시 생각한 부분이었다. 이 연속된 불운에서 그나마 뭔가 얻은 부분이었다. 아마 이 불행이 아니었다면 나방비에게 그토록 신비한 힘이 숨어 있다는 걸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호족이 전해온 소식에 불행은 그치지 않았다. 나방비가 깊은 잠에 빠져, 어떻게 해도 깨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요호족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곤림수 등도 강대한 법력을 썼지만 결국 나방비를 깨울 수 없었다.
이건 좀 괴이한 일이었다. 나방비도 부상을 입었지만, 절대 깨어나질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저 신체가 변화한 이후 무슨 알 수 없는 원인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요호족이 우유도에게 도움을 청했다. 봉쇄된 곳에서 사는 요호족에게 도움을 청할 만큼 믿음직한 사람이라곤 우유도밖에 없었다. 요호족도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우유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다들 뒷짐을 지고 주변을 서성이는 우유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우유도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익숙한 이들은 우유도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곤 했다는 걸 떠올렸다. 그 때문에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우유도를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한참이 지나, 우유도가 여무쌍 앞에 멈춰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성경 출입구 쪽 왕존의 연락선은 아마 끊길 겁니다. 당분간은 제수씨 쪽 연락선을 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무쌍은 이것이 사여래의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았다. 전에 사여래는 너무 큰 수작을 부리지 못했고, 일부 매수한 사람들도 결국은 대나성지 내부의 사람이었다.
이제 나추가 죽었으니, 성경 출입구에 있는 대나성지 사람들은 모두 숙청당할 것이다. 이는 즉, 성경 안팎을 연결하는 연락선이 끊긴다는 것이었다.
여무쌍이 말했다.
“제가 오상 쪽에 심어둔 사람을 쓰면 돼요. 확실한 건 아니에요. 오상 쪽에서 성경 출입구에 있는 인원을 다른 곳을 옮기면 바로 끊길 연락선이에요.”
사실이었다. 어쨌든 지금 여무쌍은 과거의 여무쌍이 아니었으니,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괜찮습니다. 일단 기용하도록 하지요. 우리 쪽에서 표묘각 내부 일부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선별해, 인계받게 하면 됩니다. 제수씨 사람을 기용한 후, 그들에게 곧바로 왕존과 연락을 취하게 하십시오.”
여무쌍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호족과 직접 연락하는 것은 계속 왕존에게 맡기는 것이 믿을 만했다.
“문제는 나방비입니다. 사람을 보내 치료하게 하기도 쉽지 않지요. 지금 성경 출입구 상황을 보면, 성존이 직접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는 이상 외부인이 성경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귀의보다 적합한 사람이 없을 텐데…….”
여무쌍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의도 아무 이유 없이 성경에 들어갈 수는 없어요.”
“그 일은 제가 처리하지요. 마침 직접 약곡을 한번 들리려 했습니다.”
“약곡을 간다고요?”
여무쌍은 물론 모두가 깜짝 놀라 우유도를 바라보았다.
우유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나찰 일은 오상에게 마음의 병이 됐을 겁니다. 게다가 남도림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나방비가 나타났으니, 더 불안하겠지요. 초려산장을 미끼로 이용하는 일이 압박이 될 수 있으니, 언제든 파국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일단 오상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최후의 결전에 확신이 없다면 경거망동해선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차치하고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오상을 안심시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오상을 안심시키는 것과 귀의가 무슨 상관이기에 약곡까지 가야 한단 말인가?
여무쌍이 물었다.
“무슨 뜻이지요?”
하지만 우유도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유도의 계획을 듣고 쓸데없이 걱정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고, 괜한 입씨름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겁니다. 나추의 죽음은 소문내도록 하지요.”
우유도가 일단 결정을 내렸다면,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저 다들 그에게 계획이 있으리라 믿으며 각자 맡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