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화. 마지막 하나
상조종 부부는 끝내 상숙청에게서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다. 상숙청은 우물쭈물하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상조종은 어지간히 고민이 되었다.
다행히 상조종이 떠날 때, 우유도는 여전히 조웅가를 보내 상조종의 안위를 지켰다. 이건 우유도가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상조종도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떠나기 전, 우유도가 물었다.
“한국 쪽은 어찌하실 겁니까?”
상조종이 대답했다.
“한국은 기세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쪽 세력의 의도는 너무나 명확하지요. 지금 자신들이 가진 세력을 등에 업고, 더 좋은 투항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흥정하려는 것이지요.
누군가는 지금 손에 쥔 병력과 봉토를 계속 가지고 한 지역의 제후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걸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를 들어주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이가 수없이 나타나겠지요. 지금은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그들을 모두 토벌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번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도야, 불파불립이란 말이 있지요. 이번 기회에 병든 몸을 잘라내지 않으면 앞으로 한 몸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건 몸에 자라는 종양과 같아 잘라낼 때 몹시 아프겠지요. 하지만 그대로 두면 각 세력의 이익과 결탁해 추후 다시 손을 쓸 때, 더 큰 방해가 있을 테니 후환이 무궁할 것입니다!
지금 병력을 일으켰으니 한 번에 쓸어 버려야 합니다. 악인이 감히 다시는 그런 생각도 못 하도록 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천하가 10년은 태평할 것입니다. 천하가 충분히 정기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유도 역시 또 수많은 이가 죽게 될 것에 안타까워한 것일 뿐, 이미 잘 알고 있는 얘기였다. 상조종이 각 세력을 복종시키고, 공포를 심어 주지 않으면, 천하를 휩쓸어 그 위엄을 세우지 않으면, 자신들이 떠난 이후 각지에서 불온한 세력이 준동할 것은 자명했다.
이것이 우유도가 사전에 천하 수행자들에게 손을 떼게 한 이유였다. 상조종에게 무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것이고,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자신들이 아직 남아 있기에 천하도 질서를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왕야의 계획대로 하십시오.”
상조종이 포권을 하며 물러갔다.
우유도는 짧게 탄식하며 떠나는 상조종을 지켜보았다. 사실 우유도도 일국이 천하를 제패하는 게 좋은지, 몇몇 나라가 공존하는 게 좋은지 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는 것만은 알았다. 지금 상황을 보면 일국이 천하를 제패하는 게 태평성대로 가는 지름길로 보였다.
상숙청은 떠나지 않고 초려산장에 머물렀다. 그녀를 따라온 까마귀 장군들도 이곳에 남았다. 때문에 초려산장 어디서든 까마귀 장군을 볼 수 있었다.
* * *
손님을 떠나보내고, 우유도는 여무쌍을 찾아갔다. 긴 대화를 끝낸 후엔 거처로 돌아가 원강, 운희, 관방의를 불렀다.
세 사람 앞에서 우유도가 잘 숨겨둔 상자를 열어 보였다. 안에선 마치 살아있는 듯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무량과였다.
세 사람이 순간 서로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자신들을 불러 모아 무량과를 보여주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홍랑, 운 누님과 폐관에 들어갈 준비를 해, 군주도 같이 들어갈 거야.”
세 사람은 더더욱 의아해졌다.
“군주와 같이 폐관이라니?”
관방의가 물었다.
“두 사람이 같이 이 무량과를 이용한다면 분명 군주가 환골탈태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거야. 쉽지 않은 일이란 거 알아. 통상적으로 본인만이 신체의 모든 부분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통제할 수 있겠지.
근데 군주는 수행자가 아니라 혼자 힘으론 이 약효를 받아들이지 못할 거야. 함부로 복용한다면, 그건 독을 복용한 것과 다를 바 없겠지.
여무쌍과 얘기해봤어. 원래 그녀의 경지라면 홀로 군주를 도울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여무쌍은 그 경지를 모두 잃어버렸어. 여무쌍의 말이 한 명은 힘에 부칠 테지만 둘이 협력한다면 문제없을 거라더군. 법력이 부족하면 돌아가며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그러니 두 사람한테 부탁하는 거야.”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게 무량과라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대경실색했다. 얼마 전 우유도는 분명 폐관하고 원영기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운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 마지막 남은 무량과를 군주에게 주겠다는 거야?”
“12개 무량과 중 호족 쪽에 하나 남았어요. 나중에 보내올 거예요.”
이에 관방의가 물었다.
“호족이 가진 건 이미 은희가 사용하지 않았어?”
“아니, 대외적으로 그렇게 얘기한 거지 아직 남아 있어.”
우유도는 이제 상자를 닫고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관방의가 나서서 상자를 품에 안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과연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르네. 근데 말이지,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내가 이걸 가지고 도망가는 게 두렵지 않아?”
“뭐, 남천무방을 데리고 여길 빠져나갈 수 있으면 어디 시도해 보든지.”
관방의가 눈살을 찌푸렸다.
“난 지금 팔도 없어. 그냥 혼자 도망쳐서 무량과로 회복할 수도 있지.”
“만약 홍랑까지 날 배신한다면, 그건 내가 틀린 거겠지. 내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어. 그 팔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미 귀의는 우리 손에 있어. 아마 홍랑에게 새로운 팔을 달아줄 수 있을 거야. 어떻게 할 거야?”
걱정하는 우유도를 보며, 관방의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저었다.
“무량과에 단련되지 않은 팔은 큰 도움이 못 돼. 귀의 쪽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닌데, 다른 사람 팔을 단다고 생각하니 어째 뭔가 불편하고 이상한 느낌도 들고 말이지. 아직 고민 중이야. 귀의도 제5 영역에 들어가는 거야?”
우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들어갈 거야.”
관방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좀 더 고민해 볼게. 나중에 다른 사람의 팔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제5 영역에서 다시 팔을 달아도 괜찮으니까.”
* * *
우유도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즉시 원강에게 상숙청을 불러오게 하고, 그녀와 관방의, 운희를 평소 우유도가 수련하는 밀실로 보냈다.
밀실 석문이 닫혔을 때, 어안이 벙벙한 상숙청을 보고, 관방의가 말했다.
“군주님, 옷을 벗어요. 거치적거리는 게 없어야 해요.”
상숙청은 금세 민망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홍 언니, 운 언니, 갑자기 왜 그러시나요?”
관방의는 상자를 열어 무량과를 꺼냈다. 실내에 붉은빛이 퍼져나갔다.
“군주님은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이게 바로 전설의 무량과에요. 도야는 이것으로 군주의 환골탈태를 도우라 했어요.
이것으로 불로불사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요. 무량과를 복용한 대부분이 비명횡사해서, 정말로 불로불사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거든요.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지금의 이 아름다운 모습을 평생 간직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여무쌍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나이가 벌써 수백 살에 달하지만, 여전히 젊고 아름답잖아요?”
“아!”
상숙청은 넋을 잃었다. 그리고 멍하니 그 빛나는 과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운희가 말했다.
“군주님, 어서 옷을 벗으세요. 혹시라도 우리 두 사람의 법력이 부족해 무량과의 힘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그러니 군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건 최대한 적을수록 좋아요. 다들 여인이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모두 군주님을 위한 것이니까요.”
* * *
산장 마당.
우유도가 뒤돌아보니 원강이 줄곧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데?”
우유도가 물었다.
이에 원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우유도를 바라보았다.
“그 무량과, 사실 마지막 남은 무량과죠?”
원강은 우유도를 잘 알았다. 우유도는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본인을 위해 무량과를 2개나 남겼을 리 없었다.
우유도는 그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제수씨한테 가봐. 그리고 성경에 연락해서, 거기 숨어있는 과거 성경 사람들에게 이주할 준비를 하라고 해. 각 세력들한테는 딴생각하지 말고 한 명도 빠짐없이 인원을 잘 수습해 오라고 하고. 안 그럼 나중에 연좌제를 물을 거라고 전해. 정한 시간까지 인간계를 떠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또 호족에게 연락해 흑운을 부르고, 올 때 화봉황도 데려오라고 해.”
원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떴다.
* * *
한국은 더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남주에서 돌아온 상조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연국 병력과 과거 송국 병력을 따로 소집해, 동시에 각각 다른 곳에서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반면, 수행계 각 세력은 원래 계획에 따라 이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각 문파의 인원들뿐 아니라, 관리 구역의 산수들까지도 모두 한데 모았다. 동시에 가족들이 있는 인원은 가족까지 챙겨야 했다.
속세의 사람 중 누가 같이 갈지, 누가 수행자들과 같이 이주하길 원하는지, 온 천하가 연루돼 있다 보니, 그 규모가 참으로 방대하기 그지없었다.
* * *
북주 자사부 역시 매우 분주했다. 소등운은 한국과 전쟁을 위해 전방으로 향할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때, 귀빈이 방문했다.
소등운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냈다. 손님은 바로 팽우재였다.
이는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기도 했다.
어쨌든 과거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이였다. 가더라도 작별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이 지나면, 팽우재는 천옥문의 수많은 인원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팽우재는 절로 과거를 추억하며, 뭉클한 기분에 젖어 물었다.
“자사 대인 쪽에 혹시 제5 영역으로 향할 사람이 있소? 만약 있다면 우리도 마침 그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같이 움직일 수 있을 것이오.”
소등운이 탄식했다.
“속세 사람 중 떠나길 원하는 사람은 이미 귀 문파를 찾아갔을 겁니다. 다른 이들은 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제 더는 없겠지요. 팽 장문인, 이제 인사 올립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팽우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권하곤, 천천히 뒤돌아섰다.
팽우재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양쌍이 흥분한 얼굴로 뛰어왔다.
“노야! 빨리 나와보십시오.”
소등운은 한창 수하에게 군무에 관한 명을 내리다가 뒤를 돌았다. 그 순간, 그의 눈시울이 급속도로 빨갛게 물들어갔다.
소등운의 시선 끝에 소유아가 있었다. 소유아가 돌아온 것이었다.
진국은 투항 후, 결국 소유아 등을 죽이지 못했다. 혹시라도 상조종의 휘하 장수 소등운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웠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풀려난 뒤, 상조종의 사람들이 그들을 건네받아 가장 먼저 소유아 가족을 북주로 보내주었다.
그 옛날 맑고 청순한 소녀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소유아는 이제 세월을 껴입고, 머리칼에도 하얀 나이테가 몇 가닥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북주 자사 가문의 영애는 제국의 왕비가 되어 추후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나라가 패망한 후 소용돌이 속에 어렵게 자리를 잡았다가 다시 뇌옥에까지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파란만장, 그 네 글자로 그녀의 세월을 다 논할 수 있을까. 화려했던 순간들도, 노심초사 살얼음 위를 걷던 순간들도, 소유아는 누구도 감히 쉽게 상상할 수도 없는 시간을 겪어왔다.
소유아 역시 너무 많이 늙어버린 백발의 아버지를 보았다. 이 순간, 어찌 감정을 통제할 수 있으랴. 그녀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앞으로 달려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아버지! 이 불효녀를 용서해주세요!”
딸은 파도처럼 흐느끼며, 홍수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