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화. 함정이다!
상조종은 빠르게 지도 앞으로 다가가, 지도 위 몇 군데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몽산명과 짧게 의논하곤 즉시 장수들을 모아 회의를 진행했다.
명목은 회의지만, 사실상 전군 철수 명령이었다.
장수들은 몹시 의아해했다. 왜 난데없이 철수해야 하는 건인가? 하지만 상조종은 괜히 입 아프게 설득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철수 방법은 산개해 후퇴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군이 산개한다고 해도 보통 규모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1만 단위가 넘었다.
그래도 상조종은 각 부대 사령관들에게 최대한 신분을 숨긴 채 피신했다가 흩어져 군을 이끌고 지정된 장소로 향하라고 했다. 또한 상조종은 잠시 그들과 연락을 끊었다가, 추후 지정한 몇 군데로 연락을 취하겠노라 전했다.
장수들도 신분까지 숨기라는 지시에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내 장수들이 빠진 후, 자금동, 영검산, 소요궁 수행자들도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분히 상조종에게 달려갔다. 지금 자금동 종군 수행자들은 아직 종문의 연락을 받지 못해, 상황을 알지 못했다. 이는 분명 사전에 새어 나가선 안 되는 일이기에, 미리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군막 안에는 이미 상조종과 몽산명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은 사전에 준비한 대로 관방의를 따라 비밀리에 철수했다.
사령관까지 철수한데다 이미 군령까지 내린 상태였다. 이젠 여기서 뭘 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도 별수 없이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 * *
일단의 군대가 땅을 울리며 달려왔다. 필두엔 우군 사령관 금작이 있었다. 그가 빠르게 사람들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연군이 남기고 간 울타리와 말뚝뿐, 사람은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에 연군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때려죽여도 믿지 않으려 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군이 도망쳤다니, 상조종과 몽산명이 미치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사전에 어떠한 징조도 없었다. 금작은 아래에서 올라온 정보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일전의 제국처럼 진국의 흑수대가 침투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급기야 금작은 아랫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쌍욕을 퍼붓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눈앞의 모든 것이 현실을 일깨우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게 사실이었다. 연군이 정말 도망친 것이었다.
금작은 안장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홀로 꿈꾸듯 중얼거렸다.
“상조종과 몽산명, 대체 무슨 꿍꿍이속이란 말인가?”
그를 수행하는 한 장수가 말했다.
“대사마, 혹시 연군이 우리를 이용해 먼저 진군과 목숨 걸고 싸우게 하려는 건 아니겠습니까?”
신중 대사마는 바로 뒤돌아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게 무슨 개똥 같은 말이냐! 미친 개에게 머리라도 물렸느냐? 진군이 서병관을 나선다면 그대로 연국 영역에 들어가 땅을 점령할 수 있는 지형이다. 후방의 무사한 대군이 연국 영역에 들어가 진형을 이룰 수 있단 말이다!
더군다나 서병관이 진군 손에 있으니, 저들은 공격도, 방어도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죽자고 달려들 이유가 있느냐?
진군은 원래부터 세력이 방대하다. 연국은 그 때문에 우리와 손을 잡았지. 상조종이 멍청한 닭대가리도 아니고, 진군에게 각개격파 당하길 좌시한단 말이냐? 분명 무슨 문제가 생겼다. 틀림없다. 지금 즉시 사람을 보내 알아보아라. 지금 당장 상황을 파악하란 말이다!”
금작이 다시 뒤돌아 현장 흔적을 살피며 흉악한 얼굴로 외쳤다.
“알겠습니다!”
한 장수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급히 말을 몰았다.
금작은 움직임 없이 연국이 철수한 방향을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몽산명 늙은이, 우리는 연합군이다. 자네는 어째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리 움직인 것인가.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 * *
서병관.
고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부릅떴다.
“뭐라? 연군이 철수했다고?”
윤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아주 다급히 철수했다고 합니다.”
고품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말도 안 된다.”
“사령관님, 확실합니다. 소장이 방금 전방에 가서 확인한 사항입니다!”
고품은 성큼 걸어 서탁 앞으로 나오더니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고품은 멈추지 않고 빠르게 성벽까지 올랐다.
연국이 있던 곳이 텅 비어있었다. 과연 연군은 철수한 것이었다.
“몽산명, 무슨 꿍꿍이속이지?”
고품은 하마터면 수염을 쥐어뜯을 뻔했다. 하필 이쪽에서 막 공격을 시작하려는데 연군이 돌연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확실히 의심스러웠다.
그때, 윤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령관님, 이대로 공격합니까?”
고품은 즉각 뒤돌아 호통쳤다.
“당신이 닭대가리요, 아니면 몽산명이 닭 대가리요? 몽산명이 어떤 사람이오. 이리 쉬울 리 있소? 함정이오, 이건 분명 함정이오! 명령을 내리시오. 공격 준비를 멈추고, 밀정을 이용해 상황부터 파악하시오!”
* * *
우유도 일행이 창오현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이었다.
산장 입구를 지키는 호위는 일행을 막아섰다. 그러나 우유도가 암호를 말하자, 그들을 기다리던 집사가 안도하며 빠르게 안으로 안내했다.
“다 준비됐나?”
우유도가 걸어가며 물었다.
집사는 우유도가 누군지 몰랐지만, 분명 어떤 비밀 행동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옆에서 같이 걸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준비됐습니다.”
집사는 일행을 한 거처로 데리고 갔다. 상자 500개가 있었다. 아직 칠 냄새도 채 사라지지 않은 상자였다. 그러나 워낙 가지런히 놓여있었기에, 개수는 한눈에 다 들어왔다.
옆에서 집사가 설명을 붙였다.
“상자를 운송할 말들과 사람들은 현성 안에 있습니다. 그들 모두 군수물자를 운송한다는 명목으로 대기 중입니다.”
“산장 사람들은 지금 모두 이 안에 있느냐?”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시각이면 모두 산장에 있을 겁니다.”
“이분들을 데려가라.”
그리고 우유도는 원종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집사와 같이 움직이십시오.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을 모두 여기로 모아 상자를 지키게 하고, 상자 덮개를 다 열어 두십시오.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여기 소식이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유도는 다시 원강과 운희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은 나와 같이 가시지요.”
원종은 우유도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도 못했지만, 일단 그저 시키는 대로 집사를 따라 움직였다.
이내 우유도는 은아를 포함해 세 사람을 데리고 즉시 움직였다. 먹을 게 다 떨어져서 은아가 앙탈을 부리긴 했지만, 우유도는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고 말없이 팔을 잡고 움직였다.
* * *
우유도와 세 사람은 산 중턱 어딘가에 도착했다.
이어, 우유도가 손짓하자 운희가 즉시 아래로 향하는 지하도를 만들었다.
아래로 내려가던 도중, 원강이 물었다.
“이게 뭐죠? 그 지하수로인가요?”
원강도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한다는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 안계를 넓혀줄게.”
우유도도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런 시기에 만약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면,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곁에서 원강은 홀로 조용히 이곳에 안계를 넓힐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대화를 나누며 지하수로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래선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저 멀리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곧이어 조웅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누구냐!”
“접니다.”
어둠 속, 빛이 생겨났다. 조웅가가 월접을 날려 보낸 것이다. 그의 뒤편 꺾인 자리엔 두 여인이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상숙청과 여무쌍이었다.
월접이 우유도 일행에게 날아와 주변을 밝히고서야 조웅가도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지금까지 그야말로 속이 타들어 갈 듯 애타게 기다렸었다.
여무쌍도 원강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곤 상숙청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유도가 안전히 돌아온 걸 확인한 상숙청은 양손을 꼭 붙잡고 속으로만 크게 기뻐했다. 우유도에게 불행이 찾아오지 않아 몹시 기뻤다.
“청청.”
상숙청을 확인한 은아가 곧장 우유도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 상숙청의 소매를 꼭 붙잡았다. 그리곤 금세 서러움을 토해냈다.
“청청, 배고파.”
우유도는 바로 인상이 구겨졌다. 뭘 먹은 지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았건만, 심지어 방금까지도 간식을 먹고 있던 애가 배가 고프다고? 정말 숨을 쉬는 것보다 먹는 것이 더 잦은 듯했다.
그러나 상숙청은 은아가 얼마나 굶었는지 알지 못하기에, 급히 바닥에 놓인 가방을 뒤져 건량을 꺼냈다. 이곳에 지내는 동안 먹었던 것이었다.
마치 아이를 돌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은아 역시 크게 만족한 얼굴로 방긋 웃으며 또 먹을 것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우유도는 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아무 이상 없지요?”
“없다.”
우유도가 다시 주위를 둘러본 후, 이야기했다.
“여긴 영원히 이 상태일 것 같은 모습입니다.”
조웅가 역시 일행을 꼼꼼히 살펴보며 다들 무사한지 확인했다.
“어찌 됐느냐?”
“위험했지만 문제없었습니다. 남도림과 독무허는 처리했습니다.”
조웅가는 크게 동요했다.
여무쌍 역시 듣고 있으면서도 현실이 와닿지 않았다.
“죽었단 말인가요?”
우유도는 여무쌍을 돌아보며 분명히 말해주었다.
“원색과 같은 처지가 됐지요. 둘 다 제수씨 사내에게 두 쪽이 났습니다.”
여무쌍, 조웅가, 상숙청이 동시에 원강을 바라봤지만, 원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상숙청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이 큰일을 하러 움직였다는 건 알았어도, 그게 두 성존을 죽이는 일인 줄은 몰랐다. 대체 뭐라고 평해야 할까. 자신이 이런 일에 왈가왈부한다고 한들, 그냥 유치한 놀음이 될 것 같았다.
“네가 떠나기 전에 당부한 일은 내가 나설 필요 없겠구나. 너무 복잡한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간단한 일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요. 사숙이 그 긴 시간 동안 지켜낸 비밀처럼 말입니다. 만약 저였다면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너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겠지.”
우유도가 미소 지었다. 그리곤 그대로 조웅가를 스쳐지나, 건량에 빠져 있는 은아에게 다가갔다. 은아는 입안에 건량을 가득 넣은 채 우유도를 올려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우유도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은아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우유도는 군말 없이 목덜미를 살짝 눌러 은아를 기절시켰다. 은아의 입에는 여전히 먹을 것이 가득했지만, 우유도는 그대로 쓰러지는 은아를 안아 들고 뒤돌아 신호를 보냈다.
운희는 즉시 벽에 구멍을 만들었다. 우유도는 은아를 잠시 그 동굴 안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여무쌍을 바라보자, 여무쌍은 바로 우유도의 의중을 눈치챘다. 우유도는 여무쌍 역시 그곳에 잠시 두려 하고 있었다.
“폭포 뒤로 가려는 건가요? 무슨 봉인인지 보고 싶어요.”
여무쌍이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우유도는 잠시 침묵하다, 결국은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돌려 신호를 보냈다.
운희는 즉시 동굴을 막았다. 물론 그 안에 있는 은아를 위해 숨구멍은 충분히 남겨둔 상태였다.
“갑시다.”
우유도가 먼저 움직이고, 운희는 그대로 상숙청의 팔을 잡고 빠르게 움직였다. 조웅가도 곧장 그 뒤를 따랐다.
원강은 몇 발짝 움직이다 갑자기 뒤를 돌았다. 여무쌍은 저벅저벅 불편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일행의 속도를 전혀 따라오지 못했다. 여무쌍은 모든 법력을 잃었다. 천하를 군림하던 무쌍성존도 옛이야기였다.
원강은 조용히 멈춰서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여무쌍은 곧 원강 곁에 도착한 후, 잠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러다 원강이 등에 멨던 삼후도를 내리고, 뒤돌아 무릎을 꿇고 여무쌍에게 등을 보였다.
여무쌍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곧장 원강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목을 꼭 끌어안고 몸을 기댔다.
원강은 여무쌍의 두 다리를 받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 속, 원강은 여무쌍을 업고 전방 불빛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