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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검제-12화 (12/141)

#012화.

일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상천은 단 하루도 단월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상천의 노력에 비해 단월검의 성취는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호천강의 비무를 보며 문제점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천은 점점 더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호천강의 검법을 통해 자신에게 부족한 운용과 조절에 대한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단월검을 다듬을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상천은 오로지 무공 수련하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끊임없이 막히는 것이 있었고, 어떤 것은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안 나오는 경우가 생겼다.

그 때문에 상천은 시간이 갈수록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상천의 모습은 겉으로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종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상천에게 별다른 가르침이나 조언을 하지 않았다.

처음 백룡문에 와서 종삼으로부터 무공을 배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는 종삼이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헤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 버거운 한계에 부딪치게 되고 막막함만 커져가자 종삼에 대한 원망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상천은 전과 다르게 그런 불만들을 조금씩 종삼에게 털어놓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충돌이 잦아졌다.

사춘기라 감정 기복이 심해진 상천은 종삼에게 이따금 심한 말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종삼은 겉으로는 상천을 나무랐지만 언제나 슬픈 눈빛으로 뒤돌아섰다.

지난 일 년 동안 상천과 종삼의 사이는 그렇게 흘러왔다.

제법 해도 많이 짧아지고 두꺼운 옷을 입지 않으면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월동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지만 백룡문은 딱히 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저 겨울에 대비해 장작을 더 많이 준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종삼은 아침부터 나무를 하러 다니기에 바빴다.

그러다 보니 전에 비해 상천 혼자 남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감정 상할 일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속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후…….”

연무장에 홀로 앉아 있던 상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함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늘어가는 건 한숨뿐이었다.

“갑갑해.”

문득 연무장에 앉아 백룡문을 스윽 훑어보던 상천이 중얼거렸다.

“좀 나갔다 올까?”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이 백룡문을 나섰다.

상천은 이번에도 옆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왔지만 옆 마을의 분위기는 여전했고,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저잣거리에 접어든 상천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부지런히 걸어 상천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이 종삼을 따라 백룡문으로 가기 전 생활한 곳이었다.

“다들 아직 있으려나?”

백룡문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도 아니고 옆 마을도 자주 왔건만 정작 예전에 살던 곳에 와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마음먹고 찾아온 것이다.

“여긴 변한 게 없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설프게 판자로 만들고 제대로 된 문이 없어 거적때기로 대충 막아놓은 가건물이 몇 개 있었고,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 몇 명이 콧물을 흘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천이 품을 뒤졌다.

평소에 돈 쓸 일이 거의 없는 상천은 지금 당장 가진 돈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동전 몇 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거 가지고는 살 수 있는 게 없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이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가건물 앞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잠시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얘들아.”

잠시 후, 상천이 나직이 아이들을 불렀고, 그 목소리에 놀던 것을 멈춘 아이들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상천을 바라보았다.

그중 제법 강단있어 보이는 아이 한 명이 다른 아이들 앞을 막아섰고, 다른 아이들은 그 뒤에 숨은 채 상천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희밖에 없니?”

“누구세요?”

다른 아이들 앞에 서 있는 아이가 상천에게 물었다. 제법 용기있는 모습이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예전에 여기에 살았던 형이야. 어른들은 안 계시니?”

“정말 예전에 여기 살았어요?”

아이는 상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이 궁금한 것만 묻고 있었다.

“그래. 진짜로 여기 살았어. 이제 형 말에 대답해 줄래? 너희만 있니?”

그러자 아이들이 도리질을 쳤다.

“뭐야? 누구야?!”

그때, 상천의 뒤쪽에서 굵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천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많이 굵어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예전의 낯익은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어?”

상천이 뒤돌아 그를 바라보자 청년 역시 낯익은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랜만이야, 병목 형.”

“어? 너, 천이 맞지?”

병목의 물음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병목이 반가움에 두 팔을 벌리며 상천에게 다가갔다.

“반갑다! 아차! 하하하!”

반가운 나머지 상천을 끌어안으려던 병목이 말끔한 상천의 옷과 더러운 자신의 옷을 번갈아 바라보며 멈칫하고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잘 지냈어?”

“잘 지냈지. 넌? 아, 옷 보니 잘 지낸 거 같다. 다행이다, 정말.”

병목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말투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땟물이 줄줄 흐르고 드러나는 치아는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상천이 보기에는 그 어떤 웃음보다 아름답고 멋있게 보였다.

“형만 있어? 다른 애들은?”

“아, 이제 곧 올 거야. 시간 됐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더니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많이 자라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예전의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어 알아보는 데 어렵지 않았다.

“다들 빨리 와봐! 누가 왔는지 보면 깜짝 놀랄걸!”

병목이 늑장부리며 돌아오는 동생들에게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왜? 누가 왔는데?”

돌아오는 무리 중 여자 한 명이 물었다. 그러다가 상천의 얼굴을 보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오랜만이야!”

상천이 손을 들어 흔들며 그들을 반겼다.

그러자 그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 모두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멍하니 상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왜들 그래? 천이잖아. 못 알아보겠어? 안 반가워?”

병목의 말에도 그들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에 손을 들고 있던 상천이 뻘쭘해져 손을 내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왜들 저러지?”

그렇게 중얼거린 병목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전부 상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왜들 이래? 천이가 오랜만에 왔잖아. 다들 보고 싶어 했으면서 왜 이래?”

그 물음 때문일까.

그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 소년 한 명이 울먹이기 시작했고, 그것이 전염되었는지 다른 사람들까지도 전부 다 울먹이기 시작했다.

“얼라리? 뭐야? 단체로.”

그 모습을 보고 병목은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던졌고, 그 말을 기점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상천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으앙! 형!”

가장 먼저 울먹였던 소년이 울음을 터뜨리며 상천에게 와락 안겼고, 다른 아이들 역시 상천을 붙들고 울었다.

“내가 너무 오랜만에 왔지?”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상천은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상천을 경계하던 아이들은 눈만 껌뻑이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고, 왜들 이래? 천이 당황하게.”

병목이 상천에게 달려들었던 아이들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에 다들 떨어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훌쩍이고 있었다.

“괜찮아. 놔둬.”

상천이 웃으면서 병목에게 말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한 식경 정도를 더 훌쩍거리다가 하나둘 진정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아이들은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배불리는 아니어도 허기를 달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상천이 입을 열었다.

“뭐라도 좀 사가지고 왔어야 하는데…….”

“뭘 사가지고 와. 괜찮아. 우리도 나름 먹고살 만해.”

상천의 말에 병목이 고개를 저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 거 보니까 안심이야.”

“너도 잘 지낸 거 같아서 다행이다. 그때 그 아저씨 따라간다고 했을 때 걱정 많이 했는데.”

병목의 말에 상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도 알잖아. 난 어디 가서든 굶어 죽지는 않아.”

“하긴, 너니까.”

상천의 말에 병목도 누런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얘기나 좀 들어보자. 칠 년 만에 나타났으니 할 얘기도 많겠지?”

그 말에 상천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 먹었으면 이제 들어가자! 여기 이 형이 재밌는 얘기 해준대!”

병목이 박수를 치며 아이들을 건물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상천도 그 뒤를 따랐다.

상천이 그곳을 떠난 것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해가 많이 짧아져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금방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상천이 떠난다고 하자 잠든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왔다.

“조심해서 가.”

“알았어. 형도 잘 지내고 있어. 또 올게.”

“안 그래도 돼. 넌 우리랑은 다른 사람이야. 넓은 세상에서 활개 칠 사람.”

병목의 말에 상천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또 올게.”

그 말을 남기고 상천이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회포를 푼 상천은 기분 좋게 백룡문으로 돌아왔다. 이미 날이 어두워진 이후라 종삼은 귀가를 한 상태였다.

“어디 갔다 왔어?”

“그냥 바람 좀 쐬러.”

둘 사이의 대화는 무미건조했다. 지난 일 년 간 변한 두 사람 사이의 모습이었다.

“일찍 다녀. 점점 해도 짧아지는데.”

“알았어.”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상천을 보던 종삼이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말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두 사람은 대화 없이 묵묵히 밥만 먹었다.

고개를 드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둘 다 고개를 숙이고 먹는 데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아저씨.”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상천이었다.

묵묵히 밥을 먹다가 상천의 말에 고개를 든 종삼은 입에 넣은 음식을 씹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 돈 좀 주면 안 돼?”

“돈? 갑자기 왜?”

“그냥.”

상천의 대답에 종삼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다가 쓰려고 그러는데?”

“딱히 쓸 데가 있는 건 아니고…….”

돌아온 상천의 대답에 종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된다.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허투루 쓸 돈 없어. 사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를 해. 다는 아니어도 사줄 수 있는 건 사다 주마.”

종삼의 말에 상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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