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당가 직계 당유혼 】
높다. 세상이 높다.
삼십 년이 지난 세상이 이리 변해 버린 걸까? 세상은 참 무던히도 빠르게 변하는…….
“…게 아니잖아?!”
아니, 싯팔, 높다 느낀 게 아니라 진짜 높은 게 맞네?
“뭐, 뭐야, 너 이 새끼! 아동 유괴범이냐!”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군. 다만, 오해요. 나는 본가로 복귀하던 도중 쓰러져 있는 당신을 발견했고, 그대로 놔두는 것은 사람 된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지게에 태웠을 뿐이고…….”
“사람을 지게에 태우는 게 정상이냐!”
“하지만 어찌하겠소. 내가 전설상에 나오는 삼두육비(三頭六臂)의 초월적 존재도 아니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이리 등짐 위에 태우는 수밖에. 불쾌하다면 내려드리리다.”
웃차―
시야가 다시금 익숙한 고도로 강하했다.
‘별…….’
인간이란 자고로 역지사지를 겪어봐야 안다고. 남들 놀라게 만드는 데는 전문적인 삶을 살아온 당유혼이지만, 자신이 직접 그 상황에 처하게 되니 말이 안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지게 위였으니까!
인신매매? 납치? 아니면 유괴… 그건 좀 너무 나갔나……?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어봤지만, 지게전(?)까지는 처음 겪는다.
“이 새끼, 내가 암만 막돼먹게 살았어도, 인신매매는 못 참…….”
타오르는 의협심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때,
꼬르륵―
“…….”
“…….”
“…너, 먹을 것 좀 있냐?”
더 크게 타오르는 허기가, 불꽃을 얌전히 연소시켰다.
* * *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주먹밥.
씹어먹는 걸 넘어 흡입에 가까운 행위!
등판에 달라붙다 싶었던 뱃가죽이 다시금 부풀어 올랐을 때, 그 위를 북처럼 두들긴 당유혼이 벌러덩 뒤로 드러누웠다.
“어흐, 좀 살겠네.”
사천까지 빨리 오겠답시고, 무분별하게 탐을 혹사시키다 반작용으로 극심한 허기가 찾아와 버렸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인신매매범인 줄 알았는데, 너 좋은 녀석이었구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해야 할, 일?”
“그렇소.”
멈칫.
무심하게 돌아온 대답에서 느껴지는 짙은 기시감.
그에 고개를 돌릴 때, 삿갓 쓴 남자는 여전히 무던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상세를 살펴보니 딱히 이렇다 할 부상은 없어 보이더구려.”
“의원이냐?”
“비슷한 것이오. 그보다, 이제 어쩔 것이오? 사천에 들어갈 것이라면 안내 정도는 해줄 수 있소.”
“아니, 그건 됐어.”
이래저래 할 게 많다만, 더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고…….
“그래서, 넌 이름이 뭐냐?”
“흠, 내 이름 말이오?”
“빚은 갚아야지.”
“고작해야 주먹밥 두 덩이에 빚은 무슨.”
그리 말한 삿갓 쓴 남자는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나 훨훨 떠나갔다.
“흐음…….”
산등성이로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당유혼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희한한 녀석일세.”
약초 냄새가 짙다. 아니, 사실 약초라기보다는…….
‘독초…였지?’
어설프게 섞인 것이라면 몰라도, 개중에는 꽤 강렬한 약효를 자랑하는 것도 왕왕 있었다.
그건 실로 특이한 일이지만,
“…뭐, 내 알 바는 아니니까.”
살다 보면 특이한 녀석 한둘 있을 수도 있는 거겠지.
대충 그 생각을 털어낸 당유혼의 발걸음은 다시금 사천으로 향했다.
* * *
벌렁벌렁!
강렬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크… 이거지……!!’
다양한 맛(味多), 넓은 범위의 맛(味廣), 두터운 맛(味厚), 농염한 맛(味浓)으로 대표되는 사천의 맛이 가득한 시장 거리에서 당유혼은 강렬한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광형 상단에서 얻어먹은 건 너무 밋밋했단 말이지.’
그곳 숙수의 솜씨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강렬한 맛으로 유명한 사천에서 자라온 당유혼의 입맛에는 싱거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일단 당가를 찾아가기 전, 배 속에 똬리 튼 아귀를 먼저 잠재워야 할 필요도 있기에 이곳 시장으로 향한 것이다.
‘어디를 가볼까…….’
군침을 뚝뚝 흘리며 연신 주변 거리를 돌아보고 있을 때,
달그닥달그닥!
거친 외침과 함께 저편에서 말을 탄 이들이 달려왔다.
“비켜라!”
‘아니, 어떤 미친놈이 저잣거리에서 마차를 몰아?!’
동요한 사람들이 서둘러 좌우로 멀어졌고, 당유혼 역시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아악!”
그 순간,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달려오는 말들이 보이지 않는지 그곳으로 뛰쳐나가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 미친……!”
파팟!
생각은 나중에.
그 광경이 보이는 즉시 두 발을 땅을 박차고 있었고, 다음 차례에 당유혼의 몸은 거칠게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콰가가각!!
‘으그아아!!’
간발의 차이!
말에 치이기 전, 어린아이의 몸을 감싸듯 껴안는 데 성공하고 그대로 몸을 날려 반대쪽으로 나뒹군 것이다!
덕분에 아이는 별달리 다친 데가 없었지만, 당유혼의 등짝은 불에 지진 듯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끄으으, 괘, 괜찮냐?”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참으며 품에 안은 어린아이를 내려다보자, 아이는 놀란 듯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구나, 싶어 이내 고개를 돌리니 저편에서 멈춘 마차와 말에 탄 이들이 흘낏 이쪽을 돌아보았다.
뒤늦게 사과라도 하는가 싶지만,
“무슨 일이더냐?”
“죄송합니다, 공자님. 웬 잡놈들이 마차 앞에 뛰어들어서…….”
“치었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래? 그럼 됐다. 가자꾸나.”
안에서 들린 누군가와 몇 번 대화하던 말 위의 무사들은 이내 다시금 말을 몰기 시작했다.
‘저, 저 새끼들이?!’
뚜둑―
그에 머릿속 소중한 무언가가 끊기는 걸 느낀 당유혼이 당장 박차고 일어서려 할 때,
“아이고!! 소을아!!”
누군가의 울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시야를 가려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흘깃 고개를 들어보니 웬 덩치 큰 사내가 연신 허리를 숙여오고 있었다.
‘끄응…….’
애 아빠인가?
“…얘, 아버지예요?”
“아이고, 그렇습니다. 공자님! 이 은혜를 어찌해야 할지…….”
“은혜는 무슨. 애 간수나 잘해요.”
쯧, 놓쳤나?
애도 안 우는데, 다 큰 어른이 우는 걸 달래주며 품에 있던 아이를 넘겨주고 나니 어느새 마차는 저 멀리까지 가 있다.
쫓아가서 대가리에 장침을 박아주고는 싶은 마음이 물씬물씬 풍겨 주먹을 콱 움켜쥘 때,
“아이고, 공자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 손을 움켜쥐는 억센 손아귀가 느껴졌다.
“…뭐가 안 돼요?”
“저들을 쫓아가려는 것 아닙니까?”
“…….”
그렇게 티가 났나?
“용독문입니다! 지금 사천에서 제일 난다 긴다 하는 그 용독문이요!”
용독문?
‘저 새끼들이?’
원수는 저잣거리에서 만난다고, 안 그래도 수상한 새끼들을 여기서 만나네?
“아이고, 공자님!!”
“아, 좀 놔봐요!!”
왜 사람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려?!
‘그냥 걷어차 버려?’
진지하게 발에 매달린 덩어리를 떨쳐내려 하는 그 순간,
“아이고, 문수야!!”
“으앙!! 엄마!!”
갑자기 옆에서 웬 여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에 품에 안겨 있던 소년이 허겁지겁 뛰쳐 일어나 여인에게 달려가 안겼으니…….
“…아들, 이요?”
“…크흠, 흠.”
딱 봐도 아들은 아닌 것 같은 중년인이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어딜 가시나?”
터벅―
이번에는 중년인의 옷깃을 역으로 잡는 당유혼의 손길이 뻗어왔다.
“하하… 이거 왜 이러시나…….”
점점 어색한 기류가 감돌기 시작하는 그 순간,
꼬르르륵!
“…거, 일단 밥부터 먹죠?”
* * *
대동 객잔.
사천에서도 꽤 이름난 객잔인 이곳은, 황제가 먹는 음식을 직접 만들었다는 숙수(熟手)에게 사사받았다는 요리사로부터 전통이 계승되었다는 곳으로 유명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주인장의 솜씨가 뛰어나 하루에도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당연 개중에는 기인이사도 많게 마련이었는데…….
‘저, 저게 뭐지?’
‘분명 어린애 같은데…….’
‘고기를 씹어먹는 게 아니라, 입 안에서 분해해서 흡입하고 있잖아?’
지금 이 순간, 한 탁자를 차지하고 앉은 남자가 온 방문객들의 시선을 한데 끌어모으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탁자에 가득한 음식들을 향해 연신 손을 놀리는 소년!
엄청난 속도로 그릇을 비워내는 모습에 가만 지켜보던 점소이의 두 눈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세상에… 내 점소이 경력에 이런 걸신… 아니, 식신(食神)은 처음이다…….’
“여기 있는 거 다 가져와!”
등장 역시 평범과는 동떨어지는 손님이었다.
처음엔 웬 거지새끼가 돌아버린 것인가 싶어 쫓아내려 했지만, 기선제압을 갈기듯 탁자에 올려놓는 은자는 그의 허리를 굽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다음으로는 과연 주문한 것들을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꺼억! 이 집, 동파육 잘하네! 동파육 한 접시 더!”
“예이!”
아무래도 그건 의미 없는 걱정인 듯했다.
이 식신인지, 걸신인지 모를 손님의 배 속에는 아귀가 살고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이 새끼, 이제야 좀 잠잠해졌네.’
실제로도 배 속에 아귀를 키우고 있는 소년, 당유혼은 겨우 잠잠해진 탐이 있는 하복부를 두들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이제 슬슬 대화 좀 해볼까요?”
“…대화, 허허. 좋지요. 대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을까.
중년인은 장장 한 시진 동안 처먹기만 하다가, 이제야 고개를 드는 당유혼을 오만가지 감정을 함축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애 아빠요?”
그리고 시작과 동시에 아픈 곳을 찔러온다.
“…사실 미혼입니다.”
“그건 안 말해도 알구요.”
“뭐, 뭘 안다는 것입니까?”
딱 봐도 그걸 모르겠냐는 시선에 괜히 울컥한 중년인이 버럭 소리쳤다.
“뭐, 그런 게 있구요. 그래서, 왜 연애 경험도 없는 양반이 애 아빠인 척 끼어들어서 날 말린 거예요?”
“…해도 너무하시는군.”
암만 먼저 거짓말을 했다지만, 인신공격까지 하는 건 너무하잖아?!
“후우, 속인 것은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나름대로 호의에서 나온 행동이니 이해해 주십쇼.”
“호의?”
“예. 왜냐면, 공자가 협객이기 때문이지요.”
협객이란, 의를 행하고 협을 따르는 이들.
동시에, 자신과 가장 안 어울리는 그 두 글자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게 뭔 개소리예요?”
“달리는 마차 앞에 뛰어들어 생면부지의 아이를 구할 협의. 그런 이라면 분명 용독문과 충돌하리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제가 용독문의 불의에 참지 못하고 부딪치면 제가 위험해질 거라 생각해서 나섰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용독문의 위세에 대해서는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한 시진 동안 무지성으로 식량만 축낸 것 같지만, 그 와중에도 귀는 열려 있어 주변 사람들이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용독문이 이번에 표행 사업에 진출한다는데?”
“허, 지난달에 대금업에 손을 댄 지 얼마나 됐다고.”
“정말 무시무시한 기세로 세를 불리는군.”
온 주변에서 용독문 이야기뿐이니, 그들이 얼마나 잘나가는 지도 이젠 질리도록 잘 알 지경이다. 그리고 그들이 삼십 년 만에 얼마나 세력을 불렸는지도.
‘그런 놈들이랑 지금 당장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위험해질 수 있기도 하겠어.’
아직 뼈와 근육이 덜 여물은 지금이라면 확실히 부족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왜 말렸어요?”
“음? 허허, 말했지 않습니까, 공자. 협객인 당신이라면 분명 악독한 용독문 놈들이랑 부딪칠 거라 생각했고, 그러면…….”
“그러니까.”
그래, 그런 것은 다 이해하겠는데.
“하오문 사천지부의 지부장인 당신이, 왜 굳이 말렸냐구요.”
하오문은 삼십 년 전에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사파의 대문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