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중년인이 든 박도, 그 끝이 서늘하게 빛났다.
물끄러미 잠든 당유혼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을 때,
“크르릉… 음… 쿠움… 큼…….”
“…….”
세상 더 없는 숙면의 울림.
“후…….”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중년인은 결국 다시금 박도를 내렸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갔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 마침내 묘옥마저 벗어났다.
삐걱―
그러고도 스무 걸음 정도를 더 나아갔을까?
묘옥 앞 넓은 공터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멈춰선 중년인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제 나오지.”
온통 칠흑같이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그곳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목소리.
그에,
투두둑―
빗방울처럼 일시에 떨어져 내린 흑의인들이 그를 빙 둘러싸고 나타났다.
“이 공자를 뵙습니다.”
“지긋지긋한 녀석들,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오냐.”
“장강의 법도는 그런 것이지요.”
반쯤 허리를 굽혀오지만, 그게 다 가식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셋째 녀석인가?”
“장강의 법도라 말씀드렸습니다.”
“염병. 네가 생각해 봐라, 용왕(龍王)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 것 같냐?”
중년인의 물음에는 흑의인들의 수장도 할 말이 없는지 딱히 뭐라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말해 봐야 소용이 없겠군.’
지성(知性)이 무지성(無知性)을 이길 수는 없는 법.
결국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내가 여기서 도망친다면? 자네들이 쫓아올 수는 있고?”
“평소라면 무리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두 가지 변수가 있잖습니까.”
“두 가지 변수?”
“첫 번째, 여기는 선상(船上)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두 번째, 이 공자는 홀몸이 아니라는 것.”
설마.
흠칫한 시선이 본능적으로 묘옥 안으로 쏘아졌다.
그때,
“찾아내 죽여라.”
“존명!”
흑의인 몇몇이 움직였다.
그에 당황한 중년인이 몸을 틀려 할 때,
“이 비겁한… 크윽?!”
푸욱!
뜨거운 고통이 옆구리에 작렬했다.
“빈틈.”
세 치 깊이까지 박힌 단검을 보며 중년인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관계없는 사람이다!”
“후후, 우리가 언제 그런 것까지 신경 썼습니까?”
“그래서 네놈들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거다!”
“그래서 당신이 죽는 것이지.”
진득한 미소를 그리는 흑의인이 손을 휘저었다.
그것을 신호로, 흑의인들이 일제히 무언가를 내뻗었다.
촤르르륵!!
‘그물?’
그냥 그물도 아니고 쇠 그물이다.
백경광란(伯鯨狂亂). 대기횡(大鬐揈).
크게 휘둘러진 박도에서 백색 도기(刀氣)가 뿜어져 나왔다.
콰콰콰콱!!
그대로 쇠 그물을 반으로 잘라 버리는 놀라운 신위!
하지만,
푸푸푹!!
그 사이를 노린 비침들이 중년인의 몸에 꽂혀 들었다.
“후후, 고래를 사냥할 때, 굳이 무식하게 정면 승부를 할 필요는 없지.”
조금씩 상처를 입히고 피를 흘리게 하며, 제풀에 지쳐 쓰러지게 만든다.
‘독인가?’
치밀어 오르는 현기증을 보니 독까지 쓴 게 분명했다.
“알아두시오. 당신이 죽는 것은 그 오만 때문이라는 것을.”
승기를 잡은 흑의인이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선언했다.
‘여기까지인가.’
그리고 반대로, 짙어지는 패색에 중년인은 각오를 다지며 도병(刀柄)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비록 눈앞에 죽음이 아른거려 왔지만, 그의 두 눈은 더욱 형형히 빛났다.
“와라.”
암기들이 어둠 속에서 예기를 드러낸다.
신호에 맞춰 일제히 퍼부어지고, 허공을 수놓는 그것들을 향해 도기가 폭사했다.
후두둑―
대부분을 떨어트렸지만, 아직도 날아드는 게 많다. 그렇다면 차라리 당당히 죽음을 마주하리라!
두 눈을 부릅뜬 그 순간,
카카카카캉!!
“남 일에는 잘 관여 안 하는 주의인데 말이야.”
생각도 못 한 뒤편에서,
“하필이면, 술빚… 아니지, 이 경우에는.”
귀찮음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료… 빚을 져버렸네?”
* * *
‘뭐지?’
흑교살대(黑鮫殺隊)의 대주, 신호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허공에 흩뿌려진 꽃잎과 같은 그것, 당연 진짜 꽃잎은 아니었으니…….
“나무…젓가락?”
바닥에 분분히 널려있는 낙화(落花)와 같은 것들의 정체를 확인한 신호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말에 뒤늦게 자신을 구한 것의 정체를 알아낸 중년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설마…….”
“설마 가정 집기 부숴 먹었다고 뭐라 하는 건 아니죠?”
“…자네, 대체 누군가?”
“지나가던 과객이죠.”
과객이라고? 날아드는 암기를 굴러다니는 나무젓가락으로 맞혀 떨어트리는 사람이?
“그러는 아저씨는, 음… 뭐, 먼저 지나가다가 정착한 화전민 아니에요?”
할 말이 없다.
“크크… 그래. 그럼… 빚을 받는 겸, 부탁 좀 해도 되겠나?”
“돈 빌려달라는 것 빼구요.”
“속세에서 벗어난 자연인한테 그런 게 필요해 보이나?”
“그건 그렇네요. 원하는 게 뭐예요.”
“다섯 마리.”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그만큼.
“다섯 마리만 맡아주게.”
“그 몸으로 나머질 혼자 상대하시게요?”
“못할 게 뭐 있나?”
“하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당유혼이지만 그에 오히려 흥분해 소리치는 것은 신호영이었다.
“여기가 시장 좌판인 줄 아느냐!!”
감히 자신들을 앞에 두고 물건을 흥정하듯 머릿수나 헤아린다고?
“뭘 그렇게 흥분하냐? 걱정 마, 넌 네가 직접 상대해 줄 테니까.”
“큭… 크크…. 좋다, 길평!”
“말씀하십시오.”
“네가 직접 저 애새끼를 상대해라.”
신호영의 부름에 대기하고 있던 부대주 길평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여기까지 와서 고작 애새끼나 상대한다는 게 기분이 나빴지만, 조금 전 보인 신위를 직접 목도한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방심하지는 않았다.
“존명.”
하지만 그에 당황한 것은 역시 다른 쪽.
“엥? 아저씨. 이건 얘기가 좀 다른데요?”
길평을 삿대질로 가리키는 당유혼이 주장했다.
“얘도 한 마리로 친다구요?”
“…그 녀석은 다섯 마리로 쳐주지.”
“아, 그럼 이야기가 또 다르… 어이쿠!”
후욱!
기습적으로 날아드는 비도를 재빨리 피해 낸 당유혼이 그것의 주인을 보여 손을 까딱였다.
“와봐, 다섯 마리.”
흉흉한 투기를 뽐내는 길평이 검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신호영!!”
“백경(伯鯨)!!”
중년인, 백경 역시 흑교살대의 신호영과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 * *
길평은 이제 곧 불혹에 이르는 중견 무인이었다.
특히나 생존율이 바닥을 치는 그의 업계에서 그 나이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가 보통 잔뼈가 굵은 무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상대의 외견이 어떻든 함부로 경시하지 않고, 같은 이유로 자신보다 배는 어려 보이는 당유혼을 상대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 순간 무언가가 뚝, 끊기는 기분을 느꼈다.
“이놈!!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것이냐?!”
“…뭔 소리여? 지금 세상 열심히 싸우고 있는 사람한테.”
갑자기 생사결을 결하던 상대한테 들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소리에 열심히 놀리던 발걸음을 멈춰선 당유혼이 반문하자, 길평은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것을 짓밟으며 소리쳤다.
“숟가락에 젓가락, 불쏘시개에… 이딴 걸 지금 암기라고 던지고 있는 거냐?”
“아… 난 또 뭐라고.”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당유혼은 머쓱하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어쩔 수 없잖아.
“암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로 유명한 가문이다.
당유혼 대에 이르러 천하제일가로 찬란히 위명을 빛냈지만, 그 이전에도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던 가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달리 생각하자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다.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할 정도의 재력이 되어야 독과 암기를 주류로 다룰 수 있다.]
질 좋은 금속을 제련하고, 그걸 다시 고도의 기술을 섞어 가공한다.
거기에 드는 비용은 천문학적일 수밖에 없으니, 빈털터리로 산속을 전전하는 당유혼에게 제대로 된 암기가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다는 게, 저런 놈의 가정 집기를 집어 던지는 거냐?”
“저런 놈이라니, 말이 심하네.”
한참 일대 다수의 격전을 치르고 있는 사람 불쌍하게.
‘음, 그렇지만. 이제 슬슬 끝낼까.’
흥분해 씩씩거리는 길평과 달리 당유혼의 내면은 늪처럼 침착했다.
겉모습과 달리 그는 노회할 대로 노회한 노강호.
‘이 몸에 대한 적응도 슬슬 끝이 났고, 암기도 다 떨어졌으니까.’
그리고…….
‘가만 놔뒀다가는… 저 아저씨, 진짜 위험해지겠군.’
내색하지 않았지만, 백경은 이미 축적된 독기로 인해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 보여줄 것 없으면, 슬슬 끝내 볼까?”
흠칫!
‘이놈, 기세가……?’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괴한 기교를 부릴 뿐, 역량 자체는 별 볼 일 없다 여겼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느껴지는 이 기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큭……!!’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길평은 서둘러 단전의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우우웅……!!
허겁지겁 끌어 올린 덕에 내공이 휘도는 혈도가 비명을 내질렀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빨리 끝내야 한다!’
서둘러 움직이는 길평의 검이 호선을 그렸지만,
‘늦었어.’
당유혼의 내면에서는 이미 잠들어 있던 괴물이 똬리를 틀며 깨어나고 있었다.
혼원신공(混元神功). 탐(貪). 개(開).
쿠웅!
뱀처럼 음험하며 용처럼 게으른 것.
뱀처럼 지독하며 용처럼 흉포한 것.
탐(貪)을 가두고 있던 문이 열려 젖혀지며,
‘그래, 이거지.’
약해지고, 비루해졌던 육체가 일순간 변화했다.
풀잎이 떨어지는 모습도, 걸음에 밟혀 바스러지는 나뭇가지 소리가… 감각부터가 달라지며, 그 움직임 역시 변화했다.
쩌엉―
손바닥이 검면을 후려쳤다.
덕분에 몸이 크게 틀어진 길평의 검 끝도 흔들렸다.
‘이게 무슨……?!’
위력도 위력이지만, 손이 움직이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지금껏… 이 길평을 대충대충 상대하고 있었다고……?!’
하…….
‘웃기지 마……!”
떠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부정하듯, 길평의 검이 더욱 거칠게 움직였다.
흑교살검(黑鮫殺劍). 혈삼치(血三齒).
쾌속무비한 찌르기가 붉은 혈기를 뿜으며 내질러졌다.
하지만,
“그래, 이게 좋겠구나.”
여유롭기 그지없는 목소리와 함께, 당유혼의 손이 기이한 곡선을 그렸다.
일견하기에는 느긋하다 못해 여유롭기까지 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손끝은 항상 길평의 검면과 맞닿아 있었다.
‘이이이익!!’
그에 반발하듯 길평은 더더욱 빠르게 검을 휘둘렀으나,
쩌엉, 쩡― 쩌어엉!
금속 종을 때리는 듯한 소리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
마치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느낌.
짙은 무력감이 온몸을 저밀 때,
툭―
“영광인 줄 알도록.”
부드러운 감촉이 가슴팍에 느껴졌다.
“접이화수(蝶移花手)라는 것이다.”
사천당문을 대표하던 장법 중 유(柔)를 대표하는 극의(極意).
접이화수(蝶移花手). 사접지무(死蝶之舞).
퍼억!
갈비뼈가 으스러진 길평은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후우…….”
상대의 죽음을 확인한 당유혼은 천천히 폭주하는 탐을 가라앉혔다.
이 처치 곤란한 녀석을 더 써야 하나 싶었지만,
‘그럴 일은 없겠군.’
다른 쪽의 전투도 이제 슬슬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크아아아!! 이놈. 신호영!!
“큭?! 오, 오지 마라!!”
그들의 전황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처음에는 기세 좋게 백경과 맞부딪치려던 신호영이었지만, 이제는 숫제 겁먹어 자꾸만 뒤로 물러서려 하는 모습이었으니까.
물론,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이 괴물 같은 놈!!’
그사이 전신에 비침을 수십 개나 더 꽂고서 미친놈처럼 달려드는 거한을 목전에 두고 있으면, 어느 누구도 지레 겁먹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더욱 잘 아는 것은 백경.
기세로 밀어붙여 기회를 잡았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좀 꺼지란 말이다!!”
달려드는 백경을 떨쳐내기 위해 신호영은 암기를 집어 던졌다. 그건 두려움이 선택한, 자신의 주특기를 버리면서까지 택한 생존의 발악이었다.
그걸 본 백경의 두 눈이 이채를 발했다.
‘끝이군!’
휘둘러지는 암기를 향해 오히려 몸을 내던졌다.
푸욱!
깊숙이 파고든 단검이 백경의 팔뚝에 꽂혀 들었다.
그건 분명 위중한 치명상이지만, ‘고작’ 그 정도의 상처는 이미 백경의 전신에 너무나 많이 새겨져 있었다.
“신호영!!”
고통 따위는 기합으로 무시한 백경의 박도가 휘둘러졌고,
푸화아악!!
피 분수를 뿜으며 신호영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콰앙!!
몸을 내던진 일격에, 거체가 바닥에 나뒹굴며 굉음을 만들었다.
덕분에 흑의인들 한가운데로 떨어진 격이 되었지만, 정작 그중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후우…….”
백경은 핏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에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시금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상처투성이지만, 흉흉한 눈빛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가라. 지금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내주마.”
“도, 도망쳐……!”
“대주도, 부대주도 당했다고!!”
수장과 바로 그 밑의 간부가 죽은 이상 나머지는 지리멸렬할 수밖에.
허겁지겁 도망치는 그들을 오연히 바라보던 백경은,
털썩.
그 자리에서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