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화. 잘못 디딘 한 걸음
파도가 치는 끝없는 바다.
한 사람이 뭍으로 나와 약곡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잠시 후 바다에선 또 한 사람이 반쯤 몸을 드러냈다. 상반신만 물 위로 내보인 그는 바로 역용하고 뒤를 쫓은 오상이었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약곡 깊숙이 들어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 * *
다음날, 한 날짐승이 홀로 있는 섬에 내려섰다. 흑석은 등에 새장을 짊어지고 날아와 한편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그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오상에게 예를 올렸다.
“성존을 뵙습니다.”
오상이 담담히 말했다.
“약곡의 사람이었다. 상대방도 역용을 하고 있어 누군지 확인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약곡의 사람은 많지 않으니, 조사해 보면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절대 타초경사 하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흑석이 대답했다. 그는 새장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금시를 꺼내 밀서를 써 다리에 달고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날려 보냈다.
* * *
반나절이 지나, 누군가 바다에서 나와 해안가에 있는 흑석을 만났다.
잠시 대화를 나눈 후, 흑석은 다시 동굴로 들어와 오상에게 보고했다.
“성존, 우리 쪽 사람이 알아보았습니다. 요 며칠 약곡을 떠난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며칠 전 흑리의 제자 소천진이 잠시 외유를 나간 적이 있으나. 곧바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다만 요 며칠 자리를 비운 사람이 있는 것이 확실한데, 유일하게 의심스러운 사람은 바로 귀의 흑리였습니다. 흑리는 요 며칠 줄곧 약방에서 약을 조제하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다가, 어제야 얼굴을 보였다고 합니다.”
오상이 두 눈을 떴다.
“나도 그라고 예상했다. 흑리에게 다른 사람 몰래 조용히 나를 만나러 오라고 전해라.”
흑석이 깜짝 놀랐다.
“조웅가와 연관된 일입니다. 흑리가 그 일에 얽혀있으니, 이대로 그를 부른다면 타초경사 하지 않겠습니까?”
“흑리는 줄곧 우리에게 감시받고 있는 부외자였다. 예전 마교와 교류가 있을 때부터 문제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어 말려든 것이 아닌가 싶구나. 이런 시기에 그 혼자 다급히 성경을 다녀왔다. 그의 신분을 생각해 봤을 때 또 무슨 일이 있었겠느냐?”
흑석이 생각에 잠겼다.
“설마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서란 말입니까?”
“은희가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그를 직접 만나지 않으면 무슨 일인지 파악할 수 없다. 그는 문제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고, 딱히 기개가 있지도 않아. 그 정도 분수도 모르는 사람이면, 이대로 사라지게 해도 상관없겠지.”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흑석은 빠르게 동굴을 빠져나가, 약곡에서 온 천마성지의 이목을 만나 뭔가 명령을 내렸다. 그 역시 곧바로 흑석의 의도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빠르게 바닷속으로 스며들었다.
* * *
석양이 망망대해를 비출 무렵, 그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귀의가 있었다.
흑석을 본 귀의는 공손히 예를 올렸다. 하지만 속으론 우유도의 예상이 적중했다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야말로 신산(神算)이었다. 과연 천마성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다만 이렇게 빠를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배후의 인물은 이미 천마성지를 자신의 의도대로 끌고 다니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하긴 그러니 구성 중 여섯이나 처리했겠지. 귀의는 남몰래 감탄을 내뱉었다.
흑석은 수하에게 잠시 기다리라 손짓하고는 다시 귀의에게 명령했다.
“따라와라.”
귀의는 고분고분 그를 따라 섬 안에 있는 한 동굴로 들어갔다.
* * *
동굴로 들어선 귀의는 깜짝 놀랐다. 오상이 자신을 직접 찾아올 줄이야. 귀의는 얼른 포권을 하며 예를 올렸다.
“성존을 뵙습니다!”
오상은 귀의의 두 눈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귀의가 매우 거북해할 지경이 되어서야 오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경이 재미있더냐?”
귀의는 모른척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앞으로 성경에 가고 싶다면, 지금처럼 몰래 다니지 말고 그냥 내게 말하거라. 어째, 이제는 마교와 붙어먹었느냐? 성녀가 죽은 후, 마교와 더는 왕래하지 않을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귀의는 당황한 빛으로 다급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겉으로만 보자면, 누가 봐도 발각당한 것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알아서 말할 테냐, 아니면 내 당부의 말을 더 들을 테냐? 성경에 들어간 후에 어디로 갔느냐?”
귀의는 망설였다. 아주 많이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
귀의는 씁쓸한 얼굴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황택사지로 갔습니다.”
사실이었다. 흑석은 오상의 반응을 살폈다.
“호오, 황택사지에서 뭘 했느냐?”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오상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환자가 누구였느냐?”
“대나성존의 여식 나방비였습니다.”
나방비? 오상은 다소 의외였다. 그는 귀의가 은희 때문에 황택사지로 갔다고 추측했다. 중상을 입은 은희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리 짐작한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방비라니.
“나방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귀의가 고개를 저었다.
“심각하다면 심각한 문제이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입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세상에 네가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 있단 말이냐?”
귀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치료할 수 없는 병도 무궁무진합니다. 사람들이 모를 뿐이지요.”
“나방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
“아마 이번 생에는 다시 깨어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깨어나지 못해? 오상의 두 눈이 번득였다. 갑자기 요괴로 변해 남도림과 정면으로 대결을 벌였고, 그것이 마침 오상의 고민이 된 차였다. 그런데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고? 오상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하지 말고 확실히 말해보아라!”
귀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방비는 이미 혼수상태였습니다. 처음엔 저도 어찌 된 일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상태를 보니, 아마 큰 충격을 받았을 때의 증상 같아 보였습니다. 거기 있는 자들에게 물어보니 과연 나방비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나추가 나방비 부부를 인질로 잡고…….”
귀의는 요호족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상세히 전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흑석조차 탄식할 정도였다. 오상은 그 처량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은희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턴 줄곧 서글픈 안색을 하고 있었다.
모든 과정을 이야기한 귀의는 마지막으로 병증을 설명했다.
“너무 큰 충격을 받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무의식에 가둔 상태였습니다. 스스로 깨어나길 원치 않으면 제게도 방법은 없습니다.”
“깨어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것이냐?”
이것이야말로 오상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었다.
“완전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귀의는 요호족에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곤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깨어날 희망이 아주 희박합니다. 최소한 지금까지 봐왔던 환자 중 깨어난 사람은 없었습니다.”
“같은 증상의 환자를 본 적이 있느냐?”
귀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예전에 몇 번 접한 적이 있습니다.”
오상이 곧 흑석에게 눈짓을 보냈다.
흑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후 귀의를 찾아 어디서 본 환자인지 알아보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라는 신호였다. 지금 오상이 관심을 가지는 건 사건의 핵심이기에 지금 당장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오상이 계속 물었다.
“남천무방이 너를 데리고 들어간 것이냐?”
귀의가 고개를 저었다.
“성경에 들어가기 전, 저도 누가 저를 데리고 들어갈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만약 남천무방이었다면, 저도 승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남성존의 아들 남명이었습니다.”
오상이 멈칫했다.
“남명? 지금 그가 너를 부릴 수 있단 말이냐?”
다시 뭔가 망설이는 귀의를 보고, 오상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라! 사실대로만 말하면, 죄를 용서하마. 약조는 꼭 지킨다.”
귀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일이 좀 복잡합니다. 모든 건 잘못 디딘 한 걸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다만 저는 한 번도 성존께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일이면 천천히 말하면 그만이다. 난 인내심이 충분하다.”
귀의는 곧 한숨을 내쉬며 우는소리를 했다.
“모든 일은 제 불효막심한 제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 제자 무심은 제 문하에 들어오기 전부터 서로 연모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제국 황후 소유아입니다.”
흑석이 끼어들었다.
“성존 앞이다. 핵심만 이야기해라.”
그런 사소한 일은 진작에 모두 파악이 끝나있었다. 오상과 흑석은 무심과 무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기에 구구절절 들을 이야기도 없었다.
귀의가 탄식했다.
“흑석 장로님, 이 내용이 바로 핵심입니다. 그 문제가 바로 그 소유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상이 흑석을 저지했다.
“말하게 둬라.”
귀의는 허리를 한번 숙이곤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자 놈은 약곡을 나선 후,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소유아가 있다는 제경으로 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줄곧 소유아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야말로 철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제가 여러 번이나 혼내며, 정말로 원한다면 그녀를 데려와 주겠다고까지 하며 속세의 시시비비를 멀리하라고 했지만, 제자 놈은 그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며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직접 움직여 소유아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심지어 소유아 남편의 독까지 해독해줬지요. 바로 제국 황제의 목숨을 구했던 것입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제자 놈에게 의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없었다면, 정말로 내버려 두고 신경을 끊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안 듣던 제자 놈이 결국 사고를 쳤습니다. 일부 문제를 일으킨 건 말할 것도 없고, 결국은 그와 소유아의 관계를 아는 사람에게 찍혔습니다. 제국의 반란군이 제경을 공격할 당시, 누군가가 소유아를 납치했습니다. 그녀를 납치한 사람은 바로 남명이었습니다!”
귀의는 마치 생각하기도 싫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걸로 이번 일을 하라고 네게 강요한 것이냐?”
“아닙니다. 당시 저도 제경에 있었습니다. 당시 전 대원성존에게 어울리는 안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경에 큰 전투가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기에 그 안에서 찾고자 방문한 참이었습니다.
남명은 아마도 그 일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소유아를 납치해 무심을 협박했습니다. 막말로 제가 제자 놈을 아낀다는 것을 파악하고, 제게 수작을 부린 것입니다.
저는 줄곧 무심을 데리고 약곡으로 돌아와, 제 의술을 모두 제자 놈에게 전수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놈은 겨우 여인 때문에 돌아오지 않으니, 그야말로 화가나 미칠 것 같았습니다!
당시도 소유아가 납치되고, 다른 방법이 없자, 제가 달려와 약곡으로 돌아온다는 조건을 걸고 저보고 남명의 일을 한 번만 도와달라고 간청했지요.
성존, 저도 많이 늙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겨우 제 의발을 전수할 제자를 찾는데 그 재능이 참으로 아까웠습니다.”
오상이 담담히 말했다.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심정을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설마 원색과 연관이 있는 일이더냐?”
“만약 그 일을 승낙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미 남명에게 찍혔으니 그 일을 승낙하지 않으면 소유아는 말할 것도 없고 저와 제자 놈 목숨까지 위험해지겠지요. 그렇게 반쯤 정신이 나가 승낙하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남명이 시킨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대원성존을 어떻게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목표는 원비였습니다.”
흑석이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