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귀환, 당유혼 】
길고 긴 무림사(武林史)의 시작으로부터, 이런 말이 있다.
독(毒)은 위험하지만, 최고가 될 수는 없다고.
그리고, 그걸 들으면 길길이 날뛰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뭐? 좋아, 소림의 중놈 새끼든, 마교의 광신도 새끼든, 다 데려와 봐, 이거 처먹고 피똥 안 싸는지 보자!”
* * *
사천당문(四川唐門).
병장기를 다루는 다른 문파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독과 암기를 주로 다루는 그들은 사천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림사의 깊은 격언과 같이, 독과 암기는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위험할 수 있어도 절대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기에 언제나 그 한계가 정해져 있던 가문이었다.
실제로도 사천 내에서는 여러 구파일방의 쟁쟁한 대문파들을 제치고 성의 이름을 가문 명 앞에 당당히 붙일 만큼 제일세(第一勢)를 자랑했으나, 그 명성을 무림 전역에 견주어 제일이라 자부하는 일은 없었다.
허나, 그런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뛰쳐나온 당가의 송곳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천당가의 절대 고수 당유혼이었다.
당유혼은 언제나 누군가가 사천당가의 한계에 대해 입 모아 말할 때마다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까지 마, 이 새… 응?”
벌떡!
늘 습관적으로 말하다 못해 결국 입에 붙어버린 그 대사를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당유혼은 순간적인 발작을 멈추며 모든 움직임을 일시 중지했다.
잠에서 깨듯 외치며 일어선 것까지는 좋은데, 이건 뭐, 평소 자신이 익히 느끼던 감각과는 완전히 달랐으니까.
“…뭐여, 여기가 어디야?”
원래 이렇게 외치며 깨어났으면 보이는 것은 자신의 침실이어야 할 것일진대, 주변에 보이는 풍경은 푸르디푸른 산천초목이다.
왜 자신이 여기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던 당유혼은 마치 숙취 끝에 중간이 상실된 듯한 기억을 되짚으며 회상했다.
“그러니까 나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십만대산을 향해서… 천마와 동귀어진… 동귀, 어? 처, 천마! 천마!!”
이 새끼를 죽여야 해!
당유혼은 다시 서둘러 주변을 돌아봤다.
하지만…….
“응? 뭐야, 여긴 어디야?”
다시 똑같은 대사를 뱉으며 일어나보니 산천초목이다.
‘아니, 그거야 분명 한번 인지했던 것이긴 한데…….’
“왜…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기억이 옳게 된 것이라면, 분명 자신은 시산혈해의 십만대산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주변에 널린 것은 붉은 물이 다 빠진 녹음 가득한 산천초목이요, 십만대산의 봉우리 개수만큼이나 가득하던 시체들은 온데간데없다.
그 속에 있는 것은 오롯이 자신뿐이었으니, 지금의 당유혼은…….
“…어? 뭐, 뭐여? 내 몸뚱이 왜 이래? 내 몸!!”
끊임없는 훈련과 피 튀기는 실전으로 극한으로 단련된 근육, 군살 한 점 없이 단련된 예술작품과 같은 육신…은 온데간데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빵빵하지는 않아도, 평범하게 살 오른 배때기뿐!
그러니까 이건 마치…….
“무슨 애새끼 몸뚱이도 아니… 아니, 이건 진짜 애새끼 몸뚱이잖아?!”
짧다. 팔도 짧고 다리도 짧다.
단순히 짧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휘두르면 바위도 부수는 팔과 주먹도, 뛰어오르면 높디높은 성벽도 가볍게 넘어 재끼던 다리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딱 어린 몸뚱이 하나.
“…이, 이게 뭐냐?”
비유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는 몸뚱이뿐이고, 걸친 것은 실오라기 하나 없는 상태이니, 허허로운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허허……. 무슨 녹림 산적 놈들한테 삥이라도 뜯겼나…….”
녹림은 중원의 수많은 산천초목마다 무슨 산신령처럼 기거하며 인적 드문 산길을 지나가는 나그네의 삥을 뜯는 산적 놈들의 집단이다.
물론 그들에게 가진 제물을 뜯기는 것은 당연 살아생전 겪어본 적 없는 경험이지만, 당유혼은 그것 외에는 자신의 상태를 비유할 만한 방법이 없었다.
“…미치겠네.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으니…….”
차라리 길 한복판이라면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하나 붙잡고 물어보겠다만, 주변을 돌아보니 있는 것은 늘 푸른 산천이요, 들려오는 것은 지저귀는 새소리뿐인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상황 속에서 고심하고 또 고심하던 당유혼은 결국 궁구를 끝냈는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주먹을 굳게 움켜쥐었다.
“아, 모르겠다. 여기서 고민해 봐야 뭐가 더 나오냐.”
푸르디푸른 이 자연경관에서 기다려 봐야 나오는 것은 나뭇가지 사이를 퍼득이며 날아드는 산새나, 땅 밑에서 솟구치는 지렁이뿐.
일단은 사람 인분이나마 싸 재껴진 흔적이 남아있을 만한 곳을 찾아가든가 해야겠지.
상황은 당황스럽지만, 당유혼은 그 독하디독하기로 유명한 당가에서도 가장 독한 놈이었다.
당황스럽긴 해도 이 상황에 그저 넋 놓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의지로 가득 찬 채로 움직이려 했다.
우선은 보법으로 도심으로 향한다!
그 생각에 발걸음을 떼어냈는데,
“그러니 우선은 바… 크아악!!”
쿠당탕!
딱 세 걸음 가자마자 온몸이 기괴하게 뒤틀려 버려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이, 이……!!”
꼬라박듯이 땅바닥에 처박힌 당유혼의 몸은 흙과 자갈 조각으로 범벅이 되었고, 그 중간중간 마찰로 생긴 상처에서 쓰라린 고통이 짙게 느껴졌다.
“큭……. 이, 이게 뭐야……. 왜 기혈이 이따위야?”
당유혼은 곧바로 자신이 넘어진 이유를 분석했고, 그 결과를 아주 간단히 도출해 냈다.
그도 그럴 것이, 곧바로 보법을 밟아 근처 인적이 이어지는 곳으로 향하려 했는데 응당 보법을 밟으면 함께 이어져야 할 내공이 유동되지 않은 것이다.
보법이 무엇인가?
무림인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을, 자연의 기운을 체내에 갈무리한 내공을 바탕으로 특별한 걸음걸이를 내디디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 할 내공이 단 한 방울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곧장 자신의 체내를 관조한 당유혼은 금세 그 이유를 알아냈다.
‘기혈이… 다 막혀있다…….’
단전으로부터 시작해 사지백해로 이르는 혈도가 전부 막혀 있는 것이다!
“어디 한 군데야 뚫려 있을 수도 있겠다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당유혼의 육체는 극한이라는 말이 더 없이 어울릴 정도로 발달된 육체였다.
단순히 무인으로서 단련시킨 것이 끝이 아니라, 독의 명가이기에, 반대급부로 의(醫)에서도 천하제일을 다투는 사천당가의 신체 기술이 집대성된 육신이었다.
그런 자신의 육신이 무슨 내공이라고는 한 점 가지지 못한 그런 나약한 몸뚱이가 되었다.
“이, 이런 게 어딨어!! 내 몸!! 내 몸뚱이!!”
처절한 외침이 인적 드문 자연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 * *
“…하, 하……. 우, 웃기지 마. 나는, 나는 돌아간다…….”
한동안 허망함에 빠져 있던 당유혼이지만, 의지의 당문인으로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짜 불알 두 쪽 빼고 전부 잃어버렸다는 그 상실감이 주는 충격이 어마어마했지만, 뭐가 됐건 당가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 의지가 몸뚱이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내공이 없어도 돼!! 튼튼…하지는 않아도, 일단은 두 다리가 있잖아.”
천마의 최후를 생각해 보라.
그는 두 다리가 잘리고 양팔도 녹아내렸지만 핏물 속에 쓰러져 범벅이 된 상태로도 음험하게 웃지 않았던가?
그는 실로 지독한 종자였다.
“…사실 그놈도 당문의 사생아가 아니었을까.”
끙차.
절망에서 일어난 당유혼이 두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법을 못 쓴다면 몸뚱이라도 열심히 놀려야 할 터. 흙밭에 숨은 돌조각에도 상처 입는 맨발을 부지런히 놀려 산속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산골짜기……. 더럽게도 넓네.”
한 반나절쯤 갔을까?
저 끝에 있던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때 당유혼은 눈앞이 노랗게 물드는 기분을 체감했다.
‘한창때는 칠주야를 보법으로 날아다녀도 무리가 없었는데…….’
약해 빠지고 내공마저 다 날아간 육체는 겨우 반나절 걸은 것만으로도 체력이 다해 쓰러지게 생긴 상태였다.
이대로는 진짜 기진맥진해서 훼까닥 할지 모를 상황. 이 정도 되니 당유혼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될 게 있었다.
‘만약 여기가 십만대산이라면… 이건 심각한 문제다.’
십만대산이 왜 십만대산인가?
일단 기본적으로 아득하게 넓기 때문이다.
사람이 봉우리를 세다 세다 못 세서 ‘아, 씻팔. 모르겠다, 그냥 십만 개쯤 되겠지.’ 하고 지어진 게 십만대산이라는 누군가의 진지한 추론이 있을 정도로 아득한 넓이를 자랑하는 게 십만대산이다.
어찌 된지 모를 이 나약한 몸뚱어리로는 단순히 걷는 것만으로도 탈진해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마교도를 마주치는 것은 고사하고, 이 몸뚱이로는 야생 짐승을 만나기만 해도 그 새끼들 한 끼 일용할 양식으로 전락한다. 아니면 그전에 그냥 길거리에서 객사하거나.’
당장은 상황 파악이 우선이지만, 그럴 만한 여건도 되지 않으니 당유혼은 일단 멈춰서고 자리에 앉았다.
“우선은… 최소한의 준비라도 갖춰야 한다. 그건 아무래도, 무공이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생 무인인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천마 새끼마저 인정했던 천하제일에 이르는 무공적 지식과 당가 제일 고수로서 가진 절대적인 의학적 지식이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니…….
“아니, 잠깐만. 이거 잘된 거 아닌가?”
턱― 하니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당유혼은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푹신푹신한 뱃살이 자리 잡은 복부가 보였지만, 당연히 시선은 그보다 더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예전 몸뚱어리가 극한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사실 진짜 극한은 아니었잖아.’
당가 지식의 극한이니, 뭐니, 하지만, 진실로 극한에 이르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진짜 극한에 이르렀다면, 자신은 진작에 천마의 모가지를 따버리고 귀환해서 당문에서 떵떵거리고 살았을 테니까.
“내가… 천마를 혼자 잡아낸 건 아니잖아.”
마지막 순간, 당유혼은 분명 천마에 대해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결국 두 발로 섰던 것은 당유혼이지만, 그건 결코 일 대 일로 당당히 승부를 결해서 얻은 결과는 아니었다.
‘무림 최후의 결사대에 각종 함정과 진법, 암기와 극독을 다 퍼부어서 이긴 결과였지.’
만약 천마와의 결전이 일 대 일이었다?
그랬다면 당유혼은 천마의 팔다리를 하나라도 자르기는커녕, 손가락 하나도 얻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야, 그래도 손가락 두어 개 정도는……. 아, 아니지!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옆길로 빠지는 잡념에 화들짝 놀란 당유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진실로 극한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거다.”
이유는 많다.
일단 당유혼이 무공에 입문한 시기도 늦었거니와, 나중에는 당문 제일을 넘어 무림 제일에 이르렀지만, 그 이전에는 당유혼 역시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고 잘못된 지식으로 그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꾼 당가의 지식이 수십을 가볍게 넘어선다는 것은 당가의 지식에 따라 손을 댄 육체가 실제로는 정답이 아니었다는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을 넘어서 극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언저리 정도에는 이르렀다는 것 자체가 당유혼의 대단함이지만, 만약 그게 아니었더라면 더 오를 구석은 얼마든지 남아있었다.
당유혼 역시 치를 떨며 안타까워했던 그것들이 지금 이 순간 의식 속에 떠 올랐고, 그것이 다시 물거품처럼 사라져갈 때쯤, 그의 두 눈이 정광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거, 생각해 보니 오히려 호재잖아?”
갑자기 어려진 육신, 무공 한 자락 익히지 않은 듯 최초로 돌아온 듯한 그런 육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더 강해질 수 있다. 처음부터… 가장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는 거야.”
외견으로 보기에 가진 거라곤 불알 두 쪽밖에 없을지 몰라도, 당유혼의 머릿속에는 천하제일의 지식과 그 기억이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자, 이내 결연한 의지가 당유혼의 두 눈에 깃들었다.
꽉 쥔 주먹, 여기 당가 제일 고수가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