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원을 그려라.
물가에 조약돌 던지듯 툭 던져진 말이었지만, 그 여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실제로도 서른 명의 방계들이 죽어라 손을 휘둘러대고 있었으니까.
이렇다 할 무공을 연마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손을 휘둘러 대는 게 뭐가 어렵냐고 할 수 있겠지만,
‘아니, 이 사람은 무슨 기본이 반복훈련이야?!’
‘그놈의 기마 자세 이후로 이런 건 안 할 줄 알았는데!!’
‘무슨 팔만 세 시간 째 휘두르고 있는 거야!!’
한 번의 휴식도 없이, 세 시진 동안 팔만 휘둘러대면 이건 그냥 고문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단순히 휘두르는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푸욱!
“끼아아악!”
“이 새끼, 손 안 펴지? 내가 박제시켜서 펴줄까?!”
손이 제대로 안 펴지거나, 팔이 제대로 안 펴진다 싶으면 젓가락이 귀신같이 날아 박혀 그들을 오들오들 떨게 만들었다.
‘저, 저놈의 젓가락!!’
‘누가 좀 밤에 침투해서 분질러놔라!!’
대체 이게 맞는 것인가 싶었지만, 당유혼의 대응은 강경했다.
“차양십이수는 열둘의 초식에 유(柔), 환(幻), 쾌(快), 강(强), 중(重), 격(擊), 변(變), 은(隱), 방(防), 박(縛), 첨(尖), 완(完)의 열두 성질을 전부 담아내는 무공이다.”
그의 두 손이 짧은 순간에 빠르게 움직이며 열두 가지 변화를 담았다.
“즉, 무공이 가지는 거의 모든 성질을 다 담는다고 보면 되지.”
그리고 다시 크게 한 바퀴 원을 그리니.
“완전무결을 표방하는 무공. 그렇다면 이걸 담아내는 수련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게 바로 원(圓)을 그리는 것이다!”
처음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무공에 가장 뒤떨어지는 방계부터, 그래도 무공 꽤나 익힌 방계까지.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선문답 같은 설명이었으니까.
‘솔직히, 의심도 했지만.’
‘그걸 보면…….’
때문에 자연스럽게 의심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걸 반발시킨 것은 당유혼이 직접 단상 위에서 보인 한 가지 춤사위.
“자, 잘 봐라!”
직접 시범을 보이겠다며, 당유혼은 단상 위로 올라가 제자리에서 팔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선 자리에서 양팔만을 휘두르며 깔끔한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또 다른 원을 그려나갔다.
“무학(武學)의 이론에서, 결국 나와 적 사이에서 공격이 들어올 수 있는 경로는 삼십육방(三十六方)이다. 이는 원(圓)을 상징하는 숫자지.”
한 겹, 두 겹, 세 겹.
어느덧 부드럽게 발을 굴리며 몸 전체를 회전시키는 휘두르는 당유혼의 몸짓.
그건 마치 한 폭의 춤사위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우우우…….
우우…….
“어… 어……?”
“저, 저건…….”
“세상에…….”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어느새 춤처럼 변해 가는 손짓엔 별다른 내공도 실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시선을 강탈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을 두들겨 패던 손이 그리는 완만하고도 깔끔하고 또 아름다운 궤적은 무공을 익히는 이들이라면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찬탄을 자아낼 정도였기 때문.
우우우우…….
어느새 자연스레 울려 퍼지던 바람 소리가 장중함을 담아 연무장 내부를 채웠다.
평면의 원(圓)은 어느새 입체의 구(球)가 되었고, 다시금 수십 개의 원(圓)으로 나누어지다 또다시 구가 되는 등, 여러 차례의 변화를 보였다.
그렇게 일 다경가량 진행된 연무는 언제 펼쳐졌는지, 언제 끝나 버렸는지를 짐작할 수 없게 결말을 맞이했다.
마치 처음과 끝을 맞물려 구분할 수 없는 원처럼.
넋 놓고 있던 이들을 일깨운 것은 당유혼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을 때였다.
“자식들, 좀 감동이냐?”
장난스러운 목소리지만, 존경을 금할 수 없었다.
“죽어라 훈련해. 이 원을 완벽히 그릴 수 있다면, 너희들이 차양십이수를 대성한 거다.”
그 말이 신호.
무인으로서, 결코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봐버린 그들은 결국 팔이 빠지도록 휘두르고, 그러다 잘못하면 젓가락이 날아와 박힐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수련에 빠진 것이다.
‘흥, 그래도… 싹수는 있구만.’
물론, 그 모습도 영 마음에 들지는 않는 당유혼이었지만, 세 시진쯤 되니 천천히 손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놈들 수련은 이쯤이면 됐고.’
알아서 궤도에 올랐으니, 나머지는 알아서들 할 일이다.
항상 봐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유혼은 이것 외에도 할 게 있다.
“계속하고 있어라. 나 왔을 때 한 놈이라도 빠져 있으면 다 같이 뒈지는 거야?”
연무장 바닥에 쑤셔박힌 젓가락보다 더욱 깊숙한 경고를 남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
* * *
당가는 넓다.
과거 전성기에는 한 마을의 규모를 감당하던 게 당가였고, 쇠락한 지금도 그 부지는 변하지 않고 남아있다.
물론, 많은 부분이 듬성듬성 비어버렸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남은 곳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이곳 장인촌.
기본적으로 당가는 무가(武家)이지만, 인(武人)이 아닌 장인(匠人)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곳 장인촌이다.
땅땅땅―
울려 퍼지는 쇳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자극했다.
누군가에게는 소음이지만, 당유혼에게만큼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자장가가 있다면 이것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들게 하는 음률이었다.
그리고 개중에 특히 좋은 음률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깡― 까앙―
깡깡깡―
그곳에는 웃통을 벗어 던진 장년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망치를 두들기고 있었다.
고된 세월의 흔적을 증명하듯, 울긋불긋 잘 발전된 근육 위로 상처 자국들이 선명한 장년인이었다.
손님이 온 지도 모른 채 한참을 두들기던 장년인이 숨을 내돌린 것은 다시 한참을 지난 후였다.
겨우겨우 허리를 펴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던 장년인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다, 건물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던 이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어르신?”
그에 상대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제가 어르신이에요? 저 생긴 것 안보여요?”
“허허, 가주님과 함께 둘뿐이 없는 직계이시잖습니까. 항시 저희 방계들을 보호해 주시는 직계들께선 연배에 상관없이 어르신이지요.”
강철 같은 외양이었다. 하지만, 반듯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니 당유혼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우.’
옛사람이었다. 오래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유혼의 기억에는 없었다.
지난 삼십 년 사이, 어디서 흘러들어 온 걸까?
하지만, 그는 당가의 옛 풍토를 온건히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됐어요. 어린놈한테 고개 숙이면 자존심 상하잖아요.”
그에 괜스레 손을 저어보지만,
“후후, 이번에 또 귀한 약재를 구해 오셔서 저희 아랫것들에게 나누어주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그림자로 저희를 드리워주시는 게 꼭, 옛 어르신들 같으신데… 어찌 저희가 모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더욱 굽혀오는 모습에 그 당유혼이 고개를 돌렸다.
“에잉.”
차양당의 방계들에게는 금수(禽獸)이니, 귀축(鬼畜) 악귀(惡鬼)이니, 하며 불리어도 다른 장인들에게 당유혼이 받는 대우는 대게 이랬다.
“됐어요. 마음대로 부르시고… 사실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부탁 말입니까? 그저 명령하시면 됩니다.”
“아… 진짜.”
또다시 팍팍 인상을 찌푸리려다,
“에휴… 말을 말죠.”
결국 한숨을 쉬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어쨌거나 뭐 좀 만들어 주세요.”
아닌 척하지만, 차마 선인의 풍모를 숨기지 못하는 이 어린 직계를 바라보며 장년의 장인은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물었다.
“무엇입니까?”
“족쇄요.”
“예? 어디 죄인 압송이라도 하십니까?”
히죽―
“예, 뭐. 무능한 게 죄니까. 죄인은 맞죠. 다만, 족쇄 사이에 쇠사슬은 필요 없어요. 시작은 양팔이지만, 발목에도 찰 거고 하나둘 늘려서 허리에도 채울 거거든요.”
“흐음… 신기한 주문이군요. 암기 같은 걸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에이, 그건 아직 사치구요.”
사천당가의 무인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암기는 이곳 장인촌에서 나온다. 많은 기술이 유실되었지만, 남은 장인들 중 아직도 뛰어난 솜씨를 지닌 이들이 많다.
“그에 따른 주문이 있으십니까? 새길 무늬라거나…….”
“장식 같은 거요? 에이,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방해되니까 그냥 밋밋하게 만들어 줘요. 아, 대신.”
“대신?”
“엄청 무겁게 만들어 주세요.”
히죽―
어째서 그가 악귀, 금수, 귀축 등으로 불리는지, 악의 선명한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에 장인은 그만 웃음 지어버렸다.
‘예전에도, 저런 분이 계셨다고 들었는데.’
그가 어릴 적, 이곳에 흘러들어 왔을 때 선대의 장인들이 하시던 얘기가 있었다.
“적에게는 악귀(惡鬼), 가문의 무인들에게는 악동(惡童) 같은 분이 계셨다. 그는 나이와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바람과 같은 사내였고…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수호신과 같은 분이셨지.”
장년인은 생각했다. 만약 그런 이가 있다면, 눈앞에 있는 이와 같지 않을까… 라고.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완수하겠습니다.”
“에이, 뭘. 설렁설렁하세요. 그보다…….”
낄낄거리던 당유혼이 슬며시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괜스레 저 멀리 저무는 노을을 슥 쳐다본 그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큼… 그, 뭐… 부족한 건 없어요?”
어쩐지 알 수 없는, 그런 반응을 보이며 툭― 던지듯 묻는 말에,
“후후.”
장인은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듯합니다.”
* * *
장인들은 약속했던 기일보다 훨씬 앞당겨 물건을 완성했다.
당유혼으로서는 감탄을 자아낼 일이었지만…….
“이, 이게 뭡니까?”
“아, 아니죠? 대형, 아니죠? 그쵸?!”
연무장 앞에 쌓인 그 완성품들을 본 차양당의 방계들은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에,
“아니긴 뭐가 아냐? 나다 싶으면 쏜살같이 튀어나와야지.”
하여튼 빠져가지고는.
절망을 확정 짓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나씩 차.”
한 사람당 한 쌍씩.
정당하게 분배된 족쇄가 수십.
애써 현실을 부정하던 방계들은 결국 도축장 끌려가는 소처럼 하나씩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 무거워……!!”
“손목이 부러질 것 같습니다!!”
“어허, 이 새끼들이?”
어디서 약한 척이야?
“이 대형이 큰마음 먹고 비싼 돈 들여서 만들어 줬더니! 산에서 나물 캐고 약초 팔아서 특별히 준비한 선물의 반응이 이따위야?!”
누가 보면 소년 가장 뺨치는 외침이지만,
‘그걸 네가 캤냐고!!’
‘우리가 캐는 동안 지켜보기만 해놓고는!!’
그 산에 함께 가서 당유혼이 고기나 찢고 퍼질러 노는 동안 한창 노동을 시행한 방계들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이야기였다.
“자, 다 찼냐?”
어쨌거나, 전부 다 차는 것을 확인한 당유혼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뛰어.”
“…어딜 말입니까?”
“설마… 아니죠?”
새벽부터 일어나 운기조식을 마친 방계들.
그들은 당유혼이 가리키는 저 동트는 산마루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제발. 장난치지 마!!
강렬한 염원들이 빗발쳤지만,
“왜? 뛰기 싫어?”
히죽― 웃는 당유혼의 손 위로 젓가락 수십 개가 보이는 순간,
“으아아아아아아아!!”
“저주할 거야!!”
“꼭 강해져서 복수하고 말 테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그들은 결국 광란의 질주를 시작했다.
‘흥,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당유혼은 그저 팔짱을 끼며 자신이 가리켰던 산마루를 바라봤다.
그 위로 떠 오르는 햇살이, 이제 막 다시 부활을 시작할 당가를 비추어 오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