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화. 약곡에 강림하사
상숙청은 잠시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초려별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상숙청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그가 있는 곳이었다.
‘도야의 솜씨인가요?’
예전의 그녀라면 이런 큰일 앞에서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상숙청은 우유도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 누군가가 그녀와 은아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간 후 큰일이 생겼다. 그 뒤로 원색에게 문제가 생겼던 것을 생각해 보면 뭔가 연상되는 게 있었다.
상숙청은 어리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총명했다. 그녀는 즉시 원색에게 생긴 문제가 우유도와 관련이 있음을 추측해냈다.
구성에게 하나둘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사라질 사람은 사라졌다. 처음 우유도가 숨어서 뭘 하고 있는지 깨닫고 상숙청은 매우 놀랐지만, 깊은 걱정 한편엔 그가 참 자랑스럽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천하에 도야 말고 이럴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지난번 우유도를 만난 이후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았다. 상숙청도 그의 일이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고집을 부리지도, 먼저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에겐 고집을 부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 몇 번 본 것도 먼발치에서 운희와 함께 있는 왕소를 본 것뿐이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때, 봉약남도 넋을 잃은 상숙청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 아니었다. 봉약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평생 혼인을 하지 않겠다니, 이대로 영원히 홀로 늙어 가겠다는 말인가?
한숨 소리에 상숙청도 정신을 차렸다. 새언니가 왜 한숨을 내쉬었는지는 몰라도, 시선에 담긴 봉약남이 제법 근사해 보였다. 피부도 뽀얘지고, 살도 꽤 붙어서 참 보기 좋았다. 더는 전처럼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던 장군의 자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왕비의 기품이 흐르는 그녀도 매력이 있었다.
봉약남은 다시 입구로 눈길을 돌렸다. 앉아서 뭔가 또 열심히 먹는 은아를 보고 있으려니, 상숙청만큼 은아도 참 걱정이 되었다.
“은아 저 멍청한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하루 내내 끝없이 먹기만 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야. 민아 간식을 뺏어 먹어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저 작은 몸에 저리 많은 음식을 넣으면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민아는 봉약남의 아들 상조민을 칭하는 것이었다. 과거 우유도가 봉약남을 위해 지어준 이름이었다.
은아는 바로 음식을 오물오물 씹으며 홱, 뒤를 돌았다. 멍청한 아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나쁜 사람!”
어이가 없어진 봉약남을 두고, 상숙청이 웃음을 꾹 참으며 타일렀다.
“은아야, 무례를 범하면 안 돼.”
그리고는 봉약남에게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홍랑이 수시로 와서 법력으로 검사하는데 괜찮았어요.”
봉약남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잘 먹네. 아, 홍랑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한동안 안 보이네?”
“그러게요. 무슨 볼일이 있다고 하던데 말이에요.”
* * *
초려별원, 밀실.
이곳은 그저 임시로 머무는 곳일 뿐, 왕부와 초려별원은 아직 재건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렇게 빨리 재건되진 않을 듯했다.
지금 우유도와 운희는 원행을 나갈 짐을 싸고 있었다. 원강과 여무쌍은 우유도가 약곡에 가는 이유도 모르지만, 그냥 배웅을 위해 찾아왔다.
일부 문제에 관해 우유도의 당부가 끝나고, 원강이 질문을 던졌다.
“도야, 그 사환려를 만나보시겠어요? 왕존이 서신에서 여러 번이나 그녀를 언급하며 제발 잘 보살펴 달라고 했어요.”
제갈지는 이미 사환려를 안전히 데려와 일단 성문 밖에 머물게 했다.
이어, 여무쌍도 말을 붙였다.
“왕존이 이처럼 사여래의 딸을 중시하다니, 사여래가 허투루 왕존을 후대한 것이 아니군요.”
여무쌍은 아직 왕존이 사환려의 외삼촌란 걸 알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물론, 사환려 조차 자신에게 외삼촌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우유도는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은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모르니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 넌 그 여인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는 것에만 신경 써 줘. 사여래가 죽었다는 건 일단 알리지 말고. 나중에 내가 직접 알릴 테니까. 그냥 사여래에게 일이 있어 만나러 오지 못한다고, 그렇게만 전해.”
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곧이어 우유도가 운희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운희는 바로 둔지를 썼다.
* * *
파도가 휘몰아치는 망망대해 속 홀로 서 있는 화산섬.
약곡은 사계절이 봄처럼 따뜻한 곳이었다.
귀의는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약방으로 들어와 웬 낯선 이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한 잡부가 약병들을 이리저리 들추며 살피고 있었다.
감히 이곳 물건들을 마음대로 건드리다니, 귀의의 언성이 높아졌다.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잡부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
“선생, 오셨소.”
귀의는 다시 멈칫했다. 약곡에 그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잡부는 누가 봐도 낯선 사람이었다. 귀의가 곧 굳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당신 누구요?”
당장이라도 경보를 울릴 듯한 귀의를 보고, 잡부가 약병을 흔들었다.
“어디 원비의 눈을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 한번 와봤을 뿐이오. 지금 다른 사람들을 부른다면, 문제가 좀 심각해질 수 있소. 그렇지 않겠소?”
이내 문을 닫으라 턱짓하는 잡부는 바로 우유도였다.
곽만이라는 내통자가 있어, 약곡에 우유도가 모르는 일은 없었다. 우유도는 이미 약곡 내부 방어가 그리 엄격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성존이 있는 한, 감히 이곳으로 와 소란 피울 자가 없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곽만은 약곡 잡부 의복을 주며, 언제 어느 노선으로 움직이라고만 이야기했다. 우유도는 그렇게 아주 당당하게 이곳까지 들어온 것이다. 물론, 상황이 복잡했다면, 우유도는 당연히 또 그 상황에 맞는 방식을 도출했을 터였다.
귀의는 살짝 얼굴을 씰룩였다. 원색이 죽었는데, 원비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귀의는 문을 닫고 우유도에게 다가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남명이 보냈소.”
귀의가 다시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할 일은 다 했소. 원색과 나추가 죽었소. 삼성은 원비 일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오. 더는 그것으로 날 협박할 수 없소. 노부는 그저 조용히 여생을 지내고 싶을 뿐이오. 당신들 시시비비에 더는 얽히고 싶지 않소. 계속 노부를 협박한다면, 지금 당장 삼성에게 이 사실을 고발할 것이오!”
“고발한다고? 그들에게 남명을 잡으라고? 잡을 수 있었다면, 당신이 고발할 때까지 기다렸겠소?”
“아무튼, 노부는 더는 당신들의 그 끝없는 협박에 따르지 않을 것이오! 지금 즉시 떠나시오. 지금이라면 못 본 척해주겠소.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삼성의 사람을 부를 것이오. 그때가 되면 나도 삼성 쪽으로 몸을 피하면 그만이니, 당신들의 보복을 두려워할 것도 없소!”
우유도는 담담히 미소 지으며 탁자에 약병을 느긋이 내려놓았다.
“부르시오, 어디 마음껏 불러 보시오. 원비 일은 아무것도 아니오. 혹 삼성에게 당신 제자 무심이 무량과를 도둑질한 일에 참여했다는 걸 알리고 싶다면, 어디 한번 마음껏 불러 보시오. 난 괜찮으니.”
무량과를 훔쳐? 귀의는 멈칫하더니, 곧 미소 지었다.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당신들은 참으로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군,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까지 지어내려 하다니, 정말 나와 제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인 줄 아시오?”
우유도가 미소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귀의는 빠르게 분노를 토해냈다.
“내가 알기로, 무량과가 파괴되기 전에 이미 꽃이 피었소. 무량과, 과실을 채취한 후 30년이 지나 꽃이 피고, 다시 30년이 지나 과실을 맺고, 또 30년이 지나야만 과실이 익는다고 했소. 그러니 무량과가 도둑질당한 것은 최소한 30년 전 일이지. 30년 전 우리 제자가 몇 살이었는진 아시오? 그 작은 아이가 무량과를 훔치는 일에 참여했다니, 이 노부가 그리 만만하오?”
우유도는 상대를 지긋이 보다 미소를 지었다.
“좋소, 그 정도 임기응변이면 충분해. 그 정도도 못 하면 일을 시키려 하지도 않았지. 흑리, 무량과수 꽃이 30년이 지나야 핀다는 건 누가 알려줬소?”
귀의가 우렁차게 말했다.
“천하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소!”
“왜 그리 화를 내는 것이오. 그럼 내가 오늘 그대에게 천하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지. 맞소, 본래 무량과의 성장 과정은 당신이 말한 대로요. 하지만 당신은 무량과가 왜 30년이 지나야 꽃이 피고, 왜 다시 30년이 지나야 과실을 맺고, 왜 또 30년이 지나야 과실이 익는지 알고 있소?”
귀의가 멈칫했다. 그건 귀의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량과는 분명 보통 물건이 아닐 것이오. 천지간의 영기가 모여 태어나는 것으로, 반드시 충분한 천지영기를 모아야 자라날 수 있기에 그 정도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머뭇거리며 답했지만, 우유도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귀의가 순간적으로 거의 진실에 근접했기 때문이었다. 우유도는 솔직하게 손뼉을 치며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과연 명의의 이름은 명불허전이오. 병을 고치는 건 사람의 생리(生理)를 건든다는 것이오. 또한, 사람의 생리란 이 천지의 순환과 맞닿아있지. 하나가 통하면 모든 게 통한다는 일통백통(一通百通)이란 말이 있듯, 아마 선생은 치료의 도에 능통하게 되어, 세상의 이치를 논할 수 있게 된 것 같소.
맞소, 그것이 이유요. 선생도 무량과가 얼마나 오랫동안 과실이 채취되지 않았는지 아실 것이오. 또 선생은 그 무량과수 안에 얼마나 많은 천지영기가 모여 꽃으로 피어날 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오! 30년이 다 무엇이오, 족히 200년은 되겠지.”
귀의는 뭔가를 깨닫고 매우 놀랐지만, 겉으론 냉소만 지어 보였다.
“그것이 내 제자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우유도가 웃었다.
“하하! 선생은 우유도가 무량원을 감찰한 사실을 알고 있으시오?”
귀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내 제자와 무슨 상관이 있냐는 말이오?”
우유도가 다시 물었다.
“선생은 우유도가 무량원을 감찰한 후 습격 당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소?”
귀의는 정말 답답한 듯 소매를 휘저었다.
“그러니까, 그게 내 제자와 무슨 상관이 있소?”
우유도가 빙그레 웃었다.
“선생은 무량과를 훔친 사람이 바로 우유도이며, 그가 그곳에서 몸을 빼내기 위해 금선탈각(金蟬脫殼)과 이대도강(李代桃僵)의 계를 썼고, 대역을 이용해 죽음을 위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귀의가 결국 분노했다.
“그게 내 제자와 무슨 상관이 있소!”
우유도가 다시 소리 내 웃었다.
“하하! 선생은 정말 모르는 것이오, 모르는 척하는 것이오? 그 이대도강의 대역 우유도는 바로 선생의 제자 무심이 그 대단한 의술로 얼굴과 몸을 고쳐 만들어 낸 것이오. 그런데도 당신들과 상관이 없소? 그래, 나는 믿어도 과연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삼성은 선생의 말을 믿겠소?”
귀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정신도 멍해져버렸다. 결국 그는 수염을 잡아 뜯으며 반항했다. 하지만 자신을 잃은 목소리엔 그다지 힘이 없었다.
“헛소리!”
“모르는 척하지 마시오. 선생이 돕지 않겠다니, 무량과의 행방은 당신들이 삼성에게 천천히 설명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탁자를 돌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우유도를 보고, 귀의가 부들부들 떨었다. 하마터면 제 수염을 다 뽑아버릴 듯했다.
“잠깐!”
우유도가 바로 멈춰서 뒤를 돌았다.
“할 말이 있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