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화. 부왕의 왕기(王旗)
여무쌍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경지는 없어졌어도 식견은 여전했다. 말을 종합해보면, 이곳 음기에 뭔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설마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가……? 영왕이 음병(*陰兵: 저승의 병사)을 남기기라도 한 건가?”
여무쌍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우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음병? 상숙청은 결국 대경실색했다. 그녀는 다시 석문을 바라보았다. 그 앞의 벽혈단심……. 상숙청은 더욱 안절부절한 눈빛이었다.
“도야, 책임지겠어요. 그런데 정말 무지한 저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너무 걱정되네요.”
“속세의 전쟁은 왕야와 몽 사령관이 연국 대군을 장악하고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꼭 이 부대를 동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과거 영왕께서 이 군대를 준비한 건 아마 수행자를 상대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전 예전부터 이곳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군주를 불러 저들을 깨우지 않은 건, 쉽게 밝힐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또 아직 이들을 쓸 시기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이제 구성 중 여덟이 쓰러졌습니다. 오상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놈은 참으로 어려운 상대지요. 보통 방법으로 상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전 이 군을 이용해 오상과 결전을 벌일 겁니다. 그러니 군주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어찌 쓸지는 제가 군주 옆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군주는 무엇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물론, 오상과 싸운다면 많이 위험할 겁니다. 군주, 두렵습니까?”
우유도는 마땅히 할 말을 모두 확실히 일러주었다.
상숙청은 그의 말을 차분히 소화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렵지 않아요! 도야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마땅히 그 책임을 지고 불구덩이라도 들어갈 수 있어요.”
“좋습니다! 군주는 대의가 있으시군요. 과연 영왕의 후인입니다.”
우유도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돌아 직접 입구를 막고 있는 바위로 다가갔다.
운희는 즉각 상숙청을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원강과 조웅가도 마찬가지로 빠르게 움직였다.
곧이어 우유도가 양손으로 바위를 붙잡고 법력을 썼다.
쿠쿵!
둥그런 바위가 소리를 내며 서서히 뒤로 움직였다.
막힌 입구가 뚫리자, 그 즉시 안쪽에서 음기를 머금은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이곳이 처음인 사람들은 크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쿠궁-!
드디어 입구를 막은 바위가 굴러가며 뒤쪽 벽에서 멈췄다.
우유도는 과거 운희가 남겨둔 작은 돌멩이를 법력으로 끌어당겨 바위가 다시 굴러가지 않게 아래쪽에 끼워 넣었다.
이윽고 우유도가 먼저 걸음을 뗐다. 동굴에서 불어오는 음산하고 어둑한 바람이 그의 긴 옷자락을 일정하게 펄럭였다.
운희는 상숙청의 손을 잡고 뒤를 따랐고, 조웅가와 여무쌍을 업은 원강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안쪽에서 뭔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유도는 다시 입구 한쪽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뭔가를 더듬었다.
현재 다른 이들은 이 공간의 괴이한 기운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동굴 안엔 뭔가 모기처럼 작고 매혹적인 기묘한 붉은 빛이 가득했다.
덜컥-
우유도가 문 옆에 뭔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뭔가 또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가 바람을 따라 퍼져갔다.
훙~
한줄기 불길이 치솟았다. 커다랗게 일어난 불길은 더더욱 세를 불렸다. 불꽃은 앞서 움푹 파인 길로 흘러간 기름을 따라 화룡처럼 뻗어나갔다.
그 화룡의 손길 아래, 거대한 지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에 나타난 건 장엄하고도 거대한 병기고였다. 병기, 갑주가 불빛 아래 살기 가득한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더더욱 놀라운 건, 바닥에 꽂혀있는 병기마다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는 검은 안개를 두른 까마귀가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까마귀는 어두운 깃털로 빛을 뿜어냈고, 까마귀 주변엔 검은 안개가 떠다녔다. 또한 그 기이한 붉은빛의 정체는 바로 까마귀의 눈이었다.
웅-!
거대한 공간 중앙이 활활 타오르며 주변을 더 환하게 밝혔다.
그 중앙 한편엔 ‘상’이라고 적힌 큰 깃발이 꽂혀있었다.
어쩌면 장기가 음기의 침임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글자는 은은한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병기와 갑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로 인해 이 공간은 더욱더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상숙청의 두 눈은 깃발에 고정돼 있었다. 그러다 차츰, 그녀의 눈시울이 붉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부왕이 이끄시던 군의 왕기에요…….”
이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은 아버지가 남겨둔 곳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관심은 다른 것에 머물러 있었다.
“까마귀 장군!”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여무쌍이 갑자기 소리를 뱉었다. 그녀는 까마귀 장군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당연히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알았다. 무량원에 있던 것이 바로 까마귀 장군이었다.
조웅가도 놀라 숨을 들이켰다. 일찍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직접 이 규모를 보니 도무지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10만 까마귀 장군!”
이를 직접 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대단한 기세라,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과거 동곽 사형과 동료들이 이를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그 노고가 상상이 갔다.
원강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도야가 말한 안계를 넓혀준다는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안계를 넓힌 느낌이었다.
지금 이 광경은 누구도 살면서 평생 담지 못할 모습이었다. 원강도 이를 놓쳤다면 굉장히 아쉬웠을 것 같았다.
운희는 그나마 담담한 편이었다. 어쨌든 한번 겪어본 일 아니던가.
이내 우유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습니다. 바로 영왕께서 남기신 10만 까마귀 장군입니다!”
상숙청도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과거 까마귀 장군을 본 적이 없기에 그게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오늘에야 이곳에 어두운 깃털을 가진 까마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들이 까마귀 장군이었나? 순간 뭔가 떠오른 그녀가 우유도를 돌아보았다.
“도야, 과거 남 선생님이 언급했던 10만 까마귀 장군이 진짜란 말인가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남약정은 아마 그 사부 낙소부와 영왕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을 겁니다. 당연히 일부분 듣고 단순한 잡담으로 생각했겠지요. 진짜로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그걸 빌미로 옥중에 있는 왕야를 빼낼 수 있었지만요. 남약정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때, 여무쌍이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말도 안 돼!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건가요?”
“아마도 군주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를 시작했을 겁니다. 그러니 저들의 준비기간도 군주 나이와 비슷하겠지요. 최소한 30년입니다.”
여무쌍은 머리가 곤두서는 것 같았다.
“30년? 저도 10만 까마귀 장군의 소문은 들어봤어요. 하지만 존재한다고 믿진 않았지요. 까마귀 장군은 오상도 제련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말 이 정도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면, 지금껏 다른 움직임이 없을 리 없지 않겠어요? 무량원을 지키는 까마귀 장군은 일정 기간마다 오상이 직접 죽여야 했어요. 오래 방치한 까마귀 장군은 통제할 수가 없었거든요.”
“이미 눈앞에 그 결과가 있는데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오상도 아마 함음산에서 비밀리에 상당수의 까마귀 장군을 제련하고 있을 겁니다.”
여무쌍이 우유도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여태 오상이 우리를 속였다는 말인가요? 불가능해요! 함음산이라도 마찬가지예요. 이 정도 규모라면, 순간은 모면했을지 몰라도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그 함음산에서 이리 오래도록 우릴 속일 순 없어요!”
“그것 모두 당신 때문이 아니오.”
조웅가의 말에, 여무쌍이 고개를 돌렸다. 이해할 수 없단 눈빛이었다.
“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조웅가는 원강을 힐끗 보곤 답을 이었다.
“그쪽 두 사람을 보니 이해가 가는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정말로 만나 짝을 이뤘어.
당신 남편이 당신에게 잡혀 성경에서 껍질이 벗겨지는 고문을 받을 당시, 오상은 까마귀 장군의 제련비법을 알지 못했소. 전에 그가 알고 있던 건 당연히 반쪽짜리였지. 하지만 우리가 당신 남편을 구하기 위해, 진짜 제련비법을 교환조건으로 내걸었소. 자, 그래도 당신과 아무 관련이 없소?”
상숙청은 경악한 얼굴로 여길 한번 보고, 저길 한번 돌아보았다. 이 중에 가장 무지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 아닐까. 아는 것이라고 해봤자 여기저기서 조금씩 전해 들은 소문에 불과했다.
여무쌍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이제야 과거 이들에게 얼마나 큰 문제를 선사했는지 깨달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저 모른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오상은 제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그놈이 제국에 자리 잡은 이유가 바로 함음산이었군요. 그런데 당신은 일찍부터 제련비법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만들어 내지 않은 거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웅가가 턱짓으로 동굴 안을 가리켰다.
“이미 누군가 제련하고 있는데, 내가 왜 고생을 하오? 더군다나 난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오. 근데 어딜 가서 까마귀 장군을 제련한단 말이오? 당신도 함음산으로는 비밀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잖소. 심지어 오상은 이 비법을 얻기 위해 줄곧 나를 감시하고 있었소. 그러니 내가 설령 까마귀 장군을 만들고 싶었다고 해도 그럴 기회가 아예 없었소.”
당시 조웅가에게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건 차치하고, 정말 그런 생각이 있었다고 한들, 그럴만한 자원이 없었다.
“그 전에 동곽호연이라고 말했지. 그러니까 동곽호연이 당신에게서 까마귀 장군 제련비법을 얻었단 말인가?”
이번에 조웅가는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숙청은 비로소 깨달았다. 모든 건 그에게서 시작됐다는 걸.
이내 여무쌍이 코웃음을 쳤다.
“상청종이라, 당신들 상청종 사람들은 모두 간덩이가 부은 사람뿐이군.”
그러다 돌아보는 원강의 얼굴에, 여무쌍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우유도는 더는 군말 없이 검을 지팡이 삼아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운희도 즉각 상숙청을 보호하며 그 뒤를 따랐다.
조웅가 역시 막 걸음을 떼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 괴로워하는 여무쌍이 있었다.
원강은 이제 매우 밝아져 따로 여무쌍을 보호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판단에 여무쌍을 땅에 내려주었다. 그 순간, 여무쌍의 체내로 이곳을 가득 채운 엄청난 음기가 침입했다. 그녀는 곧장 휘청거리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원강도 매우 놀라 빠르게 여무쌍을 부축했다.
“무슨 일이오?”
이를 본 우유도가 진중하게 당부했다.
“원숭아, 계속 제수씨를 업거나 안고 있어. 제수씨는 너처럼 혈기의 보호가 없어, 이곳의 음기를 버티지 못해.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목숨이 위태로울 거다. 뭐, 제수씨가 죽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딱히 이견은 없지만.”
법안을 가진 이들은 일찍부터 뭔가를 눈치채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여무쌍의 육체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원강과 떨어지는 그 즉시 음기의 침식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터였다.
원강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곧 우유도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즉각 여무쌍을 등에 업었다. 아내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순 없지 않은가.
평범한 이에게 계속 누군가를 업고 오랫동안 움직이는 건 크게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원강에겐 별다른 일도 아니었다. 아마도 보통 사람이 볏짚 하나 업고 움직이는 정도랄까.
일행 중 원강이 힘들어하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원강은 무려 삼성을 칼로 베어버린 사내였다.
여무쌍은 원강의 등에서 바로 정신을 차렸다. 원강의 뜨거운 기운이 여무쌍 몸속으로 스며들어 음기를 몰아내고, 오장육부까지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여무쌍은 그의 품에서 다시금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