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화. 후일을 대비하여
초려별원, 밀실.
운희가 빠르게 다가왔다.
“곤림수, 오풍, 왕존이 도착했어. 지금 남주부성 밖에서 원종과 만났어.”
우유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으로 다가가 지도 한 장을 뜯어냈다. 그리고 다시 서탁으로 돌아와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붓으로 지도 한 구역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붓을 내려놓은 우유도가 운희에게 지도를 건넸다.
“그들한테 이 지도를 전해주세요. 그리고 일단 진국의 이곳에 가서 우릴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 지금 뭔가 의문이 있더라도, 나중에 나와 만나면 답을 해 줄 것이라고 전해주시고요.”
운희가 눈을 크게 떴다.
“같이 가는 거 아니야?”
“사람이 너무 많으면 눈에 띄기 마련이지요. 나눠서 움직입시다. 우린 먼저 들려야 할 곳도 있어요.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예요.”
운희는 별말 하지 않고 우유도의 지시를 이행했다.
잠시 후, 운희가 다시 돌아오니 여무쌍도 우유도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엔, 등에 삼후도를 짊어진 원강이 나타났다.
“모두 처리했어요. 시간이 되면 원방이 집행할 거예요.”
우유도가 고개를 끄덕이곤 운희에게 말했다.
“왕부 쪽으로 통하는 통로를 열어 주세요. 지금쯤 군주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군주? 운희는 여전히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저 우유도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녀는 먼저 밀실을 빠져나가 지하도 한쪽 끝으로 가선, 벽에 손을 댔다. 이윽고 흙이 다 밀려나며 길이 만들어졌다.
일행은 빠르게 왕부 아래 있는 밀실에 도착했다.
* * *
등불이 켜진 밀실에 은아가 앉아 뭔가를 먹고 있었다. 그 곁엔 남약정과 상숙청이 조용히 기다리다가, 발소리를 듣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유도 일행을 보고, 두 사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도야.”
입에 음식이 가득한 은아도 우유도를 보곤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도도!”
우유도도 싱긋 웃어주곤, 남약정에 물었다.
“준비는 다 끝났소?”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부대로 준비됐습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우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여긴 당신이 계획대로 처리하시오.”
“알겠습니다!”
남약정이 포권을 했다.
우유도는 다시 뒤돌아 상숙청에게 말했다.
“그럼 우린 이만 움직이지요.”
그리고 또 은아에게 손짓했다.
“은아, 가자.”
“어딜?”
찬합을 껴안고 있던 은아가 몹시 궁금한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가면 알 거야.”
우유도가 은아의 팔을 잡았고, 상숙청도 우유도와 같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은아는 그제야 발버둥을 멈추고 찬합 속 음식을 먹으며 걸었다.
운희는 제일 앞에서 길을 열었다. 그녀의 힘으로 지하에 구멍을 하나 만들고, 일행은 그 안으로 이동했다.
남약정은 뒤에서 포권을 하며 일행을 배웅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모두 다 사라진 후에야 손을 내리고, 긴 한숨과 함께 홀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 * *
일행이 밖으로 나오니, 낯선 광경이 비췄다. 깊은 산속 어딘가였다.
은아는 여전히 뭔가를 씹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운희와 원강은 지령을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날짐승 2마리가 날아왔다.
우유도는 은아와 원강의 팔을 잡고 한 날짐승 위에 올라탔고, 운희는 상숙청과 여무쌍의 팔을 잡고 나머지 한 마리에 올라탔다.
그렇게 두 마리 날짐승은 일행을 태우고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 * *
창오현은 남주부성에서 가까운 거리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날짐승을 타고 움직이면, 남주 안에서는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었다.
공중에서 창오현 성 밖에 있는 영왕 별원을 확인한 우유도는 산 중턱 한 곳을 가리켰다. 두 날짐승은 곧장 그의 명을 따라 협곡 속으로 하강했다.
일행이 날짐승에서 뛰어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숲속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조웅가였다.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눴지만, 우유도는 그 외엔 별말도 없이 원강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고는 나머지 일행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전에 한번 왔던 곳이었다. 운희도 이젠 우유도가 왜 여길 찾아왔는지 대략이나마 짐작이 갔다. 이곳은 운희와 우유도가 함께 방문했던 곳이었다. 운희는 저도 모르게 상숙청에게 힐끗 눈길이 갔다.
곧 우유도가 손짓하자, 운희는 법력을 이용해 일행을 데리고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음산한 지하 수로 근처로 내려갔다.
멀리서 지하 폭포의 굉음이 들렸다. 조웅가는 월접을 날려 주위를 밝히며 매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우유도, 우릴 왜 여기로 데려온 것이냐?”
상숙청도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이곳이 어디인지 가늠해보았다. 여긴 영왕 별원 아래 있는 비밀통로가 아니던가?
우유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동곽 사형이 비밀리에 준비한 후수(後手)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조웅가는 곧장 우유도의 뜻을 이해하고, 급히 뒤를 돌았다.
“뭐라? 확실하더냐?”
후수? 여무쌍의 두 눈도 번득였다. 그녀는 우유도가 지칭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일행이 이리도 수상쩍은 모습으로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일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상숙청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우유도가 말하는 동곽 사형이 바로 상청종의 동곽호연을 지칭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운희는 당연히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조웅가 역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확인했습니다. 이미 봉인지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우유도는 상숙청을 힐끗 바라보았다. 조웅가의 시선도 자연히 상숙청의 얼굴로 향했다. 비로소 우유도가 그녀를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
“저 두 여인은 사숙에게 맡기겠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잘 보호해 주십시오. 문제가 없다면, 닷새 안에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돌아오지 못하면, 나중 일은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봉인지의 물건은 사숙이 알아서 하십시오.”
또 우유도는 손을 들어 여무쌍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수씨는 제가 암중에 움직이는 세력들의 연락 방법을 잘 알고, 머리도 비상하니 알아서 의논하고 움직이면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가무군은 상청종의 손에 있을 겁니다. 가무군을 다시 데려오십시오.
또 진국 쪽에 소평파도 있지요. 줄곧 소평파를 숨겨 놓은 건, 여러분들을 위해 남겨둔 것입니다. 가무군과 소평파가 각기 밝은 곳과 어두운 곳에서 움직인다면, 효과는 엄청날 겁니다. 그들에게 충분한 정보만 제공해줘도 그들의 머리라면 저보다 못하진 않을 겁니다. 더 뛰어날 수도 있겠지요.
거기에 제수씨의 식견과 파악하고 있는 정보, 또 동곽 사부가 남겨둔 봉인지물(封印之物)이 있다면, 아마 다시 기회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우유도가 여무쌍을 이곳에 데려온 진짜 이유였다.
세상엔 단순한 무력만으로 불가능한 일도 있었다. 우유도는 이번에 떠나며,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경우도 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찍이 가무군을 이용해 진행한 수많은 일은 바로 만약의 상황에 가무군을 이쪽 편에 설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소평파에게 한 일도 마찬가지였고, 여무쌍이 초려산장에서 각지의 올라오는 소식을 접하게 한 것도 만약을 대비한 우유도의 의도였다.
우유도가 사전에 해놓은 모든 일은 조웅가를 도울 사람들을 남겨 놓기 위함이었다. 그가 떠나고 난 뒤에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우유도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상청종의 제자임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모든 걸 조웅가에게 전하는 것은, 바로 상청종을 위한 퇴로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조웅가를 통해 가무군의 은신처를 마련한 것도, 바로 상청종을 지키는 동시에 조웅가가 상청종의 은신처를 쉽게 찾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우유도는 이렇듯 모든 걸 안배해두었다. 이제 정말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해도 아무 미련도 없었다.
이 지하엔, 이미 죽어간 동곽호연을 포함해 상청종 제자들이 대를 걸쳐 분투하고 희생한 목표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외부인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조웅가는 듣자마자 그 깊은 뜻이 헤아려졌다.
과거 그는 달빛 아래서 우유도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당시 우유도는 그와 자신 중 한 명만 살아남아도 상청종 향불은 끊기지 않을 거라 했었다.
조웅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우유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입술이 자꾸만 달싹이고 있었다. 감정에 격랑이 일고 있는 듯했다.
우유도가 계속해서 당부를 이어갔다.
“한가지 주의할 것은, 소평파는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행동이 극단적이지요.
다만 여태껏 그를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 마음에는 천하 창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선(善)하기도 하며, 악(惡)하기도 합니다. 사람이기도 하고 귀신이기도 하다고 해야할까요.
그러니 소평파는 끌어들이되 반드시 조심해야 합니다. 일단 그에게 기회를 주면 그는 수행자를 모두 죽이려 할 것입니다. 상청종도 물론이고요.
반면, 가무군은 보다 인의(仁義)하고 온화한 사람이지요.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려 하며, 문제가 없으면 홀로 유유자적하기를 원하지요. 야심이 별로 없는 자입니다.
하지만 가무군이든, 소평파든 일단 기회가 있으면 천하 수행자들을 내버려 두려 하지 않을 겁니다. 손을 쓴다면 그 수법도 아주 잔혹하겠지요. 그러니 저들 두 사람과 어찌 지낼지는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마전에 제5 영역과 관련된 사실이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들과 절충할 수 있을지 역시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제가 만약 돌아오지 못하면, 거기까지는 신경 써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조웅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동곽 사형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나. 이는 상청종의 복이다!”
우유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치켜떴다.
“쓸데없이 그 사람 얼굴에 금칠하지 마십시오. 이 일이 끝나면 전 상청종에 인의를 다한 것이니, 더는 상청종에 빚진 건 하나도 없을 겁니다.”
순간 조웅가가 막 뭐라고 입을 열려는데, 우유도는 조웅가가 뭐라고 할지 충분히 예상한다는 듯 급히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도리와 이치에 대해 설교하시려거든 그만두십시오. 알고 싶지 않습니다.”
조웅가도 입을 다물었다.
그때, 여무쌍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요? 확신이 없다면 모험하지 마세요!”
지금 진행되는 구체적인 일들은 우유도와 원강 모두 여무쌍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무쌍은 더더욱 우유도가 매우 위험한 일을 하려는 것이라 추측 중이었다. 거기에 지금 우유도가 후일을 대비하는 것까지 보았으니, 의심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상숙청 역시 우려가 가득했다.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지금 우유도가 자신의 죽음 이후를 대비하고 있음을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숙청이 나설 자리가 아니기에, 속으로만 조급해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은아는 어차피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니, 마냥 천진한 얼굴로 책가방에 가득한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녀에겐 세상에 먹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도 이미 그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내 우유도는 여무쌍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일은 십중팔구 확신이 있습니다. 나도 아무런 확신 없이 이런 짓을 하지는 않지요.”
“그럼 그런 쓸데없는 말을 왜 하는 거죠? 도야가 죽겠다면 막지 않겠어요. 하지만 제 사내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할 거예요.”
조웅가는 의아한 얼굴로 여무쌍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 여인은 누구고, 이 여인의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
“모든 일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지요. 삼성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만약도 대비하는 것이지요. 됐습니다. 이미 결정 내렸습니다. 어차피 당신도 날 막을 수 없으니, 그냥 안배한 대로 따라주세요.”
“당신…….”
여무쌍은 매우 분노했지만, 정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