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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845화 (944/1,000)

1845화. 태평성대가 온다면

원종이 잠시 침묵하더니 탄식을 내뱉었다.

“오랜 기간 같이 지내다 보니, 선생님께 천하를 경영할 능력이 있음을 알았소. 그런 선생님이 이곳에 몸을 숨기며 살아가는 게 참으로 안타깝소.”

「세상에 여유로운 삶보다 자유로운 것이 어디 있을까요. 세상이 어지러워 그리 살지 못할 뿐이지요. 만약 태평성대가 온다면, 전 모든 걸 잊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세상의 시시비비에서 멀어진 삶을 살고 싶을 뿐입니다.」

원종이 크게 웃었다.

“참으로 유유자적한 삶이군.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소.”

그러자 가무군이 고개를 저었다.

「비웃지 마십시오. 선생님, 기억하십시오. 이번 결전으로 천하의 운명이 결정 납니다. 분명 아주 위험할 것입니다. 비바람은 나타나는 것만큼 빠르게 사라질 것입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다음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원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사다난한 시기요. 노부도 없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섭정왕이 송국을 취할 때,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아직 저와 승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분명 따로 안배되어 있을 것이니, 저와 승상은 모두 평안할 것입니다.」

가무군의 생각은 정확했다. 우유도가 조웅가에게 보낸 서신에 이미 그 일을 안배해두었었다.

조웅가는 상청종의 장로 소석을 통해 이번 일을 안배했다. 엿새 후 상청종은 가무군과 자평휴를 데리고 잠깐 숨어들 예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종의 신분이 들통났다. 오상이 이곳을 찾아와 가무군을 죽일 수도 있었다.

원종도 생각해 보니 가무군의 말이 맞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가무군과 지내며, 그의 지혜에 여러 번 탄복했었다. 그런 가무군이 이처럼 여유롭고 담담한 것을 보면, 별일 없을 것이 분명했다.

곧 뒤를 돌아본 원종이 이쪽을 빤히 보고 있던 위충에게 손짓했다. 위충이 즉시 달려오자, 원종이 물었다.

“서신의 내용을 보았느냐?”

위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밀서의 내용을 해독한 자였다.

“난 곧 떠난다. 너는 선생님을 잘 모셔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위충이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원종은 거처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사실 챙기고 정리할 것도 별로 없었다. 그저 소매에 평소 가지고 다니는 물건 몇 개를 넣었을 뿐이었다.

다시 거처를 나왔을 때, 세 사람은 따로 작별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원종은 마당을 지나,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떠나갔다.

가무군은 의복을 정돈한 뒤,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는 나무 아래서 떠나가는 원종을 향해 천천히 허리 숙여 포권을 했다. 그만의 조용한 송별이었다.

이를 보고 위충도 마찬가지로 원종에게 예를 올렸다.

오랫동안 밤낮으로 같이 지냈다. 다들 심성이 나쁜 사람도, 사귀기 어려운 괴인들도 아니다 보니, 서로에게 정이 들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 * *

기운종, 누각 내부.

흑석이 빠르게 올라와 난간에 있는 오상에게 다가갔다.

“초려산장에서 보낸 서신을 중간에 가로챘습니다. 저들이 송국 승상부에 있는 원종과 성경에 있는 곤림수, 오풍, 왕존을 남주로 불러들였습니다.”

오상이 뒤돌아 물었다.

“왕존? 그가 누구냐?”

“아마도 사여래의 심복 왕존인 것 같습니다.”

오상은 매우 의외란 얼굴이었다.

“무량과는 사여래 자신조차 복용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 수하가 무량과를 복용했다고?”

그것만 생각하면 흑석은 속이 쓰라렸다. 소식을 접한 뒤, 그는 무량과를 훔친 이에게 욕을 퍼부었다. 얼마나 안목도 없는 자인가! 무량과를 그리 아무에게나 주다니, 자신은 그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흑석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구성의 심복 중 무량과를 얻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무량과를 훔친 이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이었다.

심복이라면 구성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들통나기도 쉬웠다. 사여래조차 무량과를 복용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흑석은 부러운 마음을 다 씹어 삼킨 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한 모습으로 보고를 올렸다.

“제가 성경의 모든 명단을 살펴보았습니다. ‘왕존’이라 불리는 사람은 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아마도 사여래 곁에 있는 그자가 확실합니다. 이런 시기에 성경에서 소환한 것만 봐도 분명 무량과를 복용했을 것입니다.”

“그들 4명을 제외하고 또 소환한 사람은 없더냐?”

“아직 다른 사람과 연락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여섯이 나서기로 해놓고, 서해당 등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은 걸 보면 나머지 여섯은 쉽게 신분이 들통날 사람임이 틀림없다.

저 넷을 제외하고, 서해당, 궁임책, 안돈천, 문화, 제갈지, 조웅가는 서신으로 확인된 사람이지. 이제 총 10명……. 아직 둘이 부족한데……. 초려산장은 중추다. 그 안에 하나둘 정도 숨어 있는 건 이상할 것도 없지. 아마 그 안에서 대상자를 추리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상은 직접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가며 계산해 보았다.

“영명하십니다. 초려산장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몇 명 되지 않습니다. 목표를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오상이 담담히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소환하지 않고, 이번에 여섯이 나서겠다고 했지. 넷이 모였으니 설마 나머지 2명은 아직 신분을 모르는 그 둘이란 말인가? 어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한번 봐야겠구나.”

오상은 모든 일이 끝난 후, 어떻게 일망타진할지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웠다. 그는 천천히 먼 곳을 응시하며 정광을 뿜어냈다.

남도림과 독무허, 그리고 저 초려산장의 잡귀들까지 소탕하면……. 천하는 이제 오상의 것이 될 터였다. 그의 평생 숙원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 * *

요마령, 마궁.

조웅가는 어둠에 잠긴 이곳에서 서신을 확인한 후, 곧장 가루로 만들었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뒤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서성이던 그가 창문을 열었다. 수행계 시장은 여전히 휘황찬란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드디어 떠나는구나!”

우유도는 서신에 며칠 후 이 요마령이 난장판이 될 것이라 밝혔다.

* * *

만수문.

서해당은 역대 선사들을 모신 사당을 찾아와 가지런히 놓인 위패들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우유도의 계획에 따라, 며칠 후 만수문은 지금 내부에 있는 표묘각 인원들을 모두 죽일 예정이었다. 그럼 이제 만수문도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만수문에서 자란 서해당은 이제 장문인이 되었다. 어쩌면 제 사욕을 위해 만수문을 사지로 이끌고 가는 것일 수도 있으니 죄책감이 없을 수 없었다.

* * *

영종, 정산(鼎山)을 파 만든 연단장(鍊丹場) 안이 열기에 들끓고 있었다. 크고 작은 수많은 단로(丹炉)가 흉흉한 불길을 내뿜는 흔적이었다.

이 산 안쪽으로 연결된 동굴에 장문인 안돈천이 있었다. 그는 안으로 난 노대에 서서 연단장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단로가 열리고, 정해진 약방에 따라 각종 약재가 들어가고 다시 봉해지길 반복했다. 저 아래, 수많은 영종 제자들이 바삐 움직이고, 그 사이사이 표묘각 인원들이 감독 중이었다.

안돈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연단장 내 크고 작게 반짝이는 불빛들……. 꼭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그도 이번엔 자신이 영종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돌아올 수 없는 사로(死路)일 수도, 감시라는 속박에서 벗어날 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안돈천 그 자신을 위해서도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 결과가 어떠하든,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영종은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최소한 영종 제자들을 모조리 죽이진 않을 터였다.

간단한 이치였다. 누가 천하를 차지하든, 여전히 수행자들이 있고, 영종이 제련한 영단 묘약이 필요했다. 만약 실패한다면, 이대로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은 그 한 사람뿐일지도 몰랐다.

* * *

천행종 뒷산.

문화는 동부 외부 절벽을 파내 만든 회랑 안길을 걷고 있었다.

눈앞의 풍경은 너무도 익숙했지만, 기분은 매우 낯설었다. 마음엔 아쉬움이 휘몰아쳤다. 최대한 지금 이 천행종의 풍경을 기억에 새기고 싶었다.

저 산속엔 정좌하고 앉아 수행하는 제자들이 보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이 높은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타인의 눈으로 지금 그를 비춰보자면, 조금 넋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대마다 역할의 색도 다르기 마련이었다. 본래라면 그는 이미 물러나 은거해야 했고, 문파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봉양해야 했다. 그는 결단코 문파에 해가 될 만한 일을 해선 안 됐다.

심지어 지금 천행종 장문인은 그의 사위이자, 제자였다. 자신의 사욕만을 위해, 종문을 사지로 몰아넣을 만한 일을 하는 게 정말 옳은 것일까?

하지만 이제 와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쩌면 우유도의 말에 겁을 집어먹은 것일 수도 있었다.

우유도는 이미 그들에게 신분이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유도가 오상을 살피던 와중에 발견한 사실이었다. 오상은 이미 초려산장과 이들이 무량과를 나눠 가지고 연락을 취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몰랐던 사이에, 이들 전체가 이미 오상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오상이 그들을 건드리지 않는 건, 남도림과 독무허를 죽일 생각 때문이었다. 일단 그들을 이용해 남도림과 독무허를 죽이고, 추후에 그들 나머지를 모두 일망타진할 계획이었다.

한마디로 남도림과 독무허만 처리하면 이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이용가치도 없으니, 오상이 단번에 이들을 처리할 것이란 뜻이었다.

다만, 지금 오상은 우유도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르며, 우유도가 역으로 그 계략을 이용할 것이라 밝혔다.

우유도는 일부 인원만 데리고 오상과 연합해 남도림과 독무허를 죽인 뒤, 나머지 인원과 힘을 합쳐 오상을 죽이기로 결정 내렸다고 했다.

문화의 고민은 커졌다. 왜 갑자기 들통난 것일까. 우유도는 더 이상 금시로 전서를 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직접 사람을 보내 서신을 전했다. 그렇다면 문화 역시 우유도에게 전서로 어찌 된 일인지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유도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도 없지만, 일단은 우유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유도의 계획을 따라가면 나중에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우선 서신을 가로채고자 보낸 오상의 사람을 잡기만 하면 모든 사실이 밝혀질 것 같았다.

본인이 들통났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오상과는 생사를 놓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오상이 죽지 않으면, 온 천행종이 그 때문에 멸문을 맞을 터였다.

“사부님!”

관문 제자 단선아가 매우 기쁜 듯 폴짝폴짝 뛰어왔다.

“사부님, 뭘 보고 계신가요?”

문화도 뒤돌아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걷고 있었다.”

문화는 다시 고개를 돌려 천행종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마음속 유일한 변명을 대어본다면, 이 모든 건 결국 자신만 위한 것이 아니라 천행종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것. 일단 성공한다면, 천행종은 또 다른 경지로 올라설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두가 그에게 감사해하지 않을까.

* * *

약곡, 해안가.

곽만은 파도가 치는 암석 주변에서 이런저런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었다. 그때 물고기로 변한 한 요수가 다시금 그녀의 발치에 나타나, 입속 서신을 뱉어내고 다시 빠르게 사라졌다.

곽만은 감쪽같이 서신이 든 납환을 손에 넣고, 한동안 해산물을 채취한 후에 그곳을 떠나갔다.

줄곧 곽만은 초려산장 쪽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안보여가 초려산장과 직접 연락할 방법을 가지고 돌아온 후에도, 곽만은 계속 이 비밀 연락 방식을 유지 중이었다.

이는 오상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는 안보여의 연락선은 파악했어도, 곽만의 연락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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