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화. 이번 생은 여기까지만
남천무방이 나타나자, 왠지 우유도와의 사이가 좀 멀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는 확실히 관방의 자신의 잘못이라 할 수 있었다.
산장 밖에 손님이 거주하는 객원이 있었다. 일찍이 운희도 아직 신임을 얻기 전에는 그곳에서 지냈었다.
지금 산장에 중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갇혀있는가. 도야는 사부 종곡자까지 연금시켰다. 그런데도 관방의는 도야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가 없는 사이 외부인을 산장 핵심 구역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만에 하나 혹시라도 문제가 생겨, 갇힌 사람들이 탈출이라도 한다면 후환은 끝도 없을 것이다.
신중한 도야라면 아니, 이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들 여기까지 오기가 평탄했던가. 그 얼마나 많은 역경을 이겨낸 끝에 비로소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던가. 이제 와 모든 걸 그르칠 수 없었다.
관방의도 잘 알았다. 이제 천도비경에서 돌아오면, 뭔가 변명거리를 만들어 남천무방과 함께 외부에 있는 객원으로 옮겨가야 할 것 같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나가게 되지 않을까.
자발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야가 먼저 방비를 위해 움직여야 하고, 종국엔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될 수도 있었다.
“좋아, 알겠어. 내일 바로 남천무방과 같이 출발할게. 다른 이야기가 없으면 지금 바로 돌아가 준비할게.”
우유도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방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섰다. 뒤돌아선 그녀의 얼굴에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어버린 느낌이 가히 좋지 않았다.
그런데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뒤에서 우유도의 탄식이 들려왔다.
“홍랑. 나와 지낸 시간이 도대체 몇 년이야. 이처럼 화끈하게 다른 사내를 따라가 버리니, 내 심정이 어떻겠어.”
그의 목소리에도 허전한 느낌이 가득했다.
관방의의 걸음이 멎었다. 그렇게 점차 눈시울이 붉어졌다. 뭐라 형용할 수 없지만, 우유도의 그 한마디에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눈물을 참고 뒤돌아 찬란한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러게 왜 진작 움직이지 않았어? 만약 도야에게 군주가 없고, 내 팔이 잘리지 않았다면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했을 거야. 난 정이 많은 사람이란 말이지. 장담하는데 만약 그랬다면 평생 도야 옆에 딱 붙어 다녔을걸?”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딸을 시집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야.”
하지만 관방의에겐 먹히지 않았다.
“이번 생은 여기까지, 더 이상 기회가 없어.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 다시 만나 내가 도야와 혼인하겠다면, 날 받아 줄 거야?”
우유도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볼게.”
“승낙한 것으로 알겠어.”
관방의는 그 말을 남기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눈물은 이미 통제할 수 없었다. 눈앞은 흐려졌어도, 뒷모습만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길 바랐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관방의는 내내 눈물의 짠맛을 느끼며 자리를 떠났다.
우유도는 옅게 미소 지으며 관방의의 뒷모습을 지켜봐주었다.
이내 곁에서 운희의 조용한 탄식이 들렸다.
“만약 과거 관홍화가 남천무방이 아닌 우유도를 만났다면 어찌 됐을까.”
우유도가 검을 짚고 걸음을 뗐다.
“여인은 참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운희는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최소한 우유도는 남천무방처럼 홍랑이 속세에 물들어가는 걸 두고 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겠지. 홍랑의 운명도 분명 달라졌을 거야. 도야. 방금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홍랑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
우유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성경 안에도 아마 그런 탑이 하나 생겼을 거예요. 사람을 시켜 성경에 가서 찾게 하세요.”
* * *
수행계가 소란스러워졌다. 오상의 죽음에 대한 여파였다.
안돈천, 서해당, 문화, 궁임책, 종곡자, 제갈지, 왕존, 곤림수, 관방의, 운희, 조웅가, 오풍, 원강까지. 이렇게 새로이 원영기 고수가 된 이들이 의기투합해 오상과 격전을 벌였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또한, 그 전투에서 오풍이 죽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우유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지금 여론은 우유도가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 우유도가 자신을 드러내길 원치 않으니, 풍문에도 당연히 그에 관한 이야기는 실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유도는 원강을 원영기의 실력자로 소문냈다. 이로 인해, 온 천하가 난리가 났다. 설마 이제 새로운 십이성(十二聖)이 출현한단 말인가?
게다가 상조종에게 10만 까마귀 장군이 있고, 진군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소식이 퍼졌다. 10만 까마귀 장군……, 전설에 영왕이 제련했다던 그 10만 까마귀 장군이 정말 실재하는 것이었다.
한국, 송국은 거대한 불안에 휩싸였다. 양국은 빠르게 연락을 취하고, 동시에 새롭게 원영기에 오른 고수들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 * *
누각 위.
우유도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혜청평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우유도는 찻잔을 들고 고개만 돌려 초려산장을 떠나는 그녀를 지켜봤다.
그때, 운희가 누각으로 올라와 우유도 앞에 서신을 내려놓았다.
“왕야가 보내온 소식이야. 소등운의 집사 양쌍이 보내온 서신인데, 지금 소등운에겐 아들이 소평파밖에 남지 않았으니, 자비를 베풀어 소평파를 살려달라는 서신이야. 서신에 양쌍이 왕야에게 서신을 보낸 일은 소등운이 모른다고 적혀있어. 왕야는 이게 소등운의 뜻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했고.”
우유도는 찻잔을 내려놓고 서신을 들었다. 이것이 진정 소등운의 뜻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북주 쪽에서 입을 열었다는 것이었다.
소등운은 한 지역의 제후였다. 그것도 전에 남주를 지지해 큰 공을 세우기도 했었다. 그에게 남은 아들은 하나뿐이었다.
상조종도 당연히 소등운의 후사를 모두 죽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상조종 휘하에 아직 소등운 동료들이 적지 않게 남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조종은 소평파와 도야의 은원이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대로 결정 내릴 수 없었다. 당연히 우유도의 의견을 물어야 했다.
북주에서 간청한 것도, 이미 진국의 시대가 저물고 상조종에게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소평파가 바로 그 진국에 있었다. 일단 상조종이 진국을 쓰러뜨리면, 서삼국에서 수많은 수작을 부린 소평파는 절대 무사할 수가 없었다.
“왕야가 군을 이끌고 서벌(徐伐) 하는 와중에 북주를 지키며, 한국과 대치 중인 소등운이 이렇게 간청하는 것이 무슨 뜻이지? 왕야를 협박하는 것인가? 주제를 모르는군!”
“그럼 뭐라고 대답하지?”
“처음부터 소평파를 죽일 생각이 없었으니,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
* * *
연국 도성, 황궁.
연의 황궁은 몹시도 한적하고 고요했다. 이제는 겨우 몇몇 청소나 하는 환관이나 궁녀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남아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황궁을 세심하게 관리하지도 않았다. 황궁에 거주하는 이도 몇 없어서, 대부분 이미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각 후궁이 사는 거처의 청결도에서도 세상사 야속함이 느껴졌다.
비교적 깨끗한 곳은 그들의 친정이 섭정왕 쪽에 어느 정도 연줄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들의 출셋길과 운명이 걸린 일이었다. 황궁에 남아있는 환관과 궁녀들도 최대한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또한 적지 않은 후궁들이 살아남기 위해,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황궁을 지키는 호위들, 심지어 황궁에 남아있는 수행자들과 사통하기까지 했다.
제 코가 석 자인 황제는 이제 후궁들의 관심을 받을 자격조차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정은 후궁들이 굶어 죽도로 내버려 두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분배되는 자원은 풍족하지 않았고, 황궁의 사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황궁에서 자원을 구체적으로 분배하는 환관과 궁녀들이 제한된 자원을 배경 있는 후궁들에게만 몰아주고 있는 터라 격차가 극심했다. 일부 후궁들은 풍족한 삶을 이어가는 반면, 일부 후궁들은 빈곤에 시달렸다.
상건웅은 한 대전에 연금됐다. 그는 종일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산발하고, 흐트러진 옷을 입고 아무렇게나 살아갔다. 그야말로 한 마리 돼지처럼 길러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환관과 궁녀들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유유히 내려와 시선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상건웅은 눈이 부시지도 않은지 여전히 나무 아래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작은 새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때, 한 나이 든 환관이 다가와 쉽게 들을 수 없는 바깥소식을 전했다. 상조종은 파죽지세로 서쪽을 정벌하며, 진국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고 했다.
“10만 까마귀 장군? 10만 까마귀 장군! 10만 까마귀 장군…….”
상건웅이 갑자기 앙천대소했다. 소리에 깜짝 놀라 나무에 앉아 노닐던 작은 새도 날아가 버렸다.
지금 그의 웃음을 유쾌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처량했다, 그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태양 아래서도 버티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산과 강이 흐르는 전원 풍경 속, 한 농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이곳에서도 서재에 머무르고 있는 소평파는 한창 서탁에 앉아 서신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상조종, 10만 까마귀 장군, 궁임책, 종곡자, 곤림수, 관방의, 운희, 조웅가, 원강, 상조종, 10만 까마귀 장군, 고견성…….”
소평파의 눈이 서서히 커지며, 얼굴빛도 붉어졌다 창백해지기를 반복했다. 양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호흡도 점차 거칠어졌다. 마지막 한 호흡을 뱉어내지 못해 답답한 마음을 내비치고 있기도 했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와 함께 소삼성이 다급히 들어왔다.
“대 공자님, 전황이 불리합니다. 폐하께서 먼저 도성으로 돌아가셨고, 이곳 방어선도 곧 무너질 것 같다고 합니다. 원래 진국 영토로 후퇴해야 할 듯싶습니다. 지금 도 총관님이 공자님을 도성으로 모셔가고자 직접 오셨습니다.”
소평파가 마지막 끝에 매달려있던 깊은숨을 내뱉었다.
“여긴 도성으로 돌아가는 길과 거리가 있다. 그런데도 도략이 직접 나를 찾아왔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주님께서 노신에게 공자님을 모셔오게 하시고, 잠시 시간을 끌며 도략과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도략이 몇 명이나 데려왔더냐?”
소삼성이 잠시 멈칫하다 답했다.
“수십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소평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먼저 가 있어라. 정리를 좀 하고 곧 나가겠다.”
“알겠습니다.”
소삼성이 명령을 받고 방을 나섰다.
잠시 침묵하던 소평파는 한쪽에 있는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안에 작은 납환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납환을 눌러 깨트리니 안에서 검은색 단환이 떨어졌다.
소평파는 단환을 손에 올리고 잠시 내려다보더니, 담담한 얼굴로 단환을 입에 넣고 천천히 삼켰다.
다시 상자를 닫은 소평파가 천천히 서랍에 상자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