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5화. 태양이 서쪽에서 뜨려나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내용을 본 두 사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용휴가 고개를 들어 싸늘한 눈으로 궁임책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궁임책은 찻잔을 들고, 천연덕스럽게 찻물 열기를 식히며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맹선은 용휴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두 사람이 든 물건이 비슷한 물건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보시오, 궁씨. 이걸로 우릴 협박이라도 하려는 것이오? 흥, 어림도 없지! 삼성께서는 과거 일을 불문에 부치겠다고 하셨소!”
그가 든 건 다른 게 아니었다. 과거 표묘각을 감찰할 당시 성경에 뭔가 보고할 거리를 찾기 위해 두 문파는 암중에 표묘각 인원을 붙잡았었고, 그 와중에 어쩔 수 없이 표묘각 인원 일부를 살해했었다.
물론 두 문파가 했던 나쁜 짓 모두가 종이에 적혀있는 건 아니지만, 궁임책이 일부 증거를 확보한 건 분명해 보였다.
궁임책이 이 증거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두 사람 역시도 당시 각 문파가 겉으로는 별말 없었지만, 사실상 사적으로 자신의 문파를 지키기 위해 대부분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내 궁임책이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런 말을 했었소. 하지만 그때그때 상황이 다르기 마련이잖소? 지금 삼성의 상황이 조금 어려울 뿐이고, 만약 나중에 상황이 안정된다면 두 분은 표묘각에서 정말 이 원한을 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으시오? 특히 이처럼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도?”
용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 자금동도 별로 깨끗하지는 않을 것이오.”
궁임책이 웃었다.
“하하!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말이오. 증거 있으시오? 난 표묘각에 보여줄 증거가 있소! 잘 알 것이오. 삼성이 상황을 안정시키기만 하면, 우리 자금동은 연국의 이익을 위해 이 증거를 표묘각에 진상할 수밖에 없소. 그럼 자금동도 표묘각이 여러분을 어찌할지 기대 가득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겠지. 두 분 모두 어디 도박을 해도 좋소!”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급기야 용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디 삼성이 상황을 안정시킨 다음에나 이야기합시다!”
맹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성은 여태 한 말은 지켰으니 최소한 지금은 우릴 건들지 않을 것이오!”
궁임책의 협박에 이토록 쉽게 당할 순 없었다. 지금 자금동 세력은 보통 크기가 아니었다. 후진국 절반을 집어삼켰고, 거기에 연국 내부 영역까지 더한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세력이었다. 이런 상황에 자금동이 연국 대권까지 쥐게 된다면, 두 문파는 이제 뭘 먹고 산단 말인가?
그때, 궁임책이 미소를 지으며 결정적인 무기를 꺼내 들었다.
“지금 자금동이 가진 영역을 소요궁, 영검산과 균일하게 나누겠소.”
두 장문인의 발걸음도 멈췄다. 둘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다 뒤돌았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오?”
용휴가 말했다.
“연국에 있는 영역, 후진국 절반의 영역을 모두 내놓아 경계를 다시 그리겠소. 우리 자금동이 더 많이 차지한 부분을 여러분과 균등하게 나누리다.”
그리고 궁임책은 두 사람에게 다시 앉기를 청했다.
두 장문인은 재차 눈을 마주쳤다. 도저히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최소한 무슨 의미인지 파악은 해야 했다.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맹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양이 서쪽에서 뜨려나. 자금동이 그런 호의를 베푼단 말이오?”
궁임책이 말했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소. 그대들이 우리 자금동에 후진국을 전부 내준 의도를 내 모를 것이라 생각했소? 우선은 당시 한국 압박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고, 상조종의 봉쇄에 결국 병력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겠지. 또한, 자금동에 서병관을 막게 하고, 자금동 홀로 진국 동벌을 방어케 하고, 당신들은 뒤에 숨어 우리 자금동의 힘이 깎여나가길 기다리려 한 것 아니오?”
고견성이란 내통자가 있는 한, 궁임책은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전략적 의도가 들킨 용휴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맹선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두 사람의 반응을 한번 살핀 궁임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만약 우리 자금동과 한국의 연합으로 진국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들과 한국이 손을 잡는다 한들 승산이 얼마나 있겠냐는 말이오. 하지만 우리 세 문파가 협력하고 연국이 일치단결한다면, 그리고 다시 한국과 손을 잡는다면, 승산이 얼마나 올라가겠소?
여기까지 이야기한 이상, 두 분은 우리 자금동이 그저 호의로 이러는 게 아닌,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거란 걸 깨달았을 것이오.
또 하나, 두 분도 물론 알겠지만, 만약 과거 남주에서 출병하지 않았다면 연국은 이미 한국과 송국의 손에 멸망했을 것이오. 그런 연국을 남주의 병력이, 바로 상조종이 구해낸 것이오.
상건웅이 당시 뭘 했는지 생각해 보시오. 발목을 잡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오? 연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무능한 인간이오. 과거 그를 황위에 올린 우리들의 눈이 삐었던 것이지!
상조종이 만약 무능한 인간이었다면, 우리 자금동이 이리 크게 지지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한국,송국과의 전투를 통해, 두 분도 상건웅과 상조종의 차이를 직접 보았을 것이오.
상건웅 일파의 사람들로 진국의 공격을 막겠다니, 정말 가능하리라 생각하시오? 당신들은 지금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오!
만약 우리 자금동이 쓰러지면, 당신들 두 문파도 곧 쓰러질 것이오. 난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구려. 꿈같은 생각에서 얼른 깨어나라고.
하지만 상조종은 다르오. 상조종 일파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봤을 것이오. 그가 연국을 호령해야만, 연국 병력을 지휘해야만, 진국과 싸울 자격이 생기는 거요. 그래야 우리 3대 문파의 이익을 지킬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고.
자금동이 이 큰 이익을 포기하는데 문중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쉽지 않았소. 하지만 그들도 결국은 받아들였지. 오직 대국을 위해서였소.
우리 자금동은 이리 큰 양보를 했소. 단지 상조종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서 말이오. 그런데도 두 분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그건 너무한 처사가 아니오? 상건웅 그 같은 쓰레기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소?”
그리고 궁임책은 서탁에 있는 종이 2장을 시원하게 찢어 버렸다.
“이건 내 성의요. 만약 자금동을 계속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다면, 우리 자금동은 절대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오.
서병관은 우리가 함락하기 어려운 곳이오. 하지만 상건웅 그 허수아비를 상대하는 건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일이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우리 자금동은 상조종과 같이 연국 내부를 먼저 쓸어 버릴 것이오!
제국의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왔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니, 두 분도 이젠 확실한 답을 줬으면 좋겠소!”
협박과 회유, 궁임책은 지금 협박과 회유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다.
용휴와 맹선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들 매우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이에 궁임책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기다렸다. 만약 두 사람이 승낙하지 않는다면 둘은 이제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순 없을 것이었다.
우유도의 태도는 명확했다. 삼성과의 결전이 마지막 핵심인 건 맞지만, 그 결전이 언제일지는 불투명했다. 기회의 주도권이 항상 우유도 손에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반드시 다른 길도 대비해야만 했다.
삼성이 속세의 세력을 이용해 천하의 판을 뒤엎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또한 천하 각 세력이 다시금 삼성에게 넘어가도록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러니 반드시 진국을 억제해야 하고, 만약 진국이 공격을 시작하면, 이쪽에서는 정면으로 진국에 대항할 속세의 힘이 마련돼 있어야 했다.
만약 소요궁과 영검산이 승낙하지 않는다면, 우유도 역시 더 이상 참지 않고 즉시 두 문파를 쓸어버릴 참이었다. 두 장문인은 물론, 숨어있는 원색의 세력도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문파와 휘하 세력이 타격을 입으면, 소요궁과 영검산은 더 이상 자금동에 대항하지 못할 것이었다.
물론 우유도도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진국에 대항하기 위해선 최대한 연국 수행자들의 힘을 보존해야 했다. 진국 쪽엔 서삼국 수행계 세력 대부분이 모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궁임책이 두 문파에 양보하는 것도 그로선 사실상 아쉬울 게 하나 없었다. 지금 배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궁임책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이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유도를 필두로 하는 세력이 승리하기만 하면 소요궁과 영검산도 먹은 것들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건 대국을 위함이 아니겠는가.
* * *
제국 황궁, 조당 대전 내부.
만조백관이 늘어선 가운데, 황제 호진이 옥좌에 앉아 있었다. 3대 문파의 장문인들은 대전 한 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전은 조용했다. 오늘 나올 의제가 무엇인지 다들 어느 정도는 추측하고 있었다. 성곽 아래, 진국 병력이 도착했으니 항복 여부를 논의해야 했다.
침묵을 지키는 이들 모두, 사실 단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그의 허락이 없다면, 그러니까 저 바깥의 60만 대군이 허락하지 않으면, 항복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과연 고품이 조정 신하들이 끝까지 항전하는 걸 두려워할까. 아니었다. 고품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건 바로 제국의 60만 최정예병이었다.
일단 60만 대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제국의 항복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럼 대전에 있는 대다수가 진군의 칼 아래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대전이 조용해서인지, 바람이 스치는 소리도 유독 크게 들렸다. 그렇게 정적을 가른 말발굽 소리에 대전의 모두가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호연무한이 도착했다. 갑주를 입은 그가, 황명을 받자마자 성 밖 군영에서 즉각 이 대전으로 달려왔다.
황제는 호연무한에게 황궁 안에서 말을 탈 수 있도록 특별히 윤허했다. 호연무한도 이번엔 그 특혜를 거절하지 않았다.
호연무한은 그렇게 1백 기병을 이끌고 거침없이 황궁으로 달려왔다.
이윽고 호연무한이 전마에서 내려 성큼성큼 대전의 계단을 올랐다. 사호도 말에서 내려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1백 기병 중 호연무한과 사호의 말고삐를 잡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저 삼엄한 얼굴로 상장군이 입조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대전에 도착한 사호는 측문에 섰다. 이건 선황이 호연무한에게 특별히 허락한 것으로, 호연무한의 호위인 사호는 언제든 호연무한과 같이 황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
곧이어 호연무한이 대전으로 들어와 옥좌 앞에서 포권으로 예를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호진은 조금도 비통함을 숨기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장군, 얼굴을 드시오.”
호연무한이 얼굴을 들었다. 그 또한 오늘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고 있었다. 3대대 문파는 이미 그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들은 항복하기로 했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더욱이 이곳에 있는 만조백관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호연무한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호연무한은 호진의 눈 속에 머무는 마지막 남은 한 줄기 기대를 보았다. 그 눈빛에 호연무한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항복하시지요!”
우렁찬 그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휘몰아쳤다. 모두의 예상을 완벽하게 비켜난 답이었지만, 다들 이제야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휙-
호연무한은 그대로 뒤돌아 허리춤의 보검을 움켜쥔 채 좌우를 둘러보더니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대전을 떠나려는 것을 보고, 호진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상장군!”
하지만 호연무한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문밖을 지키던 사호도 호연무한과 같이 떠나갔다. 호연무한은 그대로 말에 올라 궁문을 향해 달렸고, 1백 기마는 땅을 울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