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화. 서무 태상
“무슨 소리지?”
산 정상에 있던 흑석은 매우 놀라 하늘을 올려보았다. 마치 귀신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 들린 호랑이 울음은 그만큼 엄청난 여파가 있었다.
웅웅~
귓가엔 여전히 나른한 호랑이 울음소리가 맺혀있었다.
우유도는 칼자루 위에 올려둔 양손을 움켜쥐었다. 그도 긴장이 되었다. 소리만 듣고도 원강이 공격을 개시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지금 원강이 적과 정면으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개를 든 운희 또한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발아래 무수히 많은 닭 뼈를 쌓아가며 닭 다리를 뜯고 있는 은아도 멍하게 고개를 들고 꿈틀거리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녀가 먹는 것도 마다한 사건이 생긴 것이었다.
산 정상 주변에 있는 천마성지 인원들도 크게 놀란 얼굴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공포에 물든 기운종 제자들도 서로를 돌아봤고, 태숙비화 등은 그야말로 너무 놀라 숨을 쉬는 것도 잊은 듯했다.
멀리 있는 참새는 놀라 거칠게 날아올랐고, 작은 동물들은 사방으로 도망치며 구멍으로 파고들고, 땅 위 벌레들은 둥지에서 뛰쳐나와 발버둥을 쳤다.
저 먼 하늘 위, 주변을 순찰하던 거대 날짐승은 통제도 안 될 정도가 됐다. 날짐승에 탄 자가 지령을 아무리 흔들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그들도 통제 없이 날뛰는 날짐승 등에 딱 붙어 버틸 뿐이었다.
첫 번째 호랑이 울음소리는 너무도 장렬했다. 두 번째 호랑이 울음소리는 먹먹했으며, 세 번째 호랑이 울음소리는 마치 귓가에서 태어난 것만 같았다.
태숙비화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바로 원영기 경지란 말이오?”
그 얼굴에 은은한 부러움이 떠올랐다.
* * *
한 돌문 안 석실.
가부좌하고 석대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돌연 두 눈을 번쩍 떴다. 혼탁한 노안 사이로 정광이 번뜩였다.
“와호가 깨어났다……. 이것은 환상인가 꿈인가. 내 생각과 마음이 다르니, 정녕 꿈인 것인가?”
우르릉!
석문이 열리고, 안에서 한 인형이 나와 계단에 섰다. 옷은 불처럼 붉어도 그 머리와 수염은 이미 눈처럼 희고, 얼굴은 고동색을 띠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다가와 하얀 머리칼과 수염을 흔들고, 옷자락도 한번 간질이며 지났다.
한마디로, 그는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신선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때, 밖에서 당직을 서던 기운종 제자가 뒤를 돌았다. 그도 한참 먼 곳에서 일어난 소란에 넋을 놓았다가 인기척 소리에 정신이 든 것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기도 잠시, 그는 다시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아니, 죽다시피 한 사람이 갑자기 왜 나왔단 말인가!
밖에서 당직을 서던 제자들도 급히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서무(西無) 태상(太上)을 뵙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입적을 바라던 참이다. 잡념조차도 드물었지. 아마도 내가 환청을 들은 것 같구나. 지금 무슨 일이 있느냐?”
한 제자가 보고했다.
“누군가가 우리 기운종에서 싸움을…….”
사실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는진 알지 못했고,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만 보고할 따름이었다.
* * *
“멸생(滅生)!”
꿈틀거리는 먹구름 사이에서 오상의 웅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염멸생장의 그 거대한 손바닥이 독무허를 향해 휘둘러졌다.
“흥!”
독무허는 냉소 지으며, 찰나의 순간 몸에서 거대한 빛줄기를 뿜어냈다. 그 들쭉날쭉한 빛줄기는 곧바로 거대한 손바닥에 박혀 들었다.
쾅!
손바닥이 터져나가며, 오상은 즉각 뒤로 물러났다. 고개 숙여 몸을 살펴보니, 독무허의 빛줄기에 찔려 10여 군데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 무서운 건, 독무허의 빛줄기에 부식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치지직-
오상의 상처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그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내내 수상쩍은 모습으로 숨어 있던 오상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독무허는 당연히 오상을 쉽게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지치지 않고 계속 공격을 감행했다.
오상도 다소 의외였다. 독무허가 무변마역을 벗어나지 않고 이 자리에 멈추어 설 줄은 몰랐다. 독무허는 틈이 생겨도 뛰쳐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오상은 이미 무변마역을 안정시켜둬서, 여기서 괜히 독무허와 쓸데없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대로 몸을 날린 오상은 다시 검은 안개 사이로 사라졌다.
독무허는 즉각 오상을 뒤따라 들이닥쳤다가, 벌써 사라진 오상을 확인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오상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과 한번 손속을 겨루더니 또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분노한 독무허가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겁쟁이 오상아, 당장 튀어나와라!”
검은 안갯속에 서 있던 오상도 그 도발을 들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연히 지금 나서서 그와 단독으로 싸울 생각도 없었다.
지금 독무허의 능력이면, 오상은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할 테고 그리되면 무변마역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그럼 독무허는 당연이 이곳을 탈출하고, 앞으로 독무허를 붙잡는 건 아예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이내 오상은 여전히 연기를 피우며 크기를 불리는 몸의 상처를 보다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퍽퍽-
움직임과 동시에 상처의 피와 살들이 터져나갔다. 그렇게 상처의 부식 작용을 하던 물질을 없애니, 피범벅이 된 깨끗한 상처만 남았다.
확실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주 고통스러웠다. 육신이 부식될 때는 그 고통을 차마 형언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상의 얼굴은 내내 무표정했다. 과거에 겪었던 일들과 비교하면, 이런 고통쯤은 얼마든 견딜 수 있었다.
오상은 다시 독무허를 무변마역 속에 꽉 붙잡아 놓았다. 그리곤 안개를 꿰뚫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원강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와호가 깨어나면 천하무적이라…….”
처음 저들이 날지도 못하는 원강을 무변마역으로 데려온 것을 보고, 그가 바로 숨겨진 살초라 추측하곤 있었다. 추측은 결국 실제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원강이 단 일도로 남도림을 참살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그의 칼질은 천하에 그 아무리 견고한 것도 무참히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상은 그 충격적인 장면에서 아직도 헤어나올 수 없었다.
남도림의 시신은 아직 무변마역 안에 있었다. 이제 오상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느껴졌다. 죽음은 확실했다. 남도림은 이미 죽어 더는 죽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세상을 떠난 뒤였다.
곧이어 오상이 손을 휘두르자 남도림의 시신이 무변마역 밖으로 튕겨 나갔다. 괜히 무변마역 안에 쓸모없는 것을 두어 법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 * *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다시 또 움직임을 보였다.
우유도 등은 저 안의 사정을 모르니, 시종일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반면, 기운종 등은 우유도 일행처럼 긴장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는 그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무언가 이곳으로 날아왔다. 꼭 짙은 색채를 띤 불길이 날아온 듯했으나, 실체는 하얀 백발에 고동색 피부를 가진, 붉은 외투 차림의 노인이었다.
그는 일행 옆에 내려서 하늘의 꿈틀거리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순간 태숙비화 등은 깜짝 놀랐다. 그가 어째서 여기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또 곰곰이 생각하니, 저 위의 싸움 소리에 나왔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태숙비화를 선두로 사람들은 즉각 나란히 서서 예를 올렸다.
“서무 태상을 뵙습니다!”
서무선(西無仙), 노인은 바로 기운종에 있는 스물여덟의 태상 장로 중 하나였다. 그에게는 기운종의 제일 대장장이라는 칭호도 있었다.
여러 변고를 겪으며, 이제 스물여덟이던 태상 장로 중 공석이 생겼지만, 이 태상 장로는 여전히 기운종이 가진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서무선은 기운종에 몇 없는 외성 태상 장로 중 하나로, 기운종에 있는 태상 장로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과거 종곡자와 비슷한 상황일 수 있지만, 사실 더 깊이 들어가면 종곡자보다 더한 상황이었다. 천수는 이미 예전에 지났으니, 제자들 눈에 그는 이미 죽은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지금 서무선은 오랜 시간 수행으로 쌓은 마지막 정기신으로, 그저 억지로 육신을 붙잡고 있었다. 이미 폐관에 들어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오래라, 사실상 죽은 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자가 이렇게 갑자기 뛰쳐나왔으니, 다들 놀라지 않겠는가.
“어찌 된 일인가?”
서무선이 하늘에 있는 꿈틀거리는 먹구름을 바라보며 물었다.
태숙비화는 주변을 살피며 외부인이 없는 걸 확인한 뒤 그에게 다가갔다.
“태상, 남도림과 독무허가 오상과 저기서 격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누가 내 삼후도를 사용하였는가?”
이어진 물음에,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쁘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다 곧 뭔가를 깨달았다. 조금 전 들린 소리, 바로 3번의 호랑이 울음이었다.
“태상의 뜻은 방금 그 울음이 바로 삼후도로 인한 것이란 말입니까?”
태숙비화가 물었다.
“와호가 깨어났네.”
노쇠한 서무선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다들 이제야 서무선이 뛰쳐나온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아직도 삼후도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사실 기운종에서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과거 서무선은 삼후도를 제련에 내고, ‘천하무적’이라는 등 광언을 내뱉는 금기를 범했다. 그 때문에 기운종에 적지 않은 문제를 불러왔고, 종문으로부터 질책과 서러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후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났는가. 벌써 시간에 다 묻혀버린 일을, 꺼져가는 목숨 한 줄기 겨우 붙잡고 사는 노인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휘익! 퍽-
그때였다. 먹구름 사이로, 두 동강 난 시신이 날아와 떨어졌다.
우유도 일행은 그쪽을 살피다 흠칫하더니, 곧 크게 기뻐했다.
남도림, 남도림이 죽었다.
우유도와 운희는 눈빛을 교환했다. 양측 모두 큰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원숭이의 칼질이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기운종 쪽도 관심을 보였다. 싸움이 벌어지는 먹구름 사이에서 시신이 떨어져 내렸는데, 그들이라고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법안을 열어 멀리서 시신을 살펴보다가, 그 얼굴을 확인하고 대경실색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천남성존입니다!”
최근 남도림은 수시로 기운종을 방문했고, 그로 인해 기운종 고위층들도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죽은 이가 남도림이라는 것을 듣고, 서무선은 법안을 열어 갈라진 남도림의 상처를 빤히 노려보았다. 이내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와호가 깨어났다!”
서무선은 홀로 중얼거리듯, 뭔가 선고를 내리듯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다들 빠르게 그를 돌아보았다.
“태상의 말씀은 천남성존이 삼후도에 참살당한 것이란 말입니까?”
태숙비화가 가슴이 철렁한 얼굴로 물었다.
* * *
거칠던 원강의 숨도 안정되었다. 곤림수 등 다섯은 다시 그를 에워싸고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원강을 보는 눈빛들은 마치 괴물을 보는 듯했다.
원강이 싸우는 걸 처음 본 이들은 이제야 우유도가 원강을 주공으로 내세운 이유를 깨달았다. 무려 원영기 수행자들이 보조로 전락했지만, 원강은 과연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다.
원강은 단 일도에 남도림을 참살했다. 그 장면은 이들의 머릿속을 내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부근의 안개 속에서 오상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는 심각한 낯으로 원강의 상황을 주목하고 있었다.
“독무허가 남아 있다. 시작해도 되겠느냐?”
오상은 이번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은 오상이 입은 상처를 보지 못했다.
자연히 5명의 고개가 원강에게 향했다. 계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원강에게 물어야 했다. 이내 원강은 오상의 흐릿한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진행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