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화. 작별
고견성이 넘어졌다는 소식에 당연히 수많은 이가 문안을 왔다. 심지어 상조종조차 직접 그를 찾아와 조웅가에게 진맥을 부탁했을 정도였다.
외상은 별것 없었다. 치료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고견성의 머리에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어벙한 눈빛과 태도를 보면, 하룻밤 사이에 사람의 얼굴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고견성이 기어이 멍청한 길을 택했다. 이건 방법이 없었다. 조웅가의 경지가 아무리 높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멍청해진 고견성에게 계속 관직을 강요할 수도 없지 않은가. 누군가 고견성을 만류해달라고 해도,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자평휴도 병문안을 왔다. 그는 침상 곁에 앉아 모든 사람들을 물린 뒤, 고견성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고 형, 아무도 없으니 내 앞에서는 연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 아아…….”
고견성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매우 분노한 자평휴는 소매를 크게 휘두르곤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자평휴가 떠나고, 고소명이 즉각 들어와 고견성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버지, 다 떠났습니다.”
고견성은 그제야 흐리멍덩한 눈빛을 거두고, 정정히 몸을 일으켰다.
“대충 이름있는 사람들은 다 왔다 갔으니, 더는 안으로 들이지 마라.”
“이미 아버지 분부대로 휴식이 필요하다며 밖에서 다 막고 있습니다.”
고견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짐을 지고 다시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방금 자 대인이 매우 화가 난 것 같던데, 무슨 일입니까?”
고견성이 그를 힐끗 쳐다보다, 천천히 뒤돌아 걸었다.
“자평휴는 점잖고 꾀가 적은 사람이라 걱정할 필요 없다. 중요한 건 그 뒤의 가무설이다. 실로 보통이 아니구나. 전에는 그를 얕잡아 본 것 같다.
초려산장이 입장을 밝히지 않았을 땐, 그분에게 무슨 생각이 있는지 몰라 기다려야 했다. 만약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라면, 나와 자평휴는 협력해야 하니까. 그 때문에 다들 승상의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던 것이지.
이제 그분이 입장을 밝혔다. 내가 걱정하는 일을 가무설이라고 모를까. 난 가무설이 자평휴를 물러나게 할 것이라 예상했다. 자평휴가 화를 냈다면 틀림없다. 내가 그보다 먼저 움직였다는 것이니, 내 예상이 맞는 것이지.
남약정은 어리석지 않다. 분명 내가 그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물러났다는 걸 알 것이다. 그렇다고 왕야 앞에서 이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나를 몰아냈다고 폭로할 수도 없는 일이지.
먼저 물러난 사람은 모범이 될 테고, 남약정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호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반면 나중에 물러나는 사람은 모방이 될 테니, 그 효과는 크게 반감되겠지. 난 당연히 자평휴가 선수 치도록 둘 수 없었다.
자평휴가 화를 낸 건 바로 그것 때문이다. 내가 선수를 쳤으니, 당분간 감히 물러나겠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시간을 좀 끌고, 적당한 변명거리를 마련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럴 수 없지.”
고견성이 냉소를 지었다.
고소명도 비로소 뭔가 깨달았지만, 여전히 승복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아버지가 계속 좌승상으로서 든든한 뒷배가 돼준다면, 그 이득이야말로 얼마나 막대하겠는가.
“어쩌면 아버지가 확대해석했을 수도 있습니다. 남약정을 살펴보니, 그런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고견성도 아들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뒤를 돌았다. 뭔가 가르침을 주려는 듯, 그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와 그의 의도가 중요할 것 같더냐? 그가 올라서지 않으면, 아래 있는 사람들은 올라갈 수 없다. 그를 보좌하는 양 날개는 당연히 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를 위해 앞에 있는 것들을 다 쓸어버리려 할 것이다.
그들 모두가 왕야를 오랫동안 모신 사람들이다. 지금은 천하가 통일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 왕야는 여전히 그분 심복들로 상황을 안정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인을 의지하란 말이냐?
남약정의 세력은 바로 남주의 세력이고, 왕야의 적통 세력이다. 조정에 누가 감히 그들을 막아설 것이냐. 분수를 모르면 우리 부자는 좋은 꼴도 보지 못하겠지. 남약정의 양 날개가 가장 먼저 치고 들어올 사람은 바로 너다!”
고소명이 깜짝 놀랐다.
이내 고견성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내가 먼저 나서서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남주의 세력은 분명 너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분수를 아니, 저들에게 이득이 떨어진다면 너에게도 나누어 주겠지.
마찬가지로 남약정도 이 호의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니 추후 누군가 너를 건들고자 한다면, 남약정도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토사구팽이 아니겠느냐.
나는 물러났고, 이제 너는 남약정을 곁에서 모시고 있으니 바로 남약정의 사람이다. 남약정의 보살핌은 이 아비보다 나을 것이다.
최소한 부자지간 사사로운 정에 얽매인다는 혐의는 벗어날 수 있으니, 남약정이 너를 쓰기도 훨씬 쉽겠지.
왕야께서도 이 아비의 체면을 봐서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아. 지금은 무엇보다 저들의 칼끝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알겠느냐?”
고소명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인 후,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언제까지 그리 연기하셔야 합니까? 설마 평생 그리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안팎으로 수많은 눈과 귀가 있습니다. 만약 시간이 길어지면, 들킬 수도 있습니다.”
고견성이 소매를 휘둘렀다.
“소심한 것, 이 무슨 큰일이라고 그리 걱정한단 말이냐? 내가 낫고 싶을 때 언제든 나을 수 있다! 걱정하지 말아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적당한 순간이 올 것이다. 대충 보약 한두 첩 지어 먹고 나았다고 하면 그만이다.
설마 나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있단 말이냐? 내 병이 나으면 안 된단 말이냐? 이미 판이 만들어졌다. 그때 가서 누가 남약정을 내리누르고 나를 다시 자리에 앉히기라도 하겠느냐?”
아버지의 용의주도함에 고소명도 깨닫는 바가 많았다. 마음 깊이 탄복한 그는 가르침에 감사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 * *
“연기입니다! 노부에게 그 정도 안목은 있습니다. 그 늙은 여우는 분명 연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멍청한 척 연기까지 하다니…….”
자부로 돌아온 자평휴는 가장 먼저 가무군을 찾아와 고견성의 후안무치한 행동에 대해 늘어놓았다.
가무군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 붓을 들어 판자에 글을 적어 내려갔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봐야 합니다. 어쩌면 물러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물러나지 않는다니요? 혹시 이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평휴가 깜짝 놀라, 탁자 위 어젯밤 열심히 수정한 상소문을 가리켰다.
가무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평휴가 바로 질문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무군은 다시 붓을 들었다.
「남약정은 범재가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분명 찾아와 승상의 하야를 저지할 것입니다. 추후 저들이 기어이 조당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한다면, 그때 저들의 공세를 피해 물러나도 늦지 않습니다.」
자평휴도 나름 조당에서 오래 구른 사람이었다. 시위를 당기는 소리만 들어도, 그 고상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에 잠긴 자평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일단 천도를 한 후에 다시 결정을 내리시지요.”
「저는 새로운 도성에 가지 않겠습니다. 승상 홀로 가십시오.」
자평휴가 깜짝 놀랐다.
“선생님은 안 가시겠다고요? 어째서 말입니까?”
가무군이 미소를 지었다.
「천하가 평정됐습니다. 산과 강이 한산하니, 더는 담벼락 안에 묶여있고 싶지 않군요. 호위 두셋을 선별하고, 아름다운 여인과 대를 잇거나 산과 바다의 글과 그림을 살피며 자유롭게 떠돈다면 그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자평휴가 대경실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혹시 노부가 선생님을 잘 모시지 못한 겁니까? 혹시 화나게 한 부분이 있는지요?”
가무군이 손사래를 치며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재물도 없이 어찌 그 먼 길을 나설 수 있겠습니까. 승상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모든 것이 싫증 나면 자연스럽게 돌아올 것입니다.」
자평휴가 안도했다. 완전히 갈라서려는 것인 줄 알았더니, 그냥 유람을 떠나겠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여전히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안 계시면, 노부는 누구에게 자문을 구한단 말입니까?”
가무군이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승상께서 그 자리를 보전하고 싶으시다면, 한 가지 꼭 기억하십시오. 싸우지 말고, 빼앗지 말고, 치욕을 참고, 나서지 말고, 작은 땅을 지켜야 합니다. 황제 입의 혀 같이 군다면, 아무런 위험 없이 평안할 것입니다.」
자평휴는 가무군이 가르쳐준 큰 틀의 방향을 진지하게 새겨넣었다.
* * *
드디어 출발이었다. 상조종 부부는 특별히 초려산장을 방문해 우유도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 후 광활한 인파를 이끌고 후진국 도성으로 향했다.
조웅가를 배웅한 일행은, 산 아래 인마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유도는 문득 뒤돌았다가, 서글픈 표정의 장홍 모자를 발견했다. 아마 후진국 도성이 연국의 새 도성이 된다는 것에 못내 수심이 깊은 듯했다.
일전에 우유도는 두 모자에게 헛된 욕심을 버린다면, 자유로운 여생을 보장해 줄 것이라 조언했다. 모자는 바로 우유도에게 약속했고, 우유도는 다시 그들에게 2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하나는 하영패가 가무군을 스승으로 삼아 모자의 평안을 보장받는 것, 또 하나는 초려산장에 남아 원강을 따르며 안위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모자는 계속 우유도를 따르고자 했지만, 우유도는 곧 제5 영역으로 가기 때문에 그들을 이끌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렇게 장홍이 나서서 후자를 선택했고, 두 모자는 원강을 따르게 되었다.
한편, 연국 새로운 도성은 눈 깜짝할 사이 크게 발전을 이룩했다. 상업이 매우 흥하기 시작했고, 번성한 만큼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 * *
뇌옥 안.
갑주를 입은 나대안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타났다. 그는 허리춤에 걸린 보검에 손을 올린 채, 옥졸을 따라 한 감옥 앞에 섰다.
감옥 안엔 두껍게 쌓인 볏짚 위에 누운 나소안이 있었다. 그는 유유자적하게 다리를 꼬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소안이 부정을 저질렀다. 받으면 안 되는 돈을 받은 것이다. 그걸 누군가에게 들켰고, 증거가 확실한 이상 뇌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옥졸은 문을 열고 뒤로 물러났다. 나대안은 바로 성큼 들어가, 나소안이 뭔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멱살을 움켜쥐었다.
짝!
따귀를 맞은 나소안은 머리가 울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가 분노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형님! 절 왜 때리는 겁니까!”
나대안도 못지않게 화가 나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곤 나소안의 코앞에 삿대질을 하며 분을 토해냈다.
“못난 놈! 지금 왕야께서 기율을 엄히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감히 그 더러운 손을 뻗는단 말이냐! 우리 가문의 명성이 네놈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구나! 돈이 필요하다면 날 찾아오면 됐다. 이제 어머니가 너 때문에 날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시니, 난 왕야를 뵐 면목도 없다! 그런데도 반성은커녕 뭘 잘했다고 그리 당당한 것이냐! 예의나 염치란 걸 알긴 하느냐!”
나소안은 지지 않았다.
“녹봉으로 이 도성에서 어찌 편히 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뭘 많이 받은 것도 아닙니다. 형님은 겨우 그거 가지고 이처럼 형제의 정도 무시하고 제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후안무치한 놈!”
나대안은 크게 분노해 나소안을 냅다 두들겨 팼다. 그리곤 엉망진창이 된 나소안을 내버려 두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