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 순간, 홍단은 재빨리 몸을 낮추었다.
구우우웅!!
머리 위로 스치듯 날아간 검은 기운에 홍단의 삿갓이 휘말려 날아갔다.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홍단은 이를 악물며 채찍을 날렸다.
휘릭―
검은 연기를 꿰뚫고 날아간 채찍은 무언가를 휘감았고, 힘껏 당기자 억! 소리와 함께 구만호가 허공을 붕― 날았다.
쿠당탕!
연기가 걷히고 우스꽝스럽게 바닥에 나뒹구는 구만호의 모습이 보였다.
“이 잡것이… 감히 내게 이런 모욕을 줘?!”
곧바로 땅바닥을 박차며 뛰어오르는 구만호의 중심으로 다시금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
- 뛰어올라서 채찍으로 천장의 구조물을 휘감고 매달려라.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전음입밀(傳音入密)?’
내공에 소리를 담아서 특정한 상대에게만 의사를 전하는 고도의 기예다.
처음은 경황이 없어 파악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에는 그녀도 그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파팟!
조언대로 천장에 매달리자 그녀가 있던 자리를 우악스레 스쳐 지나가는 구만호가 보였다. 그리고 열 걸음쯤 뒤에서 여유롭게 이 장면을 지켜보며 입술을 달싹이는 당유혼의 모습도.
- 저놈이 익힌 것은 흑살장이란 무공이다. 익히면 온몸의 거죽이 질겨져서 방어력이 늘어나고, 괴력을 가질 수 있게 되지. 게다가, 공격하는 순간에 검은 연기를 뿜어내서 처음 본다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뛰어난 방어력과 괴력을 가지는 대신 온몸이 뻣뻣해진다. 덕분에 움직임이 단순해져서, 대부분의 공격이 직선으로 변한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것도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한 연막일 뿐.
“크아아악!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당장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여유로운 당유혼의 전음과 폭급한 구만호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 그렇다면 상대법도 간단하지. 굳이 정면 대결을 하려 하지 말고, 아예 몸을 빼내거나 무게 중심을 흩트리는 식으로 상대하면 돼.
천장에 매달린 채 구만호를 내려다보는 홍단의 신형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네 녀석을 갈기갈기 찢어주겠다!”
그의 충고가 끝나기 무섭게 구만호가 달려들었다.
또다시 검은 연기가 시야를 막으려 하자 홍단은 크게 옆으로 뛰어 궤도에서 벗어났다.
콰콰캉!!
그녀가 있던 자리의 기물들이 박살이 났고, 튀어 오른 잔해를 움켜쥔 구만호가 으르렁거렸다.
“당당하게 나선 주제에, 하는 게 계속 이리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뿐이냐?”
“멍청한 벌레라서 그런지, 비겁한 것과 현명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시는군요.”
“뭐, 뭐?!”
냉철하게 답한 홍단은 천천히 조금 전 상황을 복기했다.
‘보통의 무공이라면 이렇게 무방비하게 옆으로 피할 때 무조건 추격이 들어온다. 하지만, 저자의 무공은 처음만 위험할 뿐, 그 이상은 아예 위험이 전무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해.’
그 사실을 확인한 그녀가 가볍게 채찍을 휘둘렀다.
“흥!”
마디마디가 금속 관절로 되어 있어, 검날과 다름없는 혈접구절편이 날아듦에도 구만호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격했다.
목이 베여도 그저 붉어지는 게 끝일 뿐인 구만호의 모습에 홍단은 결국 가진 무기를 내다 버렸다.
“홍화단. 연쇄진을 전개합니다!”
대신 그녀가 내지른 외침에 기둥 사이사이로 숨어 있던 이들이 모습을 보였다. 평시에는 기녀로 활동하지만, 유사시에만 정체를 드러내는 그녀들은 홍단의 직속 무력 부대였다.
촤르르륵!!
이번에도 그 부름에 따라, 십수 명이 일제히 내던진 쇠사슬이 구만호의 전신을 속박했다.
“크억?!”
막, 홍단이 있던 기둥에 처박히던 구만호는 전신을 얽어매는 쇠사슬의 속박에 숨이 막힌 듯, 소리쳤다.
“다, 당장 놓지 못하겠느냐?!”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신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 기루 자체를 뽑을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풀지 못할 것입니다.”
홍화단은 능숙하게 쇠사슬을 주변 기둥이나 기물에 얽어맸고, 가해지는 힘을 적절하게 분산시켰다.
만약 구만호가 뛰어난 기술을 보인다면 어떻게든 대항했겠지만, 그는 무식할 정도의 힘만을 자랑하는 이였기에, 가속할 거리가 주어지지 않으니 붙잡힌 맹수처럼 그저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이, 이……! 혼자서 나를 상대하겠다는 놈이! 비겁하게 부하들을 끌고 와?! 네년은 자존심도 없느냐?!”
평범한 이들이라면 수치심과 모욕감, 자괴감 등을 느낄 만한 말이지만, 홍단은 가볍게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어머, 저희에게 자존심을 바라셨나이까?”
“……!”
하오문은 기녀와 소매치기, 기둥서방 등으로 이루어진 사회층 최하위 바닥의 문파. 그들에게 애초에 자존심을 바라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인지는 구만호가 더욱 잘 알았다.
“이 벌레 같은 것들이!! 뭉치면 뭐가 될 줄 알고!!”
구만호의 얼굴에 혈관이 도드라지며 전신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가 용력을 부리기 시작하는지, 팽팽히 당겨진 쇠사슬 수십 개가 일시에 요동쳤다! 하지만 쇠사슬은 요동칠 뿐 끊어지지 않았으니, 그 모습에 홍단은 차갑게 조소했다.
“본문이 자랑하는 팔문연쇄진입니다. 백날 노력한다고 끊어질까요?”
“끄아아아아아!!”
그 말에 분노에 찬 구만호가 난리를 부렸지만, 딱 그 정도가 끝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발견한 흑서단주 대길호와 흑사단주 나윤엽이 대경해 소리쳤다.
“흑호단주!!”
지금 하오문에 쳐들어 온 세 명의 단주 중 가장 강한 게 흑호단주였고, 그 우두머리 격인 인물도 흑호단주였다.
자고로 집단과 집단 간의 싸움은 곧 기세 싸움이니, 여기서 그가 잡히면 전세가 불리해질 확률이 높다.
“흑호단주를 놔드려라!!”
“저리 꺼져라!!”
그에 두 명의 단주가 각자의 무기를 들며 맹렬히 달려들었다.
- 아까 보니 한 놈은 두 자루 낫을 다루는 당랑겸을 익혔고, 한 놈은 단검을 다루고 암습을 하는 전법을 취하더군. 둘 다 저 돼지 같은 녀석에 비해 힘이 떨어지고 정면 승부에는 약해. 원래라면 암습이나 보조를 해야 할 놈들이 지금 정면으로 달려드는 거야. 어찌할지는 알겠지?
‘물론이죠.’
당유혼의 물음에 속으로 답한 홍단은 머리카락에 착용하고 있던 장신구를 풀었다. 작은 구슬 여럿으로 이루어진 장신구였는데, 그 안에 내공을 담는 순간 무시무시한 암기가 되는 것이었다.
파파파팟!!
실제로도 그녀가 그 장신구에 내공을 담고 휘두르자 옥구슬이 차례로 분해되며 전방으로 쏘아졌다.
옥구슬이다 싶은 것은 사실 쇠 구슬이었고, 당황한 흑서단주와 흑사단주가 재빨리 두 팔을 겹쳐 급소를 막았지만, 그 대가로 급소가 아닌 팔뚝에 구슬들이 박혔다.
“크악!!”
“잔재주를!!”
그 틈에 홍단은 재빨리 달려들며 치마를 걷어 양 허벅지에 걸려있던 은장도 두 자루를 뽑아 들었다.
그들이 팔을 내렸을 땐 어느새 지근거리에 인접하게 되었고, 그들이 반응하기 전에 그녀의 두 팔이 종횡무진 휘둘러졌다.
파파파팟!!
핏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한바탕 잔혹한 춤을 춘 그녀가 빙글 몸을 회전시킬 때, 흑서단주는 두 자루 낫을 휘둘러왔고 흑사단주는 이를 악물며 단검을 내리찍었다.
- 가뜩이나 약한 놈들이, 발악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네. 이때의 답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두 명의 합공 속으로 홍단은 몸을 던지듯 뛰어들었다.
“어억?!”
작은 체구의 그녀가 몸을 던질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두 단주는 순간적으로 멈칫거렸고, 그 틈에 홍단은 은장도를 쑤셔 넣었다.
푹, 푸욱!
두 개의 파육음이 울려 퍼졌으니, 하나는 그녀의 몸에 낫자루가 박히는 소리였고, 하나는 그녀가 은장도 하나를 흑사단주의 심장에 찔러넣는 소리였다.
“여, 여기서…….”
원통한 눈빛으로 허물어지는 흑사단주.
그 모습을 보는 흑서단주의 두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크게 뜨였다.
“마, 말도 안 돼……!”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 찬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도망치는 걸 택했다. 홍단이 흑사단주와 공멸하다시피 했으니, 이때라면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였다.
하나,
푸욱!
“끄아아악!!”
뒤에서 달아 든 비도가 흑서단주의 종아리에 격추했다.
한쪽 팔에 낫이 깊게 박혔음에도 홍단이 끝끝내 그를 추격해 온 것이다.
“어딜 가시는지요.”
“이… 이이… 요녀 같으니라고……!!”
두 눈에서 귀기(鬼氣)를 풀풀 풍기며 다가오는 홍단은 그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끝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걸 끝내는 순간,
“크아아아아아아아!!”
한쪽에서 거대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미 무력화시켜 놓았다 생각했던 구만호가 괴력을 일으키며 자신을 결박한 쇠사슬을 떨쳐내고 있었다.
‘무슨 신력이… 팔문연쇄진을 힘으로 떨쳐내고 있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 괴력으로 쇠사슬을 떨쳐내는 구만호는 이윽고 두 눈을 희번덕 뜨며 으르렁거렸다.
“하다, 하다, 하오문의 잡것들에게 발목을 잡히는구나.”
“…얌전히 항복하시지요. 어차피 전세는 기울었습니다.”
“크크, 항복? 같잖은 소리.”
그건 용독문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소리다.
“이미 이 지경까지 온 판국. 더 이상 볼 게 없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용독문에서 처벌을 받을 것이다.
구만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독문은 짧은 시간에 급성장을 한 문파인 만큼, 성과에 대한 보상도 확실하지만 처벌도 가혹하기 그지없다.
‘나 역시 ‘대법’의 제물로 바쳐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잔혹한 결단이 어렸다.
“다 같이 죽는 거다!!”
쿠웅!
단전 어림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금단의 문이 열려 젖혀지는 소리였고, 그 속에 봉인되어 있던 것이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
이윽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기이할 정도로 붉던 그의 피부가 점점 새까맣게 물들어 가더니, 흑요석처럼 변해 버린 것이다!
“홍화단! 변형연쇄진을 전개합니다!”
위기감을 느낀 홍단이 소리쳤고, 뒤로 나가떨어졌던 홍화단원들이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으며 쇠사슬을 투척했다.
구만호의 전신을 얽어매기 위한 쇠사슬 세례였지만,
“흥!!”
그가 코웃음 치며 한 번 손을 휘저으니, 연쇄진은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무너져 버렸다.
‘괴물이구나!’
홍단은 그 광경에 아득함을 느꼈지만,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구만호를 향해 뛰어들며 혈화구절편을 휘둘렀다.
하나,
콰직―
“애들 장난은 이제 끝이다.”
한 손으로 연검을 움켜쥔 구만호는 금속으로 된 혈화구절편을 엿가락처럼 부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휘두르니, 홍단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나가떨어졌다.
쿠당탕!
“…흐윽.”
그녀는 짧게 신음을 삼키며 어서 빨리 일어나 자세를 잡으려 했으나, 축적된 피로에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그사이 성큼성큼 다가온 구만호는 어느새 훌쩍 가까워져 있었고, 그의 뒤편으로 홍화단원들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안 돼…….’
도망치라고, 이건 괴물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는가 싶은 순간,
“야.”
이명이 들려오는 그녀의 귓속에, 서늘하기 그지없게 꽂히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어?”
쿠당탕―
바보 같은 단말마를 내며 쓰러지는 구만호였으니…….
그 비현실적인 시야 속에 홍단이 눈을 감았다 뜨니 누군가 쓰러진 구만호의 머리를 짓밟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거, 어디서 난 거냐?”
까맣게 물들어 가는 시야, 그 속에서 홍단은 조용히 그 비현실의 주인공을 되뇌었다.
‘…당, 유혼…….’
그가 마침내 전면에 나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