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화. 마지막 기회
잠시 멍해 있던 우유도가 정신을 차리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슨 우유도?”
하지만 안보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눈빛은 정처없이 흔들리고, 우유도를 피하려는 듯 몸도 한껏 움츠렸다.
우유도는 이제 계속 연기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자신을 확신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결국 우유도도 원래 목소리를 냈다.
“어찌 알아본 거지? 안보여, 천도비경에서 이 우유도가 네게 한 짓이 참으로 인상 깊었던 모양이군!”
우유도 역시 인정했다. 안보여의 마음엔 절망이 차올랐다.
처음에 안보여는 착각했다고, 그저 실수인 척하려고 했다. 그럼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 부질없어졌다. 처음부터 그의 이름을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안보여는 어쩔 수 없이 비통한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우유도, 여기까지 도망 왔는데도 나를 쫓아온 것이냐?”
안보여는 우유도가 과거 복수를 위해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우유도는 저도 모르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네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이리 수고스럽게 움직일 정도로? 원래 널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날 알아봐 버렸으니 참 난감하게 됐네.”
거짓이 아니었다. 귀의를 만나러 온 우유도는 자신이 했던 이야기로 곽만의 신분이 들통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들통나도 상관은 없었다. 귀의도 아마 곽만을 건들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이는 분명 큰일이 걸린 일이었다. 만약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결과는 매우 끔찍할 게 분명했다.
우유도는 귀의 곁에 반드시 이목을 남겨둬야만 했다. 귀의가 혹시라도 헛짓거리할 가능성까지 대비해 둬야 늦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우유도가 직접 나선 일이었다. 그의 능력과 수법으론 별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허점을 남길 여지도 없었다. 그렇게 우유도는 곽만을 계속 귀의 곁에 두기 위해 안보여를 잡았다.
과거 곽만이 안보여가 무심의 곁에 개입하는 걸 저지하지 못했을 때, 그가 안보여를 처리해 달라고 우유도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유도는 곽만에게 그냥 내버려 두라며, 안보여를 살려 주었었다.
우유도는 천도비경을 무사히 빠져나왔고, 큰 세력과 힘이 있기에 안보여처럼 작은 인물은 이미 그에게 어떠한 위험성도 없었다.
또 당시엔, 안보여를 살려두면 혹시 또 나중에 그녀를 이용해 곽만의 혐의를 벗길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땐 그저 만약을 대비한 것에 불과했지만 오늘 실제로 안보여를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곽만이 네 사람인가?”
안보여가 비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와 곽만에게 속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로 멍청한 사람일 것이었다.
“그건 네가 관심 가질 바가 아니고. 난 싸우고 죽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무나 죽이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특히 너 같은 미인은 더더욱. 근데 지금 너 때문에 내가 참 난감해졌어. 자, 네가 한번 말해봐. 널 어찌해야 할까. 널 풀어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 여기 바다에 물고기 밥으로……. 하긴 그게 개미 밥보다는 낫겠지?”
안보여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날 풀어줄 거지?”
우유도가 담담히 말했다.
“내가 안심할 수 있는 이유를 대봐.”
안보여가 반문했다.
“약조는 지킬 건가?”
“네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안보여는 잠시 침묵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과거 동백을 도운 건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였어. 난 아들이 있어!”
우유도는 잠시 흠칫했다.
“아들이 있다고? 내가 알기로 넌 줄곧 혼자였는데?”
“내게 사내가 없었을 것 같아?”
우유도는 안보여를 한번 훑어보았다.
“하긴, 네 미모를 보면 당연한 얘기일지도. 나는 네가 사내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어느 여인에게 봄이 없었을까? 나도 과거 젊을 때 무지하고 충동적일 때가 있었지. 그러나 나중에야 그 사내가 나와의 관계를 밝히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다른 여인이 있기 때문이란 걸 알았어. 너무 화가 나서 난 그자를 죽여 버렸지! 하지만 그때 내 배는 이미 불러오고 있었어. 아이는 죄가 없잖아.”
“동백이 네 아들을 붙잡고 협박했나?”
안보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수행계를 종횡하다 보면 원한이 생길 수밖에 없지. 당시 내 힘은 그런 원한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어. 그때 난 아이의 안전을 위해, 다른 집으로 입양 보냈어. 나중에 아이가 자라 수행자질이 없는 걸 보곤 그냥 속세의 여인을 만나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사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이런 난세에 일반인이 얼마나 안전히 살 수 있었을까? 난세에서 생존하는 건 어렵지. 그렇다고 내가 나서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어. 그 때문에 권세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고, 동백에게 암중에 아들을 돌봐달라 부탁하게 된 거지. 동백은 그냥 내 친척이라고만 알지, 내 아들인지는 몰랐어.”
우유도가 웃었다.
“천도비경에 있었을 때, 그 지경까지 몰렸는데도 얘기를 안 했다고?”
“아무리 봐도 날 쉽게 놓아줄 것 같지 않았어. 그 상황을 모면하고자 자식을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어.”
우유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은 왜 밝히는 거지?”
“곽만은 네 사람이지. 그녀가 데려온 가짜 우유도는 아마 네가 안배한 것일 거야. 네가 성경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어. 하지만 지금 눈앞에 살아 있지. 그럼 죽은 건 그 가짜일 거야.
무심과 소유아 일은 나조차 뭔가 이상함을 감지할 정도니, 곽만이 모를 수 없지. 넌 분명 무심과 소유아의 비밀을 파악했겠지. 그러니 저번에 소유아를 잡아다 무심을 협박한 일에 분명 네가 얽혀있을 거라 생각해.
원색은 초려산장에서 문제가 생겼고, 넌 아직 살아 있지. 이것만 봐도 이미 많은 문제를 설명하고 있어. 최근 구성이 연달아 사라지고 있어. 그것도 분명 너와 연관 있을 거야.
지금 너 정도의 세력이면, 설령 나를 죽인다 해도 굳이 우리 아들까지 잡아 죽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귀의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면 아마 그들은 의도치 않게 구성에 대항하는 폭풍에 말려든 것이겠지. 만약 저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저들 사람으로 알려진 나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귀의와 무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네게 조종당하고 있었어. 내 생사는 줄곧 네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던 거지. 그런 상황에 오늘까지 날 살려준 것을 보면, 너는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야.”
사실 안보여는 우유도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말을 다 마친 뒤, 안보여는 우유도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도야,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도야의 노예라도 되어, 견마지로(*犬馬之勞: 윗사람에 대한 충정을 겸손히 표한 말)를 다하겠습니다. 살길만 열어 주시면 제 목숨은 오늘부터 도야의 것입니다!”
살기 위해, 안보여는 체면 불고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낮췄다. 안보여도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이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이 손을 놓친다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을 것이다.
“하하하! 정말 다시 봤어.”
우유도가 미소 지으며 뒤돌아 운희를 바라보았다.
“안보여의 아들 상황을 한번 확인해 봐주시겠어요?”
운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보여에게 주는 일종의 대답이기도 했다.
“강호를 거닐며 수많은 은원과 시시비비가 생겨났지. 다만 지금 내 앞에서 꿇은 그 무릎이 날 실망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우유도는 탄식하며 뒤돌았다. 그리고 천년만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끝없이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가라!”
* * *
초원 위.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후진군이 뒤통수를 쳤고, 제군이 반격을 가했다. 천군만마가 땅을 울리며 서로를 향해 죽일 듯 달려들고 있었다.
그렇게 양측 군대가 정면충돌하려는 그 순간, 돌연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끝없이 몰려들던 제군의 선봉이 밟은 땅이 무너져 내리며 길고 깊은 골을 만들었고, 뒤따르던 기병은 미처 멈추지 못해 서로 격렬하게 부딪혔다. 싸우기 위해 달려든 제군이 순간 큰 혼란에 빠졌다.
“죽여라!”
군기 아래 검을 뽑아 든 나조가 고함을 질렀다.
전방 기병의 충돌을 막기 위해 세워놓은 거마는 빠르게 옆으로 옮기고, 대량의 인마가 무너지지 않은 땅을 밟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제군은 지금 극도의 혼란에 빠져 후진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에 후진군이라는 날카로운 비수는 제군의 여기저기를 찔러 들어갔다.
후진군 중 포대를 짊어진 수많은 병사가 땅이 꺼진 곳에 흙이 가득 담긴 포대를 던져 넣었다. 방금 생겨난 골이 빠르게 메워지자, 후진군은 정면으로 구덩이를 넘고 밀고 들어갔다. 이제 포대를 짊어진 병사들이 미리 제군 속 깊이 비수처럼 파고든 병사들과 보조를 맞춰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전투였다. 나조는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진군 고품도 싸우기 싫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진국 조정과 기운종에서 드디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삼성이 기운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오상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독무허와 남도림은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진군은 대체 언제까지 시간을 끌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독무허와 남도림이 압박을 가했고, 오상도 딱히 그들의 행동에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호연무한은 다소 예상치 못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처음부터 고품의 전략은 명확했다.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고 시간을 끌어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진국은 급할 게 없으니, 아예 걱정도 없었다.
그런 진국이 갑자기 총공격을 감행했다. 고품도 원하지 않았지만, 상부에서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끄는 걸 허락하지 않아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고품은 상부의 압박을 버티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경거망동하진 않았다. 고품은 대군을 진격시키며 이미 반쯤 전멸한 후진군을 계속 주시했다.
고품이 암중에 수작을 부린 까닭에 여기저기서 노략질한 후진군 200만 병력의 군량이 하룻밤 사이 재가 되어버렸다.
후진군은 투항하고자 했으나 고품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끝내 후진군은 어쩔 수 없이 전면 후퇴해야만 했다. 계속 버티며 굶주림에 전의를 다 상실했을 때 진군의 공격을 받는다면, 분명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후퇴한 후진군은 제군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도망갈 사람은 다 도망치고, 결국 제군과 만날 때의 후진군은 무려 절반이 사라진 100만 명만 남아 있었다.
효월각이든, 사령관 나조든 배고픔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병사들이 탈영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모른 체했다. 군량이 없어 나누어 줄 밥이 없는데, 무슨 수가 있겠는가.
후진군은 제군에게 줄곧 구조 요청을 보냈고, 만나자마자 군량을 부탁했다. 제군도, 호연무한도 아주 곤란했다. 이건 누가 봐도 고품의 음모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구나 그 의도를 알 수 있는 양모(陽謀)라 할 수 있었다.
전쟁에 대한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후진군을 압박해 제군의 군량을 소비하게 하려는 의도임을 모르지 않았다.
한 번에 100만의 입이 늘었다. 제군이 가진 군량도 무한한 것이 아니니, 한순간 큰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방법이 있는가? 동맹에게 칼을 휘두를 게 아니라면, 저 100만을 다 죽여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군량요구를 거절할 때 배고픔에 눈이 벌게진 후진군이 무슨 짓을 할진 안 봐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