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화. 사호의 부탁
물가 정자 내부.
흑석이 두 손으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탄천환을 우유도에게 바쳤다. 그는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는지, 연신 조심스럽게 우유도의 반응을 살폈다.
물론 초려산장을 찾아오기 전, 암중에 투서를 보내 예전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지 물었었다. 확답을 듣고 나서야 찾아온 것이지만, 그래도 조마조마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우유도는 탄천환이 진품임을 확인하고, 가볍게 손장난을 치며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마전은?”
흑석이 깜짝 놀라 다급히 대답했다.
“마전은 오상이 이미 파괴했습니다. 오상은 내용이 흘러나가는 걸 막고자, 내용을 외우고 천마성지에 있는 용광로에 던져버렸습니다. 다만 그 마전이 무엇으로 만든 물건인지, 족히 사흘간 밤낮으로 달구고 나서야 녹았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사람을 불러 확인하셔도 됩니다.”
“좋아. 당신 말을 믿겠소. 나도 약조를 했으면 지켜야지. 과거의 잘못을 더는 따지지 않겠소. 단, 하나 지켜야 하는 일이 있소. 제5 영역으로 이주하는 일에 예외는 없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초려산장에 연락하시오.”
흑석이 안도하며 허리를 깊게 숙이고 포권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보시오.”
“알겠습니다!”
흑석이 포권한 모습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뒤돌아 떠나기 전, 우유도를 힐끗 바라보았다.
지금 흑석은 그야말로 감개무량했다. 오상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진정한 적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구성은 여무쌍을 제외하고, 자신이 누구의 손에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 나갔다. 과연 죽어서도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 * *
흑석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단호가 빠르게 다가와 보고했다.
“원야, 밖에 자칭 ‘사호’라는 자가 원야를 찾습니다.”
“사호?”
원강이 멈칫했다.
단호가 추가로 덧붙였다.
“자칭 원 제국 상장군 호연무한의 집사라고 합니다. 호위들이 보고하기를, 마차를 타고 있었고, 그 안에 아이가 셋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사호는 호위에게 호연위의 딸을 데려와 원야를 뵙고자 한다고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차를 한입 마신 우유도가 원강을 힐끗 바라보았다.
원강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빨리 모셔라.”
단호가 빠르게 움직였다. 원강은 잠시 서성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산장 입구까지 나가 사호를 직접 기다렸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호가 올라왔다. 그의 품에는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가 앙증맞은 다리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단호는 좌우에 각기 하나씩 두 소년의 손을 잡고 뒤를 따라 날아왔다.
잠시 후, 사호 일행이 대문 밖에 내려섰다.
원강은 적지 않은 시간, 제경에 머물렀었다. 사호 또한 당시 원강의 두부 가게를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서로 안면이 있었다.
만나자마자 원강은 사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는 양손에 우유를 발효시킨 과자 한 조각을 쥔 채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사호의 시선은 원강의 팔로 향했다. 그는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팔이 잘리지 않았었나? 설마 제국 황궁에 나타난 사람이 자네가 아닌가?”
“내가 맞소. 비법으로 팔을 재생시켰을 뿐이오.”
안도한 사호가 품에 있는 아이와 한편에 선 두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호연위의 딸이네. 저 두 아이는 호연위 형들의 아들이고. 상장군께서 임종하시기 전, 내게 아이들을 맡기셨네. 원래라면 자네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내가 아이들을 마땅히 책임져야 하겠지. 그러나 초려산장이 일으킨 소란 때문에…….
나 홀로 숨어 사는 건 상관이 없지만, 내 품의 이 아이는 아직 젖도 떼지 않았을 정도로 어리네. 또한 나중엔 공부하고 사람이 돼야 할 것이고, 더 나중에는 혼인하고 가문을 일으켜야겠지. 나와 같이 숲속에서 평생을 숨어 살아서는 안 되는 아이들이네.
원 형이 이 아이 아비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아네. 목숨을 걸고 아이의 아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적과 싸웠었지. 나 또한 상장군의 안목을 믿네. 원 형에게는 믿고 맡길 수 있어.
오늘 이 아이들을 원 형에게 부탁하고자 찾아왔네. 원 형 배후에 있는 세력이라면, 이들이 잘 성장할 때까지 돌보아줄 수 있을 것이라 믿네. 원 형, 부디 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호는 원강이 등에 진 삼후도를 바라보았다.
원강은 앞으로 나와 두 손을 뻗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사호의 품에서 아이를 건네받아, 품에 안았다.
아이의 두 눈은 어머니를 똑 닮아 있었다. 머릿속에선 자연히 그 당당하던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당차게도 말했었지.
‘당신이 좋아요!’
그리고 그 여인이 흘리던 눈물이 떠올랐다. 불타오르는 황궁 속에서 아름답게 춤추던 마지막도 어제처럼 선명했다.
아이의 아버지도 수많은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지면서도 부인을 구해달라 부탁했었지…….
과거의 일은 잔혹하고도 처량했다. 그 모든 기억이 가슴에 딱지처럼 남았다. 그러나 품속의 아이는 아무 걱정도 없어 보였다. 그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원강을 빤히 보다, 이 하나 나지 않은 입으로 까르르, 웃기도 했다.
아이는 다시 침에 젖은 통통한 손으로 과자를 열심히 빨아 먹기 시작했다. 참으로 맛있게도 먹고 있었다. 원강의 눈빛엔 보기 드문 온기가 흘렀다.
이윽고 사호를 바라본 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은 딸이라고 생각하고 키울 것이오. 저 두 아이도 걱정할 것 없소. 마찬가지로 내가 잘 돌볼 것이오.”
“큰 은혜에 말로 하는 감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원 형의 말과 소가 되어 보답하겠습니다!”
사호의 말투가 훨씬 정중해졌다. 그는 원강에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깊게 숙이고 진한 작별을 고했다.
“부디 건강히 지내십시오!”
다시 몸을 일으킨 그가 두 소년에게 당부했다.
“앞으로 원 숙부를 아버지처럼 대하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두 소년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와 떨어지기 싫은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이제 저희를 버리시는 건가요?”
“아주 먼 곳으로 간단다. 착하지. 울지 말고.”
사호가 그대로 떠나려는데, 갑자기 산장 안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멈추시오!”
사호는 바로 뒤를 돌았다. 원강을 포함한 나머지도 모두 뒤돌았다. 그곳엔 검을 지팡이 삼은 우유도가 관방의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사호가 이제 완전히 뒤돌아 포권하며 물었다.
“제가 어찌 불러야 하겠습니까?”
우유도는 원강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다시 두 소년을 힐끗 보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우유도.”
사호가 다급히 포권을 했다.
“도야의 대명을 익히 들어왔습니다. 오늘 이렇게 직접 뵈니 과연 그 풍모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나 또한 사 선생의 대명을 익히 들어왔소. 오늘 선생이 이곳에 아이를 부탁한 것은 무슨 의도요?”
“당연히 대세에 따라, 명을 받들어 제5 영역으로 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쓸데없이 다른 곳으로 갈 것 없이, 이곳에 머물다가 초려산장과 같이 철수합시다. 서로 협력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말이오. 이곳에 선생 한 명 있을 곳이 없겠소? 단호, 사 선생을 객원으로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사 선생님, 가시지요.”
단호가 사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사호는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그럴 것 없습니다. 홀로 다니는 것이 더 편합니다. 홀로 제5 영역으로 향하면 될 것입니다.”
다시 우유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고분고분 따라야 할 것이오. 아니면 어디 도망쳐 보시오. 즉시 여기 이 아이들의 목숨을 거둬버릴 것이오!”
아주 악독한 말이었다. 두 소년은 우유도의 말에 매우 놀랐다.
사호도 크게 놀라 소리쳤다.
“당신……!”
원강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도야!”
그래도 우유도는 단호했다.
“원숭아. 이곳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아둬라. 홍랑, 잘 감시해. 감히 도망친다면 망설이지 말고 죽여버려!”
우유도는 원강을 힐끗 보곤 다시 검을 지팡이 삼아 멀어져갔다.
관방의는 속으론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원강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그는 우유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아이를 두고 이렇게까지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이러는 것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원강이 뒤를 돌았다.
“사 형, 도야 말씀도 일리가 있소. 같이 제5 영역으로 가면 서로 도울 일이 있을 것이오. 일단 여기서 지내다가 나중에 같이 출발하는 게 좋겠소.”
이어, 관방의가 단호에게 눈짓을 했다. 단호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사 선생님, 가시지요.”
또 관방의는 다른 사람을 부르더니, 울고 있는 두 아이를 데려가게 했다.
사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도 감히 이곳에서 소란을 피울 순 없어, 그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원 형, 저들을 지켜주십시오.”
원강도 역시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일단 쉬고 계시오.”
말을 마친 원강은 아이를 품에 안고 빠르게 우유도를 따라갔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묻고 싶었다. 관방의도 마찬가지였다.
* * *
원강은 빠르게 산장 깊숙한 곳의 우유도를 따라잡았다.
“도야, 왜 사호를 괴롭히는 건가요?”
우유도가 코웃음을 쳤다.
“괴롭혀? 내가 사호를 괴롭히는 것 같아? 제5 영역에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어. 근데 사호는 무슨 의도로 저러는 걸까?”
“도야, 사호는 호연 가 충신이에요. 절대 호연 가에 불리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죠. 아이들을 인간계에 놔두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우유도가 원강을 힐끗 바라보았다. 원강이 자신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걸 알고, 다시금 설명을 이었다.
“그래, 바로 그가 충신이라 그러는 거야. 사호가 충신이니 혼자 떠나는 게 비정상이란 거지. 어차피 네가 부탁을 승낙할 걸 알았다면, 이왕 초려산장에 온 김에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안 된단 건가? 왜 혼자 떠나려는 거지?
바로 그가 호연 가의 충신이라 고품에게 복수하러 갈 가능성이 있는 거야! 만약 그가 고품을 죽인다면, 또 진국이 나한테 설명을 요구하면, 내가 세운 규칙에 따라 그를 죽여야 할까, 살려야 할까?”
순간 원강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제야 사호가 돌아오지 않을 각오를 했음을 깨달았다. 우유도의 반응이 빨랐기 망정이었다. 하마터면 또다시 큰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뒤따르던 관방의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작은 단서로 거기까지 헤아리다니. 초려산장에 도야가 없었다면, 오늘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바로 그가 충신이라, 난 사호에게 문제가 생기는 걸 원치 않아.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러니 데리고 있어. 내가 초려산장을 위해 남겨 주는 기반이라고 생각해도 괜찮고. 분명 나중에 제5 영역에서 움직이고 자리를 잡을 때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 도망치지 못하게 잘 감시해.”
원강은 고개 숙여 자신의 품 안에서 열심히 과자를 빨아 먹는 귀여운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내 관방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근데 아이들 앞에서 그런 악독한 말을 하다니. 아마 크게 놀랐을 거야. 아이들 눈에 도야는 그야말로 나쁜 사람이 되었겠지.”
우유도는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었다. 과연 미래에 그 두 아이가 자신과 다시 만날 수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