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여기, 손님 대접이 개판이구만?”
“손님?”
“그럼, 당신이 흑점의 상인인데, 그런 당신을 찾아온 나는 뭐겠어?”
“몇십 년 전에나 쓰이던 암구호를 이제 와서 사용하는 네가 손님이라고?”
‘하긴.’
이미 삼십 년이 지났다.
하루에도 암구호니, 합수어니 하는 것들을 세 시진 단위로 바꾸는 그들이, 아직까지 똑같은 걸 사용한다는 게 웃긴 일이다.
그러나 당유혼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흑점, 많이 변했네.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지?”
“우리를 잘 아나 보군.”
“잘은 아니고, 필요한 만큼은 알지.”
예를 들자면…….
“니들은 돈만 주면 나라도 팔아먹는다는 것?”
“…….”
스르르…….
일단의 침묵이 그들을 감싸 안더니, 잠시 후 압박해 오던 예기와 함께 흑상의 존재감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화악―
어느새 어둠의 중앙에 불빛이 밝혀지더니, 작은 탁자와 그 너머에 앉은 흑상의 창백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심드렁하게 당유혼을 맞이하던 때와는 달리, 아예 감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진정한 흑상(黑商)의 얼굴이 바로 저것이었다.
“앉으시지요.”
조금 전까지 날 선 목소리는 거짓인 듯, 경어가 들려오고 당유혼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놓여있는 의자를 끌어다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흑상은 깍지를 끼더니 그 위로 턱을 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의뢰를 확인하겠습니다.”
“사천당가.”
“당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당문?
‘가(家)가 아니라… 문(門)이라 이거지……?’
“그래. 정보를 원해.”
“어느 정도의 정보를 원하십니까?”
“시황 정도면 적당하겠지.”
“시황이라…….”
툭― 툭―
깍지 낀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무언가를 튕기는 듯한 손장난은, 실제로도 흑상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굴러가는 중이었다.
“은자 삼십 냥입니다.”
“은자… 삼십 냥?”
‘겨우?’라고 말하려던 당유혼은 이어진 말에 순간 그것을 삼켜 버렸다.
“정보 은폐료 포함입니다.”
“…….”
‘뭘… 얼마나 망한 거야?’
어이가 없으니 말문도 막혀 버린다. 다만, 그건 흑상이 알 바는 아닌 일.
“구매하시겠습니까?”
재촉하는 물음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구매.”
그래, 한번 보자. 대체 얼마나 망했는지.
“선금입니다.”
“…받아.”
터억―
광형 상단에서 받아온 묵직한 돈주머니를 통째로 올리자, 그 내용물을 확인해 본 흑상은 이내 그것을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흑상은 작게 말린 종이 쪼가리를 내밀어 왔다.
“전부 읽으시면, 중앙의 양초에 태워주십시오.”
비밀 소거 원칙을 안내해 왔지만, 그런 것은 지금 당유혼의 귀에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뭐, 뭐 이리 작아?!’
오만가지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애써 꾹 삼키며 둘둘 말린 양피지를 풀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읽은 당유혼은,
“…아.”
무언가가 뚝― 하고 끊겨 버렸다.
* * *
“흐음…….”
빈자리.
어둠 속에 홀로 남은 흑상은 타고 남은 재를 가운데에 쓸어 모았다.
후욱―
바람에 재가 흩날려 사라지고, 그곳에 있던 누군가를 떠올리듯 의미심장한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옳은 상인이란, 직접 발품을 팔아 물건을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이겠지.”
* * *
망했다.
다 망했다.
쫄딱 망했다.
“하… 하하, 싯팔……. 이거 실화냐?”
구주팔황(九州八荒)이 좁다 하고 세력을 뻗쳤던 당가다.
원래부터 사천하나에서만큼은 알아주던 가문의 위세를, 온 무림에 펼쳐냈던 게 당유혼이 활동하던 최전성기. 물론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기는 했다지만…….
“그래봐야 삼십 년이잖아!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며? 시이이이팔! 어떻게 그게 쳐 망해!!”
고작 은자 서른 냥짜리 정보. 아니, 정보 은폐료를 빼면 그만도 못한 정보.
“다… 다 이유가 있었던 거구나…….”
오대세가 중 제일이란 것은 이미 옛말이고, 사천제일세(四川第一勢)라는 것조차 어디 개잡문파에 뺏겼단다.
‘아니… 그래, 이해할 수 있어. 세월의 흐름에 성세를 이루었던 애들이 다 나가리되는 건 수없이 봤으니까.’
하지만…….
“왜, 씨팔, 우리 집안만 망했는데? 어째서?!”
사천삼주(四川三柱).
현재 가장 강한 영향력을 드리우는 사천 내 세 문파의 연합을 말한다.
아미(峨嵋), 점창(點蒼), 청성(靑城).
삼십 년 전에도, 아니, 백 년 이전에도 구파일방의 주축으로 자리하며 명성을 떨쳤던 그들이 현시대에 이른 연합을 말한다.
세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과연 명문은 정통이 있다고 말하지만…….
“나 있을 때는 고개도 못 들던 새끼들인데!! 어떻게 걔들만 흥하냐고!!”
그 세 문파는 전부 당유혼이 활동 시기 처절하게 짓밟으며 서열 정리를 끝내놓았던 문파들이다.
그런 놈들이 지금 날아다니는데, 당문만 처박혔다고?
“흐흐… 흐… 흐흐흐… 있을 수 없어… 이건 있을 수 없어…….”
광기가 넘실거리던 두 눈이 드디어 위험 수준을 넘어섰다.
“망해? 망했다고? 씻팔, 웃기지 마!! 내가 얼마나 공들여 키워놨는데? 그게 다 쫄딱 망해?!”
이게 말이나 되나.
‘금이야, 옥이야, 좋은 건 다 처먹이고 키운 놈들이 한 수레가 넘쳤는데… 남만 오지까지 가서 구해 와 쟁여 놓은 독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게 쫄딱 망해?’
부자는 망해도 삼 대를 간다고 한다.
그럼 당문이라면?
“못해도 십팔 대는 가야지!! 어떻게 삼 대는 고사하고 벌써 망해!? 게다가……!!”
사천삼주인가 사천삼주전자인가 하는 것들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들 전부가 버젓이 다 살아있다.
‘하다못해 청성놈들이 아직도 구파의 끝자락에 걸려있고, 무당 말코놈들은 소림 땡중놈들이랑 구파 제일을 다투고 있는데?’
하하. 하…….
“…꿈인가? 사실 이건 다른 세상인가? 미래로 온줄 알았더니 다른 세상으로 와있네?”
다 꿈일 것이다. 꿈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하… 하… 하…….”
뚝―
극히 현실을 부정하던 당유혼의 모가지가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그리고, 그게 다시 들어 올려졌을 땐,
“…간다, 직접 간다.”
실천하는 광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당유혼은 산속을 달리고 있었다.
세상 열심히 두 발을 움직이며 산속을 달리는 당유혼이었지만,
꼬르륵―
“아오!!”
배 속에서 울려 퍼지는 용트림에 결국 멈춰 섰다.
“배 속에 거지가 들었나… 이게 몇 번째야?!”
어지간하면 그냥 무시하고 달리겠는데, 배 속에서 울려 퍼지는 뱃고동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윽고 느껴지는 지독한 허기.
‘…이건 진짜 생각 못 했는데…….’
혼원신공을 창안하고 익힐 때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에 직면한 당유혼이 허탈한 눈으로 제 배를 내려다봤다.
꼬르륵!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요란한 굉음.
그곳에는 실제로도 용이… 아니,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탐(貪). 이 자식.’
태초의 혼원에 살았다 전해지는 마물.
거기서 착안해 이름을 지은 녀석은, 실제로도 당유혼의 단전에 기거하는 특이한 녀석이었다.
당유혼의 체내를 제집 삼아 몸집을 키워나가는 괴물.
막대한 동력을 낼 수 있는 마물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어마무시하게 처먹는 마물이었다.
‘다 좋은데, 연비가 너무 구리잖아.’
산속을 지나며 보이는 열매나 풀뿌리 등은 있는 대로 씹어먹었지만, 그거론 배도 안 찬다며 더한 걸 요구하고 있다.
- 배고파!
난동을 부리는 게 거의 산모의 배 속에서 발차기를 갈기는 우량아 수준!
‘광형 상단에서 적삼을 먹은 뒤 부쩍 커졌네. 진짜 어디 산짐승이라도 없… 응?’
킁킁.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마침 이 순간 적절하게 흘러오는 향긋한 냄새.
그건 바로,
“고기… 고기다……!!”
순식간에 산길을 내달린 당유혼의 눈에, 어느 작은 묘옥이 보였다.
“이보쇼! 사람 있어요?!”
당장에 비탈길을 뛰어 내려가 문을 두들겼다.
쾅쾅쾅!
“…누구신가?”
곧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삐걱 소리와 함께 나무 문이 열렸다.
묘옥에서 나온 이는 짐승 가죽을 동여맨 중년 남성으로 집채만 한 덩치를 자랑하는 장한이었다.
당유혼의 체구가 왜소하다지만, 단순 비교만으로도 두 배는 넘어갈 듯한 몸집!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주눅 들 만한 체구지만…….
“밥 좀 주세요.”
맡긴 돈을 받으러 온 수준의 당당함.
그에,
“크크크, 이거 재밌는 청년이군.”
장한은 당유혼의 허벅지보다 더 두꺼운 팔뚝으로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들어오시게.”
그러고는 활짝 열린 문.
고기 냄새 짙게 풍기는 실내를 자랑하며 장한이 손짓했다.
“이리 앉으시게.”
안내받은 돗자리 위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한쪽에 수북이 쌓인 버섯과 약초들이 보였다.
“잠깐 기다려 보게. 아직 분류가 덜 끝나서…….”
아궁이 속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한쪽에 두고, 약초 앞에 털썩 주저앉은 중년인은 곧 그것들을 이리저리 정리했다.
“음… 알록달록한 걸 보니 이건 독버섯이고……. 이건 칙칙한 놈이 딱 봐도 식용이구만? 이건 모르겠는데……. 흠, 배 속에서 소화되겠지?”
“…….”
“좋아, 됐군. 이제 먹으세!”
“…비켜봐요.”
낯선 불청객을 호쾌하게 받아준 건 좋은데, 독버섯까지 호쾌하게 위장으로 받아들이려는 중년인을 보며, 결국 당유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그걸 왜 빼는가?”
“아저씨, 이거 먹으면 뒈져요.”
“뭐, 뭣? 그건 벌레 먹은 자국도 있는데……?”
“아저씨가 벌레예요?”
화려한 건 독버섯이고, 벌레 먹은 자국 있는 건 식용이니, 하는 낭설이 이래서 문제다.
“구더기가 시체를 먹는다고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줄 아시나.”
“끄응……. 자네, 독에 조예가 있나 보군?”
“험하게 자라서 그냥 좀 아는 편이죠.”
다시금 재분류를 끝낸 식용 버섯과 풀뿌리를 고기가 익어가는 모닥불 위에 굽는다.
익숙하게 일부는 직화로, 또 일부는 즙을 내어 고기 위에 뿌리니 전보다 훨씬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먹죠.”
“하하, 자네 능력이 꽤 좋구만!”
우적우적.
곧 포식… 아니, 흡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장한을 쳐다보던 당유혼이었으나, 이내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고깃덩이에 경쟁적으로 두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꺼억!”
“아이고, 배부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쯤 뒤로 엎어지는 모습.
가히 부자간의 풍경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그럼, 배도 어느 정도 불렀으니…….”
늘어지게 드러누워 있던 장년인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한구석에 깔려있던 장판을 들추어 냈다.
거기서 나타난 것은 두 개의 호리병.
“그, 그건 설마…….”
뽀옹!
개중 하나의 봉인을 해체한 장년인이 호리병 주둥이를 그대로 입에 꽂아 넣었다.
꿀꺽꿀꺽꿀꺽꿀꺽…….
“캬아아!!”
“아, 아저씨… 그, 그거 저도 좀……!!”
여기까지 흘러나오는 주향이 장난이 아니다.
‘군침이 싹 도네!!’
마약 중독자라도 된 듯 격렬히 흔들리는 동공!
“음? 크크크, 자네 개 코구먼? 걱정 말게, 자네 것도 있으니까.”
그에 장년인은 또 다른 호리병을 던졌다.
“끼요오옷!!”
다급한 손놀림이 호리병의 봉인을 풀었다.
그리고 그대로 목구멍 속으로 꿀꺽꿀꺽 넘기니,
‘이 맛은…….’
아주 잘 숙성된 깊은 맛과 혀를 적셔오는 달달함,
그러니까…….
“아니, 이게 뭐예요?!”
울컥―
“크하하하, 뭐긴 뭔가. 이 몸이 만든 특제 음료이지!”
“으, 음료이긴 한데……!”
달짝지근한 맛,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다음으로 따라와야 할 맛이 없다.
“왜 아저씨만 술인데요?!”
장한의 호리병에서 퍼져나온 것은 분명 강렬한 주향(酒香), 하지만 이건 그냥 음료였다.
“크크크, 그럼 자네 같은 어린이한테 술을 주겠나?”
같잖다는 듯 웃는 장년인은 호리병의 주둥이를 입 안에 처박은 채 남은 걸 콸콸콸 털어 넣었다.
혹여라도 기회가 보이면 뺏어 먹으려던 당유혼의 의도를 완전히 무산시키는 모습.
“다 먹으면 알아서 불 끄고 자시게나.”
뭔가 이 푼쯤 부족한 기분.
“에잉…….”
“잘 자게나.”
차게 식은 당유혼의 시선이 향했으나, 그대로 엎어져 잠들어 버리는 모습. 그에 당유혼은 결국 남은 고기만을 집어 먹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고기는 맛있으니까.
어둠이 깊게 가라앉은 밤중.
스윽―
쓰러지듯 잠들었던 중년인이 몸을 일으켰다.
아까까지 취기에 물들어 있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고,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만이 쓰러져 있는 청년을 향했다.
“음냐, 음냐아…….”
무슨 음료를 마시고 취하기라도 한 건지, 배를 벅벅 긁어대며 잠꼬대를 하는 청년의 모습을 보던 중년인은, 이내 한쪽으로 손을 뻗더니 배게 밑에 숨겨진 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철컥―
쇳소리와 함께 들어 올려지는 박도가 지붕 위 뚫린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서슬 퍼런 날을 선보였다.
“후우…….”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 중년인은 이내 결심을 한 듯 눈에 이채를 발하며 세상 곯아떨어져 있는 당유혼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