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광형 상단 】
천마의 목을 따기 위해 결사대로서 십만대산으로 향했던 그 날로부터 눈을 뜬 지금, 세상은 한 세대가 흘러 있었다.
‘삼십 년이 지났다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붉디붉은 시산혈해가 아닌 푸르디푸른 산천초목의 중앙이었다.
당시 십만대산에서 치러진 전쟁은 머릿수만 수만을 넘는 이들의 피로 점철되었고, 그건 제아무리 원상태로 돌아오려는 자연이라 해도 그 붉음이 다 빠지는 데 하루 이틀 걸릴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천당문이란 이름이 지워져 있었지.’
사천 하면 당문이고, 당문 하면 사천이다.
역대 당문의 선조들은 씁쓸하게도 자신들이 사용하는 무공의 한계상 암만 잘 쳐줘도 그 영향력이 무림 전역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천에 한해서만큼은 기를 쓰고 왕처럼 군림하려 했었다. 때문에 당유혼의 놀라움은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 번째는 눈감았다 뜨니 삼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고작해야, 삼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렇게나 기를 쓰고 사천에 힘을 키운 당가다.
사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성도 곳곳에 부동산 알박기는 기본이요, 지역 유지 및 관리들 중 뒷돈을 얻어먹은 놈들은 일렬횡대로 세우면 황궁 중앙 광장을 채울 정도는 될 것이다.
‘뒷돈 찔러 넣기야, 사명이 녀석 때문에 우리 대에 들어 좀 줄어들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리 쉽게 망할 당가가 아닐 텐데…….’
뭔가 냄새가 난다.
‘구린 냄새가, 그러니까…….’
“저… 소협?”
“웅, 옙?”
“고기가 질기십니까?”
우물우물.
“아밈뎁요?”
“아, 다행이십니다. 갑작스레 표정이 좋지 않아지셔서… 혹시 식사 거리가 입에 맞지 않으신가 했습니다.”
잔뜩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입 안에 든 돼지고기와 함께 상념은 우물우물 씹어 넘겼다.
꿀꺽!
“에이, 여기 음식은 천하제일이네요! 그런데, 어딜 가신다고 하셨죠?”
‘참 빨리도 물어본다.’
이미 밥그릇을 세 개나 비워낸 주제에 이제야 그런 것을 묻는 걸까.
어이없어하는 식은 시선들이 쏟아졌으나, 정작 그 시선을 받는 대상은 피부 두께가 돼지비계보다 더 한지, 다시금 입에 처넣은 돼지고기를 우물우물 씹어 넘겨 버렸다.
‘후우……. 휘말리지 말자… 휘말리지 말아.’
미친놈 널뛰기하는 데 괜히 정상인의 논리를 앞세웠다가는 같이 말리기밖에 더 할까.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쉰 광세운은 억지로 입가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정확히는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본단인 감숙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희 광형 상단은 청해와 감숙의 경계 지점에 위치해서, 청해 끝단에서 구할 수 있는 귀한 약재들을 감숙으로 운반하는 것이 저희 상행의 주력이지요.”
감숙이라.
숟가락을 입에 물고 쩝쩝 빠는 당유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감숙이면 공동파 녀석들 사는 곳이었지?’
도가적 기질이 강한 정파의 구파일방 중에서도 특히나 그쪽 기질이 강한 이들이 모인 곳이 공동파다.
곤륜파보다야 중원에 가깝다지만, 그마저도 변방이나 다름없고 문파의 색채 자체가 무늬만 도가인 다른 구파일방과는 달리 엄청나게 도교적 기질이 강했다.
“공동파랑 거래를 트시나 봐요?”
“예? 에이, 저희가 어찌 감히 대 공동파와 같은 분들과 거래를 트겠습니까. 그분들의 속가문파인 소양검문(小陽劍門)에게 물건을 발주받는 형편이지요.”
우물.
“그래요?”
그렇구나.
‘당문은 쫄딱 망했는데, 공동파는 그대로구나.’
속가문파라는 것은, 대문파의 제자가 문파 밖으로 나아가 새로운 문파를 하나 창설하는 것이다.
그 경우 대문파의 간판을 빌려와 그 휘광으로 일정 수준까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지만, 암만 성장해도 그 문파의 아래에 놓인다는 제약이 있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한계가 정해져 있는 것 같으나, 그걸 감안하고서도 훨씬 이득인 게 속가문이고 그 수가 곧 본가의 강함을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그래서 이상한 것이다.
‘당가가 이리 쉽게 망할 리가 없는데…….’
천마를 상대하기 위해 향했던 결사대에는 당시 구파일방은 물론이요, 사파에 속하는 이들 중에서도 이름난 고수들은 전부 참전했었다.
그리고 전부 다 죽었다.
‘사명이 녀석의 고집 때문에 당가에서도 기둥뿌리 뽑다시피 해서 참전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녀석이 나도 모르게 진짜 주춧돌까지 파내서 팔지 않았으면 그리 쉽게 망할 당가가 아닐 텐데.’
공동파가 그 대표적인 예다.
정파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양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가진 저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
당장 공동파만 봐도 수십 명의 상행을 이끄는 행수라는 이가 감히 그들과 거래를 트는 것도 황송해해서 그 속가문파와 거래하고, 그마저도 올려치기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그런 공동파보다 한창 잘나갔던 당문이 이 꼴이 됐다라…….’
한참 생각하던 당유혼은 이내 빙긋 웃었다.
“그래요? 잘됐네. 저도 그쪽 가는 길인데, 같이 가시죠?”
“예……?”
갑자기?
어떻게든 좋게 좋게 이별 각을 재고 있던 광세운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히히, 저도 마침 감숙 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이야~ 이것도 인연이라고, ‘대’ 광형 상단이라면 저 같은 무명소졸 하나 정도는 얹고 갈 공간 정도는 있겠죠?”
“예… 예? 아… 허허, 그… 그렇긴 하지요……. 그렇긴 한데…….”
어떻게 해야 하지?
광세운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흘렀다.
잘 먹여서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엉겨 붙는다고?
‘이, 이 거머리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제 겨우 이립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행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캬, 이거 완전 좋다. 가는 김에 광형 상단 본단에도 한 번 가보고! 무려 ‘대’ 광형 상단의 위신에 맞게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도 하고! 이걸 상부상조라고 하죠?”
이게 어떻게 상부상조냐, 이 자식아! 그냥 네놈만 좋은 거지…….
할 말은 많은 광세운이었으나,
‘…참자, 참는 게 이기는 거다.’
그래도 밥만 먹여주면 알아서 떨어지겠다는 게 산적보다는 낫잖아?
광세운은 스스로 그렇게 되뇌었다.
* * *
거대한 문이 보인다.
규모가 크지 않은 상단의 정문이라고 보기에는 무척이나 거대한 대문이며, 그 위에는 수려한 글씨체로 ‘광형상단’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다.
그것들은 광형상단에 은혜를 입은 이들이 각자의 빚을 갚겠다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만들어 준 것으로, 이를 바라볼 때면 언제나 광세운은 가슴이 웅장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들 광형상단이 걸어온 대도(大道)와 역사를 나타내는 것만 같아서, 아무리 힘든 상행을 다녀왔을 때도 이 현판만 보면 여독으로 생긴 피로감이 대부분 사그라드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분명 이번 귀환도 그래야 했는데…….
“오오, 역시 ‘대’광형상단! 대문도 어마어마하게 크네요?”
‘그놈의 ‘대’광형상단은…….’
일반적인 상행을 열 번 넘게 다녀도 겪기 힘든 일들을 단 한 번의 상행에 전부 경험하고, 그 때문에 생겨났던 피로감을 내려놓으려던 광세운은 오히려 피로감이 격하게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간 저희 상단에 은혜를 받았다는 분들께서 흔쾌히 재능을 기부해 주신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역시 상단의 대문과 현판의 이야기를 하자니 마음속에 차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대문과 현판만은 광형상단의 자랑! 결코 순리를 벗어나지 않고 정도를 걸어온 결과가 여기 있다고 세상에 소리치는 것만 같아 자부심이 차오르는 것이다.
다만,
“에이, 진짜요? 괜히 열정 보수이니 뭐니 한 것은 아니죠?”
“여, 열정 보수라니요!! 저희 광형상단은 결코 사람을 말로만 부리지 않습니다!!”
“그래요? ㅎ…”
뭐지? 저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은?
광세운은 괴인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속에서 들끓는 무언가를 가라앉히는 데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렇게 입구 앞에서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단주님!!”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고, 단주님!!”
목소리의 주인은 헐레벌떡 달려와 광세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니, 한세혁이 아니더냐!”
“이게 무슨 짓이더냐!”
달려온 이는 문사 차림의 청년이었다.
다들 아는 얼굴인지 단주의 앞까지 갑작스레 달려와도 칼을 뽑아 들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그 무례함에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한세혁이라 불리운 청년은 그 외침이 들리지 않는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엉엉 울부짖을 뿐이었다.
“단주님… 저희 불쌍한 아비를 살려주십시오!!”
“뭣?”
그 말에 광세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광세운은 허겁지겁 한세혁을 일으켜 세웠다.
“설마, 부친께서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한세혁에게서 답을 얻은 광세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내하시오, 한 공자.”
“단주님?!”
그 모습에 깜짝 놀란 광운대주가 광세운의 앞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단주님!”
“대주.”
답으로 돌아온 것은 무거운 눈빛.
그 눈빛에 광세운을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광운대주는 한숨을 푹 내쉬며 비켜서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유혼은.
‘뭐지?’
뭔가,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흘러가는 듯했다.
* * *
갑자기 광세운이 어디론가 휑하니 가버린 덕에 꿔다놓은 짐짝이 되어버렸다.
물론 말이 꿔다놓은 짐짝이지, 꽤 고급스러운 방으로 배정받고 먹을거리까지 잔뜩 준비되어 있다.
“죄송합니다. 일단, 여독을 먼저 풀고 계시지요.”
몹시 미안해하는 광운대주가 직접 안내해 준 객실에 편히 앉으니, 조금 전 소요가 떠올랐다.
‘흐음, 어째 단주의 나이가 꽤 어려 보인다 했더니.’
고작해야 서른도 되지 않은 듯한 앳된 얼굴이 규모 있는 상행을 맡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었더니, 무슨 상황이 있는 듯했다.
어떻게 할까.
보아하니 가문의 주인 되는 양반이 몹시나 곤경에 빠져 있는 듯한 상황.
원래라면 남의 일 따위 신경 쓰지 않지만,
“흐흐, 밥까지 얻어먹는 신세에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마음속에 있는 의협심이 외친다. 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라고.
‘그래그래, 다 내가 사람이 좋아서 이러는 거지.’
절대 심심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가볼까?’
결심한 당유혼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스륵―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고, 어느새 땅거미가 짙게 내린 밖이 보였다.
‘이럴 때 또 좋은 놈이 하나 있지.’
외부인인 자신이 상황도 안 좋아 보이는데 아무 데나 돌아다니면 별로 좋은 소리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막 나가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 이럴 때 딱 좋은 수법이 하나 있었다.
‘천잠무흔(踐潛無痕).’
지금 자신의 내공 상태는 전성기에 비하자면 일 할은 개뿔, 일 푼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건 원래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도 익힐 수 있는 무공이니까.’
그런 놈이 있었다.
말은 더럽게 안 처먹고, 고집은 질기기 짝이 없는데 심지어 무공에 대한 재능도 없는 멍청한 놈.
‘그런 녀석이 죽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건데, 이게 이렇게 쓰이네.’
인생사 새옹지마.
내공을 필요치 않는 은신법을 발휘해 발걸음을 옮기자, 얼마 가지 않아 안면이 있는 얼굴들을 발견했다.
‘응? 저쪽은…….’
같이 왔던 표사들이 우중충한 분위기를 마구마구 풍겨내고 있었다.
딱 봐도 무언가 있는 듯한 안색.
“혁수 아버지께서 홍연에 걸리셨다는군.”
“끄응… 역시 그랬나?”
“다들 짐작은 했잖아. 선대 단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던 분들 중 한 분인 것을.”
“젠장… 아까 너무 모질게 대했나?”
홍연?
‘그건 또 뭐야?’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단주님께서는 아직 입의당(立義堂)에 계신가?”
“그렇지. 돌아오시자마자 철야를 하시려는 것 같다.”
“미치겠군. 대체 왜 그런 괴질이 우리 마을에 돌기 시작한 거야?”
답답한 듯 열을 내던 이들은 한껏 고심을 토로하다 흩어졌다.
“흐으음…….”
당유혼은 그들이 사라지고 시간이 제법 지나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다.
‘괴질이라. 마을에 괴질이 돌고 있다고?’
홍연(紅蓮)이라는 이름을 들어보면 붉은 열꽃이 생기는 증상인 듯한데, 그걸로는 어떤 게 문제인지 특정 짓기가 힘들었다.
그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증상을 띄는 독이나 질병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제일 흔하게 발현되는 증상이라 오히려 쉽게 짐작하기 힘든 것!
그럼 역시,
‘직접 가봐야겠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입의당(立義堂).
의(義)를 바로 세운다는 뜻의 이곳 전각은 밤이 새도록 많은 유생들과 의원들이 즐비했다.
이곳 황산현 뿐 아니라 감숙 전체에서도 뜻깊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오로지 의(義) 하나만을 보고 모여든 선비들로 가득했다.
“반드시, 홍연(紅蓮)의 해독법을 알아내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