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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826화 (925/1,000)

1826화. 단 한 줌의 후회도 없도다

황궁을 나선 호연무한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향한 방향은 성 밖 군영이 아닌, 호연 가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갑주를 벗지 않고, 손주들을 불러오게 했다. 아이를 품에 안고 한참을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손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내 손녀를 유모에게 넘긴 그가 두 손자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고는, 몸을 낮춰 두 손자를 꼭 안아 주었다.

긴 포옹 끝에 몸을 일으킨 호연무한이 모든 하인을 물렸다.

이제 마루엔 사호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호연무한은 그를 또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노호야, 네게 부탁이 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거라. 지금은 진국이 제경을 포위하고 있으니, 당장 떠날 순 없을 것이다. 내가 떠난 후, 넌 손주들을 데리고 성에 숨어있다가 기회가 오면 움직여라. 네 실력으로 여길 벗어나는 건 어렵진 않을 것이다. 어디로 갈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사호가 깜짝 놀랐다.

“장군, 정말 군대를 이끌고 끝까지 싸우시려는 겁니까?”

“3대 문파가 항복하려 한다. 만조백관이 모두 항복하려 한다. 어찌한단 말이냐? 제국의 가장 우수한 장정들을 죽음으로 내몰라는 말이냐?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 저들을 헛되이 죽게 할 이유가 있겠느냐?”

사호는 그의 대답이 더욱더 의문이었다.

“그럼 항복하기로 정하셨는데, 어찌 제게 아이들을 부탁하시는 겁니까?”

“만조백관이 모두 항복해도, 나는 항복할 수 없다! 내가 항복한다면, 내 명령을 받고 죽어간 수많은 제국의 장정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이냐? 나의 아들들은 내 말에 따라, 나라를 위해 죽었다. 내가 어찌 우리 아이들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다른 집안의 자손들은 항복해도 된다. 하지만 나 호연무한의 자손들은 절대 항복해선 안 된다. 그러니 네가 데려가거라.”

사호는 넋을 잃었다. 호연무한의 의중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장군! 진국에서 장군을 후대해 상장군의 자리를 유지하고…….”

호연무한이 손을 내저으며 사호의 말을 끊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탁하네!”

호연무한은 다시 당당히 걸어 사호의 옆을 스쳐 지났다.

사호는 그 자리에 멍청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호연무한을 너무 잘 알았다. 더는 무슨 말을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 * *

호연무한은 1백 기병을 이끌고 군영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장들을 불러 모아, 항복을 위한 절차를 밟아 나갔다.

조정과 3대 문파에서도 일을 처리할 사람들을 보내왔지만, 호연무한은 이미 모든 일을 안배했으니 이제 아래 장수들과 협조하라며 접견을 거절했다.

다들 지금 호연무한의 심정이 어떠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라서, 더 이상 그를 귀찮게 하는 이는 없었다.

호연무한이 다시 군막을 나섰을 때, 대군의 사기는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장병들은 더 이상 과거의 그 패기를 회복하지 못할 듯했다.

호연무한이 옆을 지나도 바닥에 앉아 있는 장병들 그 누구도 차마 고개를 들고 호연무한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내 호연무한이 묵묵히 장군 단상에 올랐다. 아무 말 없이 눈앞의 쓸쓸한 병사들을 눈에 담던 그가 갑자기 큰소리로 소리쳤다.

“이 호연무한의 무능하여 나라에 짐이 됐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챙!

호연무한과 늘 함께하던 허리춤의 보검이 뽑히고, 그대로 그의 목을 스쳐 지났다. 바람에 하얀 머리가 흩날리며, 비처럼 붉은 피가 떨어져 내렸다.

장병들도 순간 싸해진 분위기를 느끼고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털썩…….

단상 위, 천하를 호령하던 장수가 쓰러져 있었다.

“상장군!”

한 사람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상장군……!!!”

그 뒤로 모두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돌 하나가 수많은 물결을 일으키듯, 순식간에 비통한 곡소리가 폭풍처럼 천지를 울렸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진국 기병이 제군의 군영으로 밀고 들어왔다. 선두의 고품은 전마에서 뛰어내렸다가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이내 고품이 자신을 급히 부축하는 제국 대신을 밀쳐냈다. 부축은 얼어 죽을, 고품은 혹시 또 문제가 생길까, 제국 군심을 다독이러 달려온 참이었다.

고품은 신속하게, 또 한편으론 진중한 모습으로 단상에 올랐다.

그는 처음 호연무한의 부고를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호연무한의 죽음으로 인해 투항하기로 했던 제군이 반란을 일으킬까 봐 불안해진 것이다.

제국 조정도 매우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국 3대 문파도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급히 사람들을 보내 군대를 장악하고자 했다.

다행히 호연무한은 죽기 전 투항하라고 명령을 내린 후였다.

곧이어 고품은 호연무한의 시신을 마주했다. 주검이 된 그를 보니 절로 탄식이 나왔다. 고품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한쪽 무릎을 굽히고는 다시 또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격정적으로 말했다.

“하아, 이럴 필요까지 있는가! 호연 형!!! 정말 이럴 필요가 있었는가!”

고품은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렇듯 고품이 호연무한의 부고에 부리나케 달려온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호연무한의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제군 장병들은 조정 사람들이 호연무한의 시신을 건들지도 못 하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소 과한 요구를 했다. 고품이 직접 와 시신을 수습하고 호연무한의 장사를 지내길 요구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군은 명령에 따르지도, 항복하지도 않겠다고 공표했다.

제국 조정과 3대 문파는 당연히 저들의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고품의 신분과 지위가 어떠하던가. 한마디로 항복하기로 한 적군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위치였다. 여기서 고품의 말은 진국 조정이나 기운종보다 더 영향력이 컸다.

한마디로 고품은 진국 조정과 기운종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직접 시신을 수습하고 제사를 지내라니,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이로 인해, 항복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던 제국 조정 대신들이 그 요구를 한 장수들을 질책했고, 결국 문제가 생겼다.

분노한 장병들이 단칼에 그들을 죽여버린 것이다.

처음에 제국 3대 문파는 그들을 저지하려 했었다. 하지만 곧 주위 장병들이 정상이 아닌 상태라는 걸 발견했다. 만약 지금 저들을 힘으로 제압하면, 이 60만 대군은 반란도 불사할 듯했다.

그 때문에 제국 3대 문파는 감히 개입도 못 하고 다급히 물러났고, 조정 신하들이 장병들에게 죽임당하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고품이 깜짝 놀라 달려온 계기였다. 60만 대군의 곡성이 천지를 울렸다는 말을 듣고,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지금 저들은 작은 불씨 하나만 있어도 격렬히 불타오를, 마른 장작 같은 상태였다.

겨우 시신을 수습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 않은가? 진국 장병들이 싸우다가 수없이 전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 아니겠는가? 그에 고품은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승낙하고 빠르게 길을 재촉했다.

단상 아래, 장병들의 칼과 창에 짓이겨진 신하들 시신이 늘어져 있었다. 감히 그 시신을 수습하는 이도, 감히 질책하는 이도 없었다. 다들 혹시나 이 비분강개한 군대를 건드릴까, 그저 몸을 사리기 바빴다.

주변을 가득 메운 곡성 속에, 주검이 된 호연무한을 확인한 고품도 애석하고 가슴이 아팠다.

각자의 주인을 모시고 전쟁에서 맞서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호연무한은 고품의 존경을 산 남자였고, 고품이 늘 경외하던 적이었다.

이번 전쟁이 있기 전, 고품은 단 한 번도 호연무한에게 승리한 적이 없었다. 줄곧 호연무한에 얻어맞는 역할이었고, 하마터면 몇 번은 사로잡히거나 목숨을 잃을 뻔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고품은 줄곧 호연무한과 정면 대결을 피했다. 누가봐도 자신은 호연무한의 상대가 못된다는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번엔 대세를 선점해 호연무한을 산 채로 말려 죽였다. 오랜 세월 적수로 지낸 고품은 어느 정도 호연무한을 파악하고 있었다. 고품이 가장 걱정한 것도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호연무한이 끝내 그 강건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할까 걱정이 됐다. 그 여파로 60만 대군도 항복하지 못하게 될까, 고품은 직접 호연무한을 다독이려 했다. 급히 진국 조정에 서신을 보내, 만약 호연무한이 투항한다면 상장군 지위를 유지해 달라고까지 요구했었다.

진국 조정도 어리석지 않았다. 호연무한이 투항하기만 하면, 제국의 기개는 없어질 테고 앞으로 점령지를 평정하는 것에 큰 이득이 될 것을 알았다.

본디 천군은 얻기 쉬워도, 단 한 명의 장수는 얻기 힘들다는 말이 있었다. 만약 호연무한을 얻을 수 있다면, 동벌에 든든한 힘이 될 게 자명했다.

이에 진국 조정도 군말없이 고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국 상장군의 지위도 호연무한을 붙잡지 못했다.

60만 대군의 안위를 생각해 항복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호연무한만은 끝끝내 스스로를 버려가면서까지 죽어서도 항복하지 않았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던 고품이 몸을 일으켜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는 슬퍼하는 제군 장병들 앞에서 검을 뽑아 들고 하늘을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정중히 장례를 올려라!”

“상장군……!!!”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아래 장병들이 크게 곡하기 시작했다. 한 명이 무릎을 꿇자, 그 주위 장병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고, 곧 모든 제군의 장병들이 무릎을 꿇고 다시금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울음은 저 하늘 끝까지 닿을 듯, 온 천하로 번지고 있었다.

* * *

드디어 항복과 관련된 일이 처리되었다.

국면을 안정시킨 뒤, 고품이 가장 첫 번째로 한 일은 60만 대군을 여기저기 분산시키는 일이었다. 만약 그들을 한 곳에 몰아 놓았다가 누군가에게 이용당한다면, 끔찍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모든 일을 처리하고, 고품은 투항식을 거행했다.

호진이 이끄는 만조백관이 성을 나와 진국 조정을 대표하는 고품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호진을 선두로 백관이 고품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제국의 진국신기 정신주를 바쳐 진심으로 항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황제 호진은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고품은 진국을 대신해 제국의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큰 소리로 선포했다.

이 투항엔 좀 황당한 장면도 있었다. 항복한 제국 조정 인원들은 호연무한을 위해 상복을 입지 않았고, 오히려 고품을 선두로 하는 진군 장군들이 단체로 상복을 입고 그를 장사지낸 것이다. 참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항복을 받고 제경에 들어선 고품은 제국 황궁에 들어섰다.

그때, 한 장수가 달려와 고품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사령관님, 흑수대 사람들이 나서서 제국 황후와 황자를 데려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도 총관의 명령서를 가지고 있어, 저지하기 어렵습니다.”

“음?”

고품이 뒤돌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장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황후 소씨는 태학 소 도독의 친누이입니다.”

“호오!”

고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소 대인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엔 조정에 자신의 세력이 없어서 조정 신하들에게 큰 손해를 보았었지만, 이제 그는 조정의 수많은 대신과 아주 두터운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과거 누가 태학을 안중에 두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다들 그 소 대인에게 약점이 잡힌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었다. 대사마 자리에 있는 고품조차 소 도독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체면을 생각해 고 가의 아들을 태학에 넣어달라 청탁할 지경이었다.

그는 삼국이 전쟁을 벌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국과 싸울 때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소 도독의 공로가 적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친분도 나름 깊은 사이었다.

고품 역시 소 도독이 대단한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수대 장령 도 총관도 소평파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나섰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고품이 나서서 그들을 저지하긴 쉽지 않았다. 결코 좋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 총관은 폐하의 사람이다. 분명 폐하께서도 아시는 일이겠지. 흑수대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둬라.”

“알겠습니다!”

장수가 대답했다.

그렇게 황궁을 한 바퀴 돌아본 고품은 다시 밖으로 나섰다.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아서, 황궁에 자리 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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