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화. 곧 승부가 날 것이다
마침 운희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우유도가 화장대 앞에서 상숙청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눈이 둥그레진 운희는 가까이 다가가 우유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운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진작부터 뭔가 이상한 걸 알았다는 듯, 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우유도도 이젠 할 말을 다 했다. 사실 간단한 일이었다. 그는 상숙청의 머리를 사내처럼 묶어주곤, 뒤돌아 운희에게 당부했다.
“변장시켜주세요. 사내의 옷을 입히고, 남장을 시켜주세요.”
그리고 우유도는 그대로 검을 들고 일어났다.
방을 나가려는데, 은아가 바로 우유도를 잡고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도도! 나도.”
자신의 머리도 빗겨달라는 말이었다.
“머리를 빗겨줄까, 닭 다리를 줄까?”
은아는 즉각 우유도의 소매를 붙잡고 수정처럼 눈을 반짝였다.
“닭 다리!”
“좋아, 나중에 사줄게.”
은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풀었다. 우유도는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듯, 끝없이 찬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유도가 성큼 걸어 나간 뒤, 운희는 어이가 없어 은아를 한번 쳐다보았다. 어차피 또 가는 길에 닭 다리를 사줘야 하지 않는가. 거절하는 것도 참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이건 그냥 바보를 놀려먹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은아가 그런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은아의 머리로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다. 아마 설명할수록 더 헷갈리기만 할 게 분명했다.
운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돌아서는데, 순간 멈칫했다.
화장대 앞의 상숙청이 우유도가 빗겨준 머리를 만지며 울고 있었다.
“하아!”
운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바로 상숙청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거울 속 상숙청과 눈을 맞췄다.
“겨우 얼굴이 바뀐 걸 가지고 저렇게까지 태도를 바꾸다니, 혹시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속이 말이 아닌 건가요?”
상숙청이 고개를 저었다.
“도야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운희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석은 생각하지 마세요. 마음속은 분명 알고 있을 거예요. 도야의 태도가 너무 크게 바뀌었어요. 군주의 용모가 바뀌었다는 이유로요. 그게 바로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거예요. 그래서 슬퍼하는 것 아닌가요? 심지어 10만 까마귀 장군을 위해 군주를 이용하려는 거라 의심하는 거잖아요.”
상숙청은 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면 왜 우는 건가요? 사실 다들 군주가 도야를 연모한단 걸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못살게 굴면 안 되죠. 이런 식으로 이처럼 고운 여인들을 괴롭히면 안 되는 거예요.
맞아요. 도야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해요. 여기 모든 사람이 도야를 따르는 것도 맞아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이지요.
전 누가 뭐래도 이번 일에 군주 편이에요. 그러니 두려워할 것 없어요. 도야가 그 정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닐 거라고 믿어요. 또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군주님, 지금 군주님은 그야말로 꽃처럼, 옥처럼 아름다워요. 당연히 좋은 사내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천하의 좋은 사내를 마음껏 고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자신을 그렇게 욕보일 필요 없어요. 저쪽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중에 홍랑과 같이 도야를 찾아가 이치를 따지고 꺼지라고 하지요, 뭐.”
운희는 상숙청의 어깨까지 고개를 숙인 채 거울 속 상숙청을 가리키며 다정히 토닥였다. 이내 상숙청이 운희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안되긴 뭐가 안 돼요. 나조차 보기 힘든 지경인데. 정말 이대로 도야 뜻에 따를 생각인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도야는 말이 통하잖아요.”
“안 돼요……. 제가 원해요.”
결국 그 가녀린 어깨가 하염없이 무너져내렸다. 흐느끼는 눈물이 상숙청의 비참함을 대신할 수 있을까. 운희도 더 이상 꺼내줄 위로가 없었다.
* * *
은아는 그리도 원하던 닭 다리를 얻지 못하고, 다시 기절했다. 심지어 은아는 이불에 싸여 그녀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이를 본 상숙청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 우유도의 뜻이었다.
성에선 마차 50대와 마부, 호위도 조금 보내왔다.
곧이어 산장에 있던 상자들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대략 상자 10개가 마차 한 대에 실리고, 상자들은 다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우유도는 남장한 상숙청이 나왔을 때, 붉어진 눈을 보고 그녀가 울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 잠시 기회가 생겼을 때, 우유도가 운희에게 물었다.
“울었어요? 어찌 된 일이죠?”
그 이야기가 나오자, 운희는 상당히 불쾌한 얼굴이 됐다.
“그쪽은 아주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얼굴만 보고 젓가락질하는 거겠지.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버리고. 안 그래?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대체 무슨 생각이야? 어떤 여인이든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 얻을 수 있는데, 어째서 군주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거야?”
“어째 갈수록 홍랑과 비슷해지는 것 같군요. 됐습니다. 그 일은 그만하지요. 지금 어떤 일이 더 중요한지 잘 생각하세요. 그 일은 이번에 살아남은 후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운희가 말문이 막혔다.
“너……. 좋아, 중요한 일이 있지. 마침 묻고 싶은 게 있었어. 우리가 갈 길이 얼마나 먼지 알 거야. 각 세력한테 너무 일찍 철수하라고 한 것 아닌가? 왕야 쪽이 철수했어. 이제 그 많은 병력을 어찌할 건데? 일단 오상이 그들을 찾아가면, 큰 타격을 입을 거야.”
운희의 말은 일단 우유도가 모든 준비를 다 끝내고 자리를 잡은 후 오상이 뭔가 이상을 감지하게 하는 게 좋지 않으냐는 물음이었다. 줄곧 묻고 싶었지만, 우유도에게도 생각이 있을 테고, 괜히 쓸데없는 말로 자신만 멍청해 보일까 참고 있던 질문이었다. 마침 기회가 왔으니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우유도는 운희를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도망가야 정상이지요. 찾을 수 없어야 오상이 찾아 나설 것이고 그래야 안심하고 쳐들어오겠지요. 그래야만 함정에 빠트릴 수 있잖아요.”
그리고 우유도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운희는 멈칫했다. 우유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로 한참이나 고민한 뒤에야 그사이의 논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걸음을 옮긴 우유도는 상숙청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남장을 해야 했습니다. 이번에 움직이는 거리가 짧지 않습니다. 견딜 수 있겠나요?”
상숙청은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냈다.
“오랜 시간 안장 위에서 지낸 경험이 있어요. 걱정 없어요.”
“울었나요?”
상숙청이 고개를 젓곤 저도 모르게 우유도의 시선을 피했다. 차마 입밖으론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좀 복잡한 일입니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분명 군주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닙니다. 이번 일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군주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겠습니다.
지금은, 내가 고민해야 할 것들이 좀 많습니다. 흉험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선 연정 문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사실 상청종에서 나온 후로 줄곧 그랬었지요. 10년간 난 단 한 번도 긴장을 푼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번엔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겁니다. 군주는 명석한 사람이니, 날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내게 시간을 좀 줄 수 있겠습니까?”
상숙청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상숙청은 우유도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무조건 믿어달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어쨌든 오늘 아침 일도, 우유도가 이렇게 말을 붙여준 것도 상숙청에겐 큰 의미였다. 서운함도, 섭섭한 마음도 늘 그의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그때, 원강이 성큼 다가와 보고했다.
“도야, 준비 끝났습니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어요.”
“산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밀도로 내려보내고, 움직임을 통제하고 있어요. 단호 일행이 곧 도착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이 여기 상황을 장악할 거고요.”
“그래, 출발하자.”
원강이 즉시 사람들에게 출발을 명하며 나섰다.
이내 우유도는 뒤돌아 상숙청을 바라보았다.
“가지요.”
상숙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유도를 따라 움직였다.
말 앞으로 다가간 우유도는 고삐를 잡고 상숙청이 말에 오르는 걸 직접 도우려 했다. 상숙청은 괜찮다고, 혼자 알아서 하겠다며 급히 손사래를 쳤지만, 우유도는 그냥 말없이 상숙청의 팔을 잡고 그녀를 안장에 올려주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였다. 지금 우유도의 행동은 꼭 다른 이들에게 상숙청이 누구의 여인인지 분명히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상숙청은 크게 당황하며 주위 사람들 눈치를 살폈다. 과연 이쪽을 보는 일행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상숙청은 혼란스러워 정신이 혼미했지만……. 마음 저 깊은 한편에 고개를 드는 달콤한 행복감도 부정할 순 없었다.
우유도는 곧 상숙청에게 고삐를 쥐여준 뒤, 자신은 다른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손을 들어 출발 신호를 보냈다.
마차는 산을 내려가 관도에 올랐다.
일행은 호위 아래, 땅을 울릴 듯 질주하고 있었다.
* * *
진국, 새로운 도성.
소삼성이 새로운 태학을 순찰하던 소평파를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보고를 다 듣고, 소평파가 깜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남도림과 독무허가 모두 죽었다니. 확실하더냐?”
“외부 소문입니다. 소인이 즉시 빌린 물건을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도 총관을 찾아갔고, 상황을 알아봤습니다. 도 총관도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 사실을 함구하라며, 외부의 소문은 소문이고, 우리가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화를 입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소평파는 경악과 동시에 경탄했다. 죽은 이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려 천하 위에 군림하던 이성이 죽었다.
“대단한 수법이다, 대단한 능력이야. 아주 빠르구나. 단 한 번에 둘을 죽였어! 오상은, 오상은 어찌 되었느냐?”
“오상은 멀쩡합니다. 사건은 기운종에서 발생했습니다. 기운종 수많은 사람이 직접 목도한 일입니다. 현장 상황을 보면, 남도림과 독무허의 죽음은 아마도 오상과 가무군 쪽의 원영기 고수들이 손을 잡고 함정을 판 결과인 것 같습니다. 괴이한 것은, 남도림과 독무허가 죽은 후, 오상은 도망치는 원영기 고수들을 내버려 두었다는 것입니다.”
소평파가 뒷짐을 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
“흠……. 손을 잡아? 오상이 무모한 짓을 했구나. 멀지 않았다. 다음은 바로 오상의 차례다.”
“또 둘이 죽었습니다. 대 공자님 예상과 비슷합니다. 삼성은 과연 가무군의 적수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곧 승부가 날 것이다. 드디어 이날이 오고야 마는구나!”
소평파는 저 멀리 시선을 두었다.
* * *
현재 남도림과 독무허의 사망 소식이 온 천하에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기운종의 흑석은 오늘도 보고를 위해 분주히 달려왔다.
그가 막 입을 떼려는데, 절벽에 서 있는 오상이 먼저 뒤를 돌았다.
“남주부성 쪽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이쪽과 초려산장 주위에 배치한 감시 인원과 연락이 끊겼다. 평소에도 일정 주기로 연락을 주고받았었지만, 갑자기 연락이 멈춰버렸다.
오상 측은 바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설마 저들 인원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초려산장과 외부 연락이 중단됐고, 이제 중간에 가로챌 소식도 없는 것일까? 오상은 계속 그쪽의 상황을 크게 주목하고 있었다.
이윽고 흑석이 오랜 망설임 끝에 눈 딱 감고 입을 열었다.
“소식이 왔습니다.”
흑석은 매우 당황한 안색이었다. 그를 본 오상의 목소리도 굳었다.
“뭘 그리 망설이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