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화. 한 달의 시간
기운종.
남도림과 독무허가 빠르게 찾아와 오상과 긴 대화를 나누고 떠났다.
두 사람이 먼 하늘로 사라진 후, 오상은 극도로 얼굴을 찌푸렸다.
“나방비!”
흑석도 옆에서 탄식했다.
“요호족 혈통이 작용한 게 확실합니다.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나방비의 혈통이 깨어난 후, 그 능력이 그토록 갑작스럽게 발전하다니요!”
오상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나는 성나찰이고, 이제는 나방비까지 튀어나오다니…….”
흑석은 순간 오상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깨달았다. 상대는 이제 이쪽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춘 것이다.
그때, 오상이 갑자기 뒤를 돌았다.
“초려산장 일은 어찌 준비되고 있느냐?”
“성존의 지시에 따라 진행하고 있습니다. 표묘각 해독 고수들을 모았습니다. 다음으론 암중에 각국 해독 전문가들을 불러올 예정입니다. 그러나 서신을 중간에 가로채고 복제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미 번역된 서신이 없는 이상 암호 해독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시간을 걱정하는 건, 아직 성나찰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 나방비가 튀어나온 상황이라 오상이 더는 인내하지 못할까를 우려하는 것이었다.
오상도 그 어려움을 이해했다. 밀서만 모아 해독하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해독한 서신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내용 일부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해독 고수들은 모든 밀서를 해독해 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밀서를 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해독본을 쉽게 누출하지 않을 테고, 내용만 확인하면 그 자리에서 없앨 것이 뻔했다. 또한 절대 경거망동해선 안 되는 상황이라 초려산장과 관련된 곳을 쉽게 건들 수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오상이 냉담하게 말했다.
“일단 시도해봐라. 한 달의 시간을 주겠다. 한 달 후에도 결과가 없다면, 더는 시간 끌 필요 없겠지. 일단 남도림, 독무허와 손을 잡고 눈에 띈 곳부터 없애버리도록 하겠다.”
오상은 급하게 손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일단 초려산장의 숨겨진 힘으로 남도림과 독무허를 처리한 후, 초려산장을 다시 일망타진하고 싶었다. 최소한 그 원영기 수행자들의 행방을 알아낸 후에 처리해야 했다. 만약 이대로 도망쳐 버리면 아주 상황이 곤란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방비의 출몰에 이대로 시간을 끄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먼저 손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오상은 해독 인원들에게 어느 정도 시간을 주었다. 최소한 시도는 해봐야 했고, 짧은 시간에 원영기 수행자들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성존, 그런데 적이 만약 수작을 부리고자 한다면, 나추의 죽음은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천하의 인심이…….”
오상은 흑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구성이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이 짧은 시간에 연이어 죽음이 이어지고, 이제 남은 건 겨우 셋뿐이었다. 천하의 사람들이 과연 이를 어찌 생각할까.
사람들은 내막을 몰랐다. 원색과 여무쌍을 제외하고, 일부는 구성 때문에 죽었다는 걸. 그저 이 추세로 구성의 대세가 떠났다고만 생각할 터였다.
이로써 천하 수행자들은 어느 편에 서야 할지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각 세력도 진심으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었다.
최소한 지금의 천하는 성존의 천하가 맞으니 스스로 자기 밥그릇을 깨트리려 하진 않겠지만, 성존도 막무가내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럼 당연히 천하 세력들은 구성에게 대항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천하 수행자들을 모두 죽일 수 있겠는가? 일부 세력의 머리를 죽인다 한들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이었다. 일단 천하 수행자들이 모두 숨어들어 성존에게 대항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천하 대란이라 할 수 있으니, 후환이 끊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암중에서 수없는 수행자들이 수작을 부리면, 단시간에 그들을 모두 처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연히 천하는 장기간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
오상이 냉소를 지었다.
“인심? 배후만 처리하면, 그 박쥐 같은 자들은 신경 쓸 것도 없다.”
“알겠습니다!”
흑석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그 말을 인정했다.
그리고 흑석이 떠난 후, 오상은 천천히 눈을 감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누님!”
* * *
서재 안.
“나추가 죽었다고?”
소평파가 아연실색했다.
“그렇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기운종 제자의 말이, 표묘각에 있는 대나성지 사람들이 또다시 적지 않게 도망쳤다고 합니다.”
소평파는 호흡을 한번 고른 뒤, 들고 있던 서신을 서탁에 다시 던졌다.
“살초가 끊이지 않는구나! 가무설 쪽에서 좀 더 속도를 냈으면 좋겠어. 이대로 시간을 끌면 상황이 반전될 수도 있다!”
소삼성이 의아해했다.
“대 공자님, 뭔가를 알아차리셨습니까?”
소평파가 서탁에 있는 정보를 툭툭 쳤다.
“여기 단서들을 보면, 표묘각 사람들은 지금 진국 전쟁에 관심을 보인다.”
소삼성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 그게 문제가 됩니까?”
“성존은 수행계 각 세력을 동원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수행계에 공급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 약조했지. 나는 저들이 기운종, 만수문, 영종, 천행종을 통제해 뭘 하려는지 몰라서 고민했었다. 이제야 이유를 알겠구나. 만수문, 영종, 천행종을 통제하는 건 구실에 불과하다. 저들의 진정한 목표는 강대한 군대를 가진 진국이다.”
소삼성은 참지 못하고 이마를 긁적였다. 여전히 이해 못 한 얼굴이었다. 소평파는 그를 힐끗 한번 보고 다시 이야기했다.
“인심이 흔들렸다. 불파불립(*不破不立: 기존의 것을 깨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세울 수 없음을 일컬음)이다! 수행계의 내부투쟁을 일으켜, 천하 수행자들을 대량으로 소모 시키려는 것이다. 진국의 병력으로 천하를 휩쓴다면, 다시금 이익 관계를 정립할 수 있고, 천하의 질서를 다시 세울 수 있다. 기운종을 통제하고 장악한다는 건 진국을 장악한 것과 다름이 없다!”
소삼성은 뭔가 깨달은 듯 숨을 들이켰다.
“천하를 통일한 진국을 장악하면 천하를 장악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소평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무설에게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소삼성이 다급히 물었다.
그러나 소평파는 자조적인 미소만 지었다.
“이런 일이 그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더냐? 송국의 장등사도 눈이 있다. 그런 행동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가무설은 이런 쪽으로 특출난 사람이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 우리가 쓸데없이 경고할 필요가 있겠느냐?”
* * *
만수문 내부.
한동안 크게 혼란스러웠던 만수문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여태 나추가 데려온 수많은 표묘각 인원이 만수문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나추의 죽음으로 그 휘하에 있던 대나성지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표묘각 인원들도 마냥 장식이 아니었다. 숫자가 모자라다 보니 만수문 사람들에게 협조를 구해 즉각 대나성지의 사람들을 뒤쫓았다.
그렇게 같이 뒤를 쫓던 장로들이 돌아왔을 때, 내내 의사대전에서 서성이기만 하던 서해당이 바로 조용히 다가갔다.
“어찌 됐소?”
“대부분 도망쳤습니다. 표묘각 쪽에서 한두 명 붙잡은 것 같습니다.”
한 장로가 조용히 대답했다.
막말로, 만수문은 처음부터 최선을 다할 생각이 없었다. 잡을 수 있어도 잡지 않았다. 다들 떠나기 전 이미 장문인의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이내 서해당은 다 생각이 있다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우리는 양쪽 어느 곳의 원한도 사서는 안 되오.”
장로들도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얘기였다. 죽어 도망친 성존의 세력은 분명 암중에 성존을 죽인 사람들과 손을 잡을 터였다. 그들에게 원한을 사면 추후 그들이 천하를 얻었을 때 만수문의 입장이 아주 곤란해질 수 있었다.
최근 구성 중 여섯이 연달아 사라졌다. 이 속도면 남은 셋도 얼마나 더 버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암중에 구성과 대항하는 자들의 원한을 산다면 그건 죽여달라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렇다고 표묘각의 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척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직 세상은 구성의 천하였고, 그 누구도 대놓고 나서서 낭중지추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천하 수행자들은 겉으론 아주 고분고분했다.
“만약, 나중에 표묘각이 이를 알고 보복하려고 하면 어찌합니까?”
한 장로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에 서해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만 이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법불책중(法不責衆)이라고, 법을 어기는 사람이 많으면 처벌하기 어렵지. 그렇지 않으면 수습하기 매우 어려워질 것이오. 맨발인 사람은 신발이 없다고 걱정하지 않소.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은 그 이치를 우리보다 더욱 잘 알고 있지 않겠소? 무엇보다 그것도 일단은 이 천하를 지킨 후에야 가능한 일 아니겠소?”
사람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표묘각 책임자는 먼발치에서 의사대전을 나오는 만수문 장로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만수문엔 날짐승이 있었다. 무려 날짐승을 타고 추격했으면서 단 한 명도 잡지 못했다니, 자신들을 머저리로 보는 것인가! 저들이 고의로 대나성지 사람들을 풀어주었음을 머저리라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도 홀로 분노를 삭일 뿐, 대놓고 밝힐 수가 없었다. 여기서 표묘각은 저 거대한 만수문 세력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정말 저들을 압박해 반란을 부추기면, 저 많은 이가 도망쳐 암중에 혼란을 일으킨다면, 지금 표묘각은 저들을 어쩌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문제를 크게 만들면, 지금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상부의 뜻을 대놓고 위반한 그가 뭐라 변명할 수 있겠는가.
과거 표묘각이 천하를 종횡할 땐 그 얼마나 위풍당당했었나. 아무나 몇 명만 와도 이 큰 문파가 전전긍긍하며 쩔쩔맸었다. 결국 지금은 그 옛날의 영광은 뒤로한 채 그저 속으로 울분을 삼켜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로선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나중을 기약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서해당은 의사대전을 홀로 서성이며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추가 사라졌다. 앞으로도 돌아올 일이 없었다.
지금까진 매우 조마조마했지만, 이젠 두렵지 않았다. 설령 표묘각 사람들이 뭔가 발견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나추가 아직 만수문에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의 실력으로 도망가는 건 별문제도 되지 않았다.
나추의 죽음은 천하를 뒤흔들었다. 구성이 하나둘 죽어가는 건 각 세력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적지 않은 이가 한 시대의 종말을 직감했다.
속세와 민간에서도 분분히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것만 보아도 표묘각이 더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 * *
왕부.
“시끄럽다, 그게 너희들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더냐?”
하인들은 밖에서 나추의 소식을 듣고 돌아와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았다. 봉약남은 반쯤 듣고 있다가 문득 제 신분을 망각했을 때 일어날 결과를 떠올리고 즉시 호통을 쳤다.
시녀는 남몰래 입술을 삐죽이며 이야기를 그쳤다.
그러자 한쪽에 있던 상숙청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새언니, 세상 모두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괜찮을 거예요.”
봉약남 생각에도 그 말이 맞았다. 지금 거리에 나가면, 일반 백성들조차 의견이 분분한데 성존이 설마 온 천하의 사람들을 죽이기라도 하겠는가?
“확실히 표묘각은 천하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것 같군.”
봉약남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받아 하인이 즉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