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이 내기는, 제가 이긴 듯하군요 】
과거의 기억 속에서 답을 찾아낸 당유혼은 바로 움직였고, 그 발걸음을 받게 된 하윤호는 눈물을 삼켰다.
‘이 자식, 결국 말 바꾸는구나.’
일주일 뒤에 오겠다더니 고작 하루 만에 찾아오는 익숙한 얼굴.
이럴 거면 차라리 일주일 기다려 준다고도 하지 말든가!!
그래도 시간은 조금 벌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어제의 자신을 원망하며 하윤호가 애써 입을 열었다.
“…일주일은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요?”
“일주일 안이라고 했지, 일주일 준다고는 안 했다.”
“와…….”
돈이면 부모도 팔아먹는다는 흑상도 이정도로 상도덕이 없지는 않을 텐데.
하윤호가 경악을 금치 못해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한밤중에 찾아온 불청객은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됐고. 아직 떠올린 방법은 없지?”
“그야 뭐…….”
있을 수가 없지.
애써 뒷말은 삼켰지만, 의미는 대충 통한 듯했다.
“그럼 내 방법대로 가자.”
“…뭐, 독이라도 탑니까요? 아니면 밤중에 쳐들어 가서 목이라도 딴다는…….”
“아니, 이 자식이 진짜?! 내가 사파 나부랭이인 줄 알아?!”
‘예, 그쵸. 듣는 저는 사파나부랭이지만.’
허허― 웃으며 하윤호는 달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뭐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십니까요?”
“용독문에 몰래 침투해야겠다. 쓸 만한 것 있으면 하나만 줘봐.”
“역시 암살을…….”
“니 목부터 따줄까?”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려 대 사천당가의 후손인 당유혼 소협께서. 여기 있습니다요.”
미리 준비해 놨다는 듯 재빨리 탁자 밑에서 도면 하나를 꺼냈다.
“용독문의 장원이 지어질 당시 인부에게서 구한 설계도입니다요.”
“예상은 했지만, 진짜 있네?”
“저희 특기지 않습니까요. 헌데… 정말 무슨 생각이십니까요?”
흠.
‘이 녀석에게는 말해 줘야겠지.’
다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하윤호는 알 필요가 있기는 했다.
빌어 처먹을 도둑놈들을 줄줄이 싸잡을 계획을 풀어냈고, 그것을 전부들은 하윤호의 표정은 딱딱히 굳었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의 두 눈이 재빨리 도면을 훑고는 묵필을 꺼내와 거침없이 세 군데에 원을 그렸다.
“예상가는 곳은 세 군데입니다. 다만 문제는 셋 다 심부에 있다는 사실입니다요.”
용독문은 그 위세에 걸맞게 장원의 크기도 넓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세 군데는 하필 다 용독문의 깊은 곳에 있었고, 어느 하나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무슨 상관이야?”
귀찮게 전부 뒤질 수고를 덜었다며 도면을 챙겨 든 당유혼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다.”
“잠깐! 지원 병력은 필요 없으십니까요?”
“됐어. 뭘 주렁주렁 달고 다녀봐야 귀찮을 뿐이야. 내게 필요한 건 이정도면 족하지.”
어차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뛰어들어야 하는 법. 망설임 없는 걸음을 떼어내는 당유혼을 보며 하윤호는 생각했다.
‘저 복면을 진작에 버렸어야 했는데…….’
* * *
누군가의 걱정과 의심을 한 몸에 받은 당유혼은 걱정이 무색하게도 무사히 용독문에 침투했다.
아니, 무사히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기는 했다. 그의 전신에는 녹색과 자색의 분과 액체가 그득했으니까.
“이 새끼들, 무슨 독이 지들 거야? 훔친 독이라고 어지간히 펑펑 뿌려놨네.”
누가 용독문 아니랄까 봐. 이름값 하듯 그들의 담장에는 온갖 독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뭐, 단순히 독이 뿌려져 있는 거야 우리 때도 했긴 한데…….’
- 크르르…….
단전에 자리 잡은 녀석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맛없는 걸 먹였다고 주인에게 항변하는 것만 같았다.
‘무슨 독의 배합은 신경도 안 쓰고 이따위로 뿌려놔?’
뿌려진 독은 조잡하기 그지없어서, 어떤 건 그 급이 심히 저질스럽기도 했다.
물론, 배 속에 존재하는 탐은 그런 것 따위는 구애받지 않고 전부 씹어먹었지만 여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럼, 이 도둑놈 자식들이 어디다가 꼭꼭 숨겨놨나 하는 건데…….’
도면의 내용이야 이미 기억 속에 다 저장해 놨고, 주변을 슥슥 훑어보던 당유혼은 이내 눈에 띄는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거구나?’
가장 가까이 있는 첫 번째 목표물.
당유혼은 순식간에 그림자에 스며들 듯 사라져 주변을 순찰하는 이들의 시선을 피해 건물로 다가갔다.
타탓―
이윽고 바퀴벌레처럼 건물 기둥을 타고 올라 그대로 지붕에 도달했다.
‘들어가 보실까.’
하나, 둘 하나, 둘.
얹혀 있는 기와를 걷어내길 한참, 안으로 파고 들어갈 공간이 마련되자 곧장 그 안으로 몸을 던져넣었다.
스릉―
깃털이 떨어지듯 부드러운 착지.
녹슬지 않은 그 솜씨에 미소를 짓는 그 순간,
팅―
“아.”
무언가 울려 퍼지는 듯한 진동에 당유혼은 하핫― 하고 웃었다.
이것, 참.
“망했네.”
파파파팟!!
어둠 사이로, 빛살과 같은 암기들이 쏟아졌다.
개중 가난하디 가난한 당가에서 쓰는 싸구려 암기들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예기를 자랑하는 최고급품들이었다.
그것들이 날아드는 순간, 당유혼의 몸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푸푸푹!!
‘환영 인사하고는.’
그 짧은 시간에 암기 세례를 피해 내는 곡예를 보인 당유혼은 한술 더 떠 그중 하나를 잡아챈 상태였다.
짧은 비도 형태의 암기 끝에는 녹색의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 그 정체는 두말할 것 없이 극독이었다.
푸시시…….
떨어진 극독이 나무 바닥을 녹이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왔네.’
암만 이 자식들이 독이 남아돈다 해도 아무 데나 이런 것들을 뿌려대지는 않겠지.
주변을 둘러보니 좁은 통로가 하나 나 있었다.
그 방향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굳게 잠긴 자물쇠가 눈에 들어왔다.
‘쯧, 예전이었으면 그냥 썰어버렸을 텐데.’
한 오십 년 전이었으면 강철로 된 자물쇠도 썰어버릴 자신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하지만, 뭐…….
‘자물쇠는 열라고 있는 거지.’
슥슥―
이럴 줄 알고 하오문에서 챙겨온 도구가 있다.
볼록한 꼬챙이와 오목한 꼬챙이와 뾰족한 꼬챙이. 이것들을 이리저리 뒤섞으면?
따앙―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법이지.”
봉인이 풀린 자물쇠는 한낱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게 된다.
“훗, 이정도야 우습지.”
내가 말이야, 소싯적에는 당가신투로 불리는 몸이었다고!
아련한 옛 기억을 뒤로하며,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 안에서는,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구만.’
지독한 악취가 났다.
단순히 무언가가 썩어간다거나, 오물의 냄새와 같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좀 더 근원적인 악의가 느껴지는 무언가.
그리고 그 악취의 정체는 약 일각 정도 더 들어갔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통?’
원기둥 형태의 통이 놓여있었다.
특수 제작한 것인지 금속 재질의 통은 그 개수가 스무 개가량 되었다.
“이게 악취의 근원이군.”
천천히 다가가 뚜껑을 열어젖히니,
“하… 이럴 줄 알았다, 이 자식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통 안 가득 채워진 약물과 그 속에 절여지다시피 한…….
“사람, 아니… 강시(殭屍).”
강시.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만들어 낸 끔찍한 마물(魔物)이다.
약물로 초월적인 육체의 성능을 내게 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기에 무림에서는 정사를 막론하고 금기시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당가의 십 대 금기 중 하나.”
통 위에 놓인 명패를 바라보았다.
흑견단주.
“쯧쯧, 결국 이 꼴이 됐나.”
방계들에게 처맞았다는 녀석이었던가?
솔직히 이런 놈들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건 우습지만, 하오문 습격 당시를 떠올려 보면 일이 돌아가는 꼴은 뻔했다.
“강시공을 익힌 놈들과 강시를 만드는 놈들이라…….”
하오문 습격 당시, 흑호단주라며 떠들던 놈이 익힌 게 강시공이었다.
유사 강시처럼 변모하는 게 특징으로, 당가에서 만들던 강시인 독강시의 부산물과 같은 금단이었다.
“이 바퀴벌레 같은 것들. 내가 분명 직접 폐기시켰을 텐데… 이딴 건 또 어디서 찾아낸 거야?”
하여튼, 이런 것들은 잘 죽지도 않는다.
꼭 금지시켜 놓으면 어디선가 꾸물꾸물 손을 뻗게 마련이고, 박멸시켜 놨다 하면 바퀴벌레처럼 잘도 살아남는다.
‘그런 새끼들은 마교도놈들이 끝일 거라 생각했는데…….’
하여튼 세상은 넓고 패줄 놈은 많다.
그래도 뭐.
“나한테는 잘된 일이잖아?”
첨벙―
독액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부글부글―
‘지독한 악의구만.’
손을 넣자마자 독기가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의 몸뚱이면 닿자마자 녹을 법한 기세.
금단이 금단이라 불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내 것은, 네놈보다 더 지독하거든.’
독(毒)을 잡는 것은 더 지독한 극독(劇毒)!
- 크르르…….
단전에 똬리 틀고 있던 녀석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용트림을 터트렸다.
탐(貪)!
전무후무한 마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크라라라라!!
녀석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사납게 포효했다.
이곳은 오로지 자신만의 공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웬걸, 침입자가 더러운 발걸음을 내디디는 게 아닌가?
‘눈 뜨고는 못 두고 보겠지.’
한없이 나태하고 게으르던 녀석이지만, 한 번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이 사납게 변한다.
독액에 맞닿아 있던 손을 향해 달려든 녀석이 그 포악한 아가리를 쫘악 벌렸다.
콰직콰직콰직콰직.
콰직콰직콰직콰직.
그 이후 이어진 것은 압도적인 약탈이요, 원초적인 포식.
산 사람을 마물로 만드는 극독은 뼛조각 한 점 남기지 못하고 전부 씹어 삼켜졌다.
- 크르르…….
탐은 일방적인 학살을 끝내고도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그건 실로…….
“아니, 이 새끼. 배고프다는 투정을 왜 이렇게 부려?”
- 크릉!
어이가 없네.
“한동안 밥 안 줬기는 한데, 아까 담 넘을 때도 밥 먹었잖아?”
- 크릉크릉!
“뭐? 그건 맛이 없다고? 아니, 잡식인 건 맞는데…….”
- 크르릉!
“알았어, 이거라도 우선 먹어. 이건 맛있잖아.”
- 크르르르…….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겠다는 듯 울음소리를 낮추는 탐.
이젠 뭐, 이 녀석 하나 키우는 것도 일이 돼버렸다.
‘그래도 뭐…….’
새로운 통에 손을 담그니 또다시 폭식을 시작하는 탐을 뒤로 한 채, 당유혼은 지금쯤 가산을 다 털리고 있는지도 모를 용독문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 뜨면 볼 만할 거야.’
* * *
한편, 누군가의 악의를 뭉클뭉클 받고 있는 이는 지금 어느 거대한 비석 앞에 서 있었다.
용독문주 용제운.
이제 그리 불리는 이가 바라보는 비석은 그 크기가 일 장에 달했으니, 거대한 전각이 이 비석 하나를 담기 위해 있다 봐도 무방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래…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거야.”
천천히 비석의 표면을 쓸어내리는 용제운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사실 그럴 만한 게, 그는 요즈음 인생 동안 얼마 겪어보지 못했던 실패를 연이어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거대한 집단으로 발돋움하려는 상황에 부하들은 어디 거렁뱅이 같은 놈들에게 처맞고 오지 않나, 화가 나서 제일 눈에 밟히는 놈들을 쓸어버리려 하니 싹 다 전멸이란다.
그의 군사 채용이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말리지 않았다면, 머리에서 뭐가 뚝― 끊겨 그대로 전군 돌격 명령을 내릴 뻔했다.
“그래… 정공법으로 가는 거다. 정식적으로 용독문이 사천당가가 되고, 내가 사천당가의 가주가 되면 돼. 그럼 사파의 거두인 하오문을 토벌하고 협의를 살린다는 핑계로 사천삼주의 병력을 빌려올 수 있다……!”
그가 바보 같아서 하오문을 가만히 내버려 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위해선…….
“…내 이름을 여기 새겨야겠지.”
끄드득―
비석의 표면에 닿아 있는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 비석의 정체는 바로 역대 사천당가 가주와 태상 장로의 이름들이 새겨진 조사비!
“내가… 내가 사천당가의 가주가 되는 거다… 크하, 크하하하하!!”
평생을 품어왔던 비원을 떠올리는 지금, 분노와 증오를 뒤덮는 욕망이 폭발했다.
조사비가 놓여있는 공간.
약 일각 전까지 용독문주의 광기 어린 외침이 울려 퍼지던 공간은 이제 텅 비어버렸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달각―
무언가 비틀리는 소리가 나더니 지붕의 부품 하나가 분해되고, 그 위로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슥슥―
주변을 둘러본 누군가는 그대로 툭― 떨어져 내렸고, 가볍게 비석 앞에 안착했다.
“흠…….”
낯선 침입자, 당유혼은 이제는 빈 장소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저 변태 새끼는?”
‘왜 남의 집안 묘비에다 지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