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화. 불안
연국 황궁.
“폐하, 살려주십시오, 폐하, 살려주십시오!”
대내총관 전우가 빠르게 어서방으로 왔다. 그곳에선 한 한관이 황궁 시위들에게 이끌려 나오며 살려달라 울부짖고 있었다.
전우는 어서방 입구로 다가가, 그곳 시위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시위는 방금 그 환관이 어찌 된 일인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대답했다.
전우는 침묵했다. 상조종이 황제를 영왕 살해의 흉수로 지목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의 기분은 극도로 엉망이 되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냈고, 이미 많은 환관이 곤장에 맞아 죽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황제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환관들은 다들 전전긍긍하며, 황제를 볼 때면 마치 저승의 문지기를 본 것처럼 두려워했다.
전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안으로 들었다. 바닥엔 찻잔의 깨진 파편들이 널려 있었고, 주위엔 황제가 집어던진 다른 물건들도 수북이 널려 있었다.
서탁에 앉은 상건웅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지금 그의 심정은 최악이었다. 대체 상조종이 어쩌다 진실을 알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상조종이 사실을 공표했을 때, 연국 조정에서도 즉시 반박하는 내용을 공표했었다. 하지만 지금 상건웅의 심정이 이처럼 최악인 건, 상조종이 폭로한 진실 때문이 아니었다. 상조종이 효월각을 몰살시킨 수법 때문이었다.
부모, 형제의 복수를 갚고자 상조종은 그 일이 미칠 영향도 계산하지 않고 매우 큰 살계를 열었다. 복수를 향한 상조종의 결심과 의지를 생각하면 상건웅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시기에 자신을 흉수로 지목한 건 무슨 의도일까. 상건웅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있었다. 은연중에 두려움을 느꼈고,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이 있었다. 분명 상조종이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상건웅은 후회했다. 당초 상조종을 뇌옥에 가뒀을 때 그냥 죽여버릴 것을. 그때 상조종을 처리했다면, 지금과 같은 후환도 없었을 것이었다.
이윽고 전우가 조용히 상건웅에게 다가가 보고했다.
“폐하, 소요궁의 용 장문인과 영검산의 맹 장문인이 도착했습니다.”
상건웅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다들 왜 여길 찾아온단 말이냐?”
얼마 전 자금동 장문인이 황궁에 들어왔고, 상건웅은 즉시 그를 찾아가 만나고자 했다. 하지만 궁임책은 그와 만남을 거절했다.
그런데 이제 용휴와 맹선까지 나타났다. 이런 때에 3대 문파 장문인이 모두 모이다니, 상건웅은 다시 또 강렬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에 전우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소인이 알아보았습니다. 두 분은 한번 보자는 궁 장문인의 전서를 받고 방문한 것이라 합니다.”
궁임책은 바로 상조종의 배후였다. 궁임책은 또 뭘 하려는 것일까. 상건웅은 바로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세 사람을 만나봐야겠다.”
* * *
쭉 늘어선 공무방(公務房) 외부.
군무(軍務)를 책임지는 연국 대사마 상영충이 할 일도 없는 한량처럼 황궁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대사공 고견성이 있는 공무방에 들었다.
“큼큼!”
상영충이 헛기침으로 주의를 끌자, 서탁에 앉아 업무를 보던 고견성이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했다. 고견성도 미소를 지었다.
“왕야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그러다 상영충의 눈치를 살피던 고견성이 방에 있는 사람들을 물렸다.
모두가 떠나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상영충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내 상영충은 허리를 숙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3대 문파 장문인이 모두 모였소이다.”
“호오, 뭔가 할 말이 있나 보지요. 왕야, 그분들을 뵙고 싶으신 겁니까?”
상영충은 혀를 차며 다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이보시오, 고대인. 뭘 그리 모르는 척하는 것이오? 이런 시기에 3대 문파 장문인이 이곳으로 다 모였소. 이게 좋은 일이겠소? 나조차 알아차린 일을, 고 대인처럼 똑똑한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을 믿으란 말이오?”
고견성이 3대 문파 장문인의 방문을 모를 리 없었다. 상영충은 고견성이 황궁에 갖고있는 이목이 자신보다 훨씬 많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현재 상영충은 좀 어색한 처지라, 황궁에 너무 깊이 손을 뻗을 순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사람조차 아는 걸, 고견성이 모를 리 있겠는가.
“네? 뭘 알아차린단 말입니까?”
하지만 고견성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늙은 여우 같으니, 상영충은 고견성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상조종이 효월각을 도살했소. 아주 잔인한 수법으로 효월각을 멸문시켰지. 또 폐하를 흉수로 지목했소. 그 의도가 무엇이겠소? 하필 이런 시기에 3대 문파의 장문인이 여길 찾아왔소. 정말 조금도 걱정이 안 되오?”
고견성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생각이십니다. 3대 문파의 장문인이 폐하를 보기 위해 온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상영충은 눈을 크게 떴다가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이보시오. 고 대인! 내 앞에서까지 그리 모른 척할 필요 있소? 궁임책이 먼저 도착했소. 폐하께선 궁 장문인을 뵙고자 했지만, 그쪽에서 거절했다고 하오! 이 일을 모른다고 하지는 마시오.”
고견성이 짧게 탄식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상영충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요. 좋소, 고 대인! 아주 독하시구려. 그대가 이겼소이다!”
그대로 뒤돌아서는 상영충을 보고 고견성도 작별을 고하려는데, 상영충은 아예 의자를 끌고 와 앉아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몰랐다고 해도 이젠 알았잖소. 어찌할지 한번 말해 봅시다.”
고견성은 일순간 할 말을 일었지만,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궁 장문인이 폐하를 뵙지 않은 데엔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것이겠지요.”
“폐하가 3대 문파의 장문인에게 뵙길 청했을 때 거절당했던 적이 있소이까? 내 에둘러 말하지 않겠소. 고 대인과 난 폐하와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오. 일단 폐하께 문제가 생기면 우리 둘도 끝장이오.”
상영충이 팔을 크게 휘두르며 이야기했다.
짧은 침묵 끝에, 고견성이 물었다.
“폐하께서 왕야를 보내신 겁니까?”
“아니오. 폐하는 지금 세 장문인을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오. 상황을 파악하려 하시겠지. 우리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할 것이오.”
고견성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일단은 상황을 파악한 후에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그러자 상영충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고 대인, 우리 둘이 한 일을 생각하면 상조종은 우리 둘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뭔가 대책이 있다면 공유합시다! 본 왕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거든 편히 말씀하시오.”
이것이야말로 그가 고견성을 찾아온 진짜 이유였다. 상영충은 급한 마음에 달려왔는데, 고견성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너무 침착하게 공무를 보고 있었다. 이에 상영충은 고견성에게 무슨 대책이 있을 거란 생각을 했고, 문제가 생기면 고견성과 같이 힘을 합치려 하고 있었다.
고견성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상영충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다른 능력은 없으면서 위기는 기가 막히게 감지했다. 하긴, 애초에 이런 능력이라도 없었다면 그 수많은 황족 중 지금 위치까지 올라오지도 못했겠지만.
* * *
용휴와 맹선이 잇따라 황궁에 도착했다. 그들은 일단 황궁에 있는 제자들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는 바로 궁임책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한 제자가 뛰어왔다.
“장문인! 황제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지금 논할 일이 있으니, 일단 돌아가시고 나중에 만나자고 전해라.”
궁임책이 담담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자가 떠난 뒤, 용휴와 맹선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용휴가 먼저 천천히 말했다.
“궁 형, 지금 이건 폐하를 겁주려는 것이오?”
“내가 굳이 그럴 필요 있겠소?”
궁임책의 답에, 이번엔 맹선이 물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오. 어디 말해 보시오. 이리 급하게 우릴 부른 이유가 무엇이오?”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각 문파의 날짐승은 표묘각이 다 가져가서, 대 문파의 장문인이라도 말이나 마차를 타고 먼 길을 달려와야 했다.
다들 날짐승을 탈 때를 잊을 수 없었다. 3대 문파의 고위층들은 문파를 떠날 생각이 없지만, 어쨌든 현재는 일 처리 효율이 극히 낮아진 상태였다.
이윽고 궁임책이 대답했다.
“확실히 쉽지 않았을 것이오. 그래서 자금동이 아닌 이 경성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오. 이곳이 좀 더 가까우니까. 또 당연히 일이 있기도 하고. 남주의 상조종이 참 애물단지요. 효월각을 그런 식으로 멸문시켜 버리다니.”
용휴가 코웃음을 쳤다.
“연기하지 마시오. 자금동이 뒤에서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저들 속세의 범부들이 어찌 감히 효월각을 상대로 칼을 들이밀었겠소?”
맹선도 거들었다.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격이군. 우리 앞에서 그런 연기하지 말고 어디 한번 제대로 말해 보시오. 무슨 일이오?”
궁임책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겠소? 상조종이 무슨 짓을 했는지 두 분도 모두 봤을 것이오. 그렇소, 자금동은 저들이 효월각을 쓸어 버리는 걸 허락했소. 하지만 내가 왜 허락했는지 아실 것이오.
효월각이 뭐 하는 곳이오? 저들은 길들일 수 없는 자들이오. 저들을 굳이 자금동 영역에 받아들여 후환을 남길 이유가 있겠소? 마침 상조종도 효월각을 처리할 생각이 있으니, 자금동도 그 의견에 동조한 것뿐이오.
다만 생각지도 못한 건 상조종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거지. 이제 상조종은 상건웅에게 아비의 원한을 갚으려 하오. 사실대로 말하면, 상조종은 아예 병력을 일으켜 이 기회에 상건웅을 쳐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소!”
용휴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장식이오?”
“감히!”
맹선도 호통쳤다.
“감히 못 할 건 무엇이오? 복수하기 위해 이미 효월각을 멸문시켰소.”
궁임책의 말에, 용휴가 다시 발끈했다.
“당신들 자금동이 키우는 개요. 그것조차 통제하지 못한단 말이오?”
다시 궁임책이 말했다.
“상조종은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우리 자금동과의 반목도 두려워하지 않소. 그런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설마 지금 상조종과 반목하기라도 하란 말이오? 저 큰 영역이 모두 상조종의 것인데, 정말 상조종을 쳐낸다면 큰 혼란이 오지 않겠소? 두 분은 그 기회를 틈타 수작을 부리지 않을 것이오?”
용휴가 말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앞에서 주절거리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우리 앞에서 광대놀음이라도 하는 것이오?”
궁임책이 손사래를 쳤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오. 지금 상조종은 복수하겠다고 결심을 굳혔소. 하지만 자금동은 이런 시기에 연국에 혼란이 생기는 걸 원치 않소.
그렇게 우리 쪽에서 상조종을 겨우 설득해 타협을 봤소. 연국을 그에게 주면 상조종은 전쟁을 멈추고 평화롭게 일을 처리하겠다 했소.
그러니 오늘 두 분을 모신 건 그걸 의논하기 위함이오. 저 상건웅은 참으로 무능하기만 한 쓰레기요. 그러니 그냥 연국을 상조종에게 줘 버립시다. 그럼 여러분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 좋지 않겠소? 어떻소?”
용휴가 말했다.
“지금 장난하오? 자금동은 그 큰 영역을 차지하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참으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군?”
이때, 궁임책은 소매에서 종이 2장을 꺼내 한 번씩 훑어보고는 탁자에 올려놓고 살짝 밀었다.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한 뒤, 각자 한 장씩 들어 내용을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