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당유혼이 이곳에 온 지는 조금 됐다. 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져 지붕 위에서 잠복하고 있었고, 이후 용제운이 들어와 그가 하는 꼴들을 전부 지켜봤다.
갑자기 조사비에다 손을 올리더니 지 혼자 부르르 떠는 그 모든 광경을.
“…이상 성욕자거나 정신병자거나 둘 중 하나겠지.”
쯧쯧―
혀를 차고 거대한 비석 앞에 섰다.
조사비. 그 크기가 일 장에 달하는 거대한 비석. 그 표면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대 사천당가 삼십이 대 가주 당사명.]
[대 사천당가 삼십이 대 태상장로 당유혼.]
“…하.”
조사비에 새겨지는 것은 가주와 태상장로의 이름이다.
다만 태상장로란 직위는 종종 공석일 때도 있었다. 가주에 버금가는 재능을 지녔으나, 가주가 되지 못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태상장로였기에 당유혼 역시 근 일백 년 만에 책봉된 태상장로였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저곳에 당유혼 이름 석 자를 새긴 것은 스스로 한 게 아니었다.
‘사유야.’
[대 사천당가 삼십삼 대 가주 당사유.]
그와 동시대에 함께 했던 가주 당사명과는 달리 홀로 외로이 새겨져 있는 이름.
그 이름을 곱씹을 때면 속이 쓰라려 올 수밖에 없었다.
“바보 같은 녀석.”
손을 뻗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쓸었다. 자신과 당사명 이전의 이름들이 곱고 매끄럽게 쓰여 있다면, 자신의 것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삐뚤빼뚤하게 새겨진 흔적, 그 이유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그 몸으로… 용케도 우리들의 이름을 새겨넣으려 했구나.”
사천당가 삼십삼 대 가주 당사유, 그는 무공을 제대로 익힐 수 없는 천형을 타고났다. 때문에 선대의 가주들이 쉽게 이름을 새겨넣을 때도, 당사유는 어렵게 끌과 정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각인했을 것이다.
“바보 같은 녀석. 지 애비를 닮아서……. 고집만 더럽게 세다니까.”
힘없이 떨리는 손으로 비석을 쓰다듬고 있으니, 옛 기억들이 물씬 떠올랐다.
그 기억들을 되짚어 필요한 부분에 다다랐다.
“이렇게… 였었던가.”
우웅―
벽면에 맞닿은 손을 타고 내공이 흘러 들어갔다.
당가의 가주들에게만 전해지는 도반삼양귀원공(導反三陽歸元功)의 구결을 따라 주입되었다.
그러자,
쿠구구구…….
비석이 작게 떨리더니, 안쪽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있구나.”
그 공간 안쪽에는 놀랍게도 서책 하나가 들어있었으니, 그것을 집어 든 당유혼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멍청한 녀석, 이런 공간이 있으면 가주 전용 무공이나 숨겨둘 것이지.”
조사비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간단했다. 전전대 가주 당사명에게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사명이는 누구보다 당가의 화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이걸 굳이 이곳에 숨겨두었었지…….’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한때 당유혼은 그런 당사명의 모습에 왜 혼자 말하지도 못할 것들을 속에 담아놓고 응어리지게 하냐 다그쳤던 적이 많았다.
이것 역시 그중 아주 일부일 뿐이었다.
그때마다 당사명이 한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것이, 제가 가문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빌어먹을 놈.”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기억 한편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 * *
당가의 어린 가주 당위혼은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았다.
갑자기 밤중에 뛰쳐 들어 온 방문객의 정체는 당유혼.
그 모습을 보며, 당위혼은 조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총관이 있었으면 난리를 쳤겠군.’
밑도 끝도 없이 가주 집무실에 불쑥 들어오는 형을 바라보며, 작성하던 것들을 간단히 정리한 동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인 일이십니까? 지난번에 그리 떠나시더니.”
“가주. 네가 도와줄 게 있다.”
“흐음, 그 도움이란 가주로서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가주로서의 도움이라.
당위혼은 그 말에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눈앞의 이 양반이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있었던가?
‘아니,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었지.’
그 사실에 당위혼은 두루마리들을 완전히 한쪽으로 밀어놓고 낯선 모습을 비치는 의형을 마주했다.
“말씀하십시오.”
“그전에 하나 묻는 건데, 왜 웃고 있냐?”
“제가 말입니까?”
당위혼은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만져봤다. 과연 위로 조금 올라가 있는 게 히쭉 미소를 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래 봬도 꽤 긴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조금 기쁜 것도 사실이긴 하군요.”
“긴장하면서도 기쁜 건 또 웬 말이야?”
“글쎄요. 얼마나 중차대한 일을 형님께서 제게 맡기시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제가 형님을 도울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그저 그 사실만으로도 기쁘다.
그리 환하게 웃는 당위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에라이, 미친놈.”
당유혼은 솔직한 감상을 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도 후손 녀석은 꽤 번듯하게 잘 태어났다 싶었는데, 누가 당가의 핏줄 아니랄까 봐 저 속에 광기를 감추고 있다.
용케도 그간 잘 숨기고 있었잖아?
그 사실에 감탄하며 당유혼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곧, 용독문이 개파 대회를 개최할 거다.”
“개파 대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전후 사정을 알 수 없는 당위혼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이미 태어난 지 이십 년도 더 지난 성인이 갑자기 다음 주에 제가 태어날 거예요! 라고 말한다면 누구나 정신의 지병을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 기색을 숨기지 않는 어린 가주에게 당유혼은 차분히 설명해 줬다.
“그놈들이 사천당가로 다시 태어나겠다더라.”
“예? 이런 무도한 것들이……!!”
오호라.
자신이었다면 육두문자부터 시작해 부모에 조부모, 증조, 고조 등등 성씨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욕을 박았을 텐데, 그래도 저 녀석은 한때 독협(毒俠)이라 불리던 이의 후손 아니랄까 봐 아주 고상하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지금… 제가 생각한 게 맞습니까?”
아주 정확하단다.
우리는 이제 용독문을 사천당가라 부르기로 했어요, 라는 선언은 당대 사천당 가주에게 있어서는 부모를 맞바꾸자, 라는 교환신청으로 봐도 무방했다.
‘하필이면 한쪽은 부모가 없는 고아라는 게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건 뭐, 부모를 뺏으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잔뜩 몸을 떨던 당위혼은 눈에 문득 자신에게 이런 비분강개할 소식을 전해 주고도 침착한 의형의 모습이 보였다.
이상하다? 만약 반대 상황이었다면 당장 용독문주의 목을 따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아니지, 이미 쳐들어 가서 칼춤을 추고 있으시겠지.’
의아한 표정을 짓던 당위혼이지만, 순간 머릿속에 그간 당유혼이 보였던 일련의 행동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유혼 공인, 천재라 불리는 당위혼이었기에, 그 정보는 머릿속에서 취합되어 하나의 결론으로 도출되었다.
“…형님께서는, 이미 무언가 대비를 해놓으셨겠군요.”
“호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그 사실을 뻔히 아시는 형님이 지금 여기서 제게 그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 계시잖습니까.”
‘정확하구만.’
그래도 안면 튼 지 몇 개월 지났다고, 벌써 자신을 파악하고 그걸 근거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래, 네 추측이 맞다.”
흔쾌히 사실을 인정한 당유혼은 의자를 끌어다 엉덩이를 붙여 앉으며 턱을 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해 뒀다.”
“대응책이라…….”
어린 가주는 재빨리 머릿속 주판을 굴렸다.
눈앞의 형님이 오고 나서 그간 발전한 당가의 역량과 그걸 만들어 낸 저 형님의 바닥을 알 수 없는 무력, 그리고 그 나름대로 성장한 자기 자신.
그 모든 것을 생각한 결과…….
‘주판알이 부족하군.’
암만 주판을 굴려도 결괏값이 도출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어디입니까? 형님께서 힘을 빌려온 외부 세력이?”
“거참. 세상은 역시 불공평하네.”
“예?”
“무재(武材)도 뛰어난 녀석이 머리도 잘 돌아가잖아?”
“제 생각이 맞군요.”
그것이 긍정을 뜻하는 걸 눈치챈 당위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당금 용독문에 적대할 만한 집단은 많이 없습니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야 무방하겠지요. 사천삼주라 불리는 정파의 대문파들이 용독문의 뒤를 봐준다는 것이야 이미 공공재나 다름없는 사실, 그렇다면… 자, 잠깐…….”
그리고 천천히 외부 세력이란 주판알을 가져와 이리저리 계산하던 당위혼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하오문… 하오문인 것입니까?!!”
“오, 이건 진짜 놀라운데?”
이걸 진짜 정답을 맞혀?
‘사명아, 사유야 기뻐해라. 당가의 앞날은 창창하겠구나!’
호부견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당가의 자손이 할애비에 이어 애비 손자까지 전부 대박을 터트림에 당유혼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때, 당위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형님!! 진짜 미치셨습니까?!”
아니, 손잡을 곳이 없어서 하오문이라고?
어떻게 손을 잡았는지는 둘째 치고, 그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 자체가 당위혼에게는 기존 상식을 깨부수는 천재지변과 같은 일이었다.
“쩝, 왜 또 소리를 지르고 그러느냐?”
“무엇을 그리 입맛을 다시며 억울해하십니까! 하오문이라니요! 형님, 저희가 아무리 몰락했다 치더라도 그들은 사파입니다! 아니, 그냥 사파도 아니고 무려 사파의 거두입니다!”
같은 사승을 이었다거나, 혈맥을 통해 이어져 오는 정파의 문파들과 달리 이권과 개인의 탐욕을 통해 뭉친 게 사파의 문파들이다.
배신과 협잡질은 없으면 서운한 수준의 것인 그들은 툭하면 동료의 등판에 칼질을 하는 게 특기였다.
때문에 그 수명이 길어도 십 년을 넘기지 않는 게 사파인데, 그런 사파의 본질을 타고난 주제에 몇백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게 하오문이다.
“거두는 개뿔. 그래봐야 사파 나부랭이지.”
“아니…….”
감히 하오문을 상대로 사파 나부랭이라 부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자신이 알기로 구시대 구파일방이라 칭해지던 대문파의 소속원들도 그들의 면전에서는 감히 그리 칭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 사실에 입각해 무어라 하려던 당위혼이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어찌 그들을 알게 되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형님에게 상식을 논하며 입씨름을 해봐야 손해인 것은 자기 자신이니까.
“…제가 모르는 사이에 사파와 연맹하여 판을 키워놓으신 형님께서, 굳이 제게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뭐야, 너 삐졌냐?”
“제가 애도 아니고 삐지긴 뭘 삐집니까.”
에이, 삐졌네.
‘그리고 애 맞잖아.’
성숙해서 그렇지, 아직 열다섯에 불과한 어린 가주를 보며 당유혼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그동안 말로만 너를 가주라 불러놓고 이런 일들을 사전에 미리 말해 주지 않아서.”
“혀, 형님?”
갑자기 고개를 숙여오는 그 모습은 스스로는 부정해도 애처럼 볼을 부풀리던 어린 가주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미안한 건 이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그렇게 멋대로 일을 진행시켜 놓고, 이제 와서 네게 도움을 청한다는 게 감히 가문의 일원으로서 가주에게 더할 나위 없는 무례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네게 도움을 청하고자 한다.”
“…허어.”
그 자존심 강하던 형님이 이러고 있다.
그 사실에 당위혼은 뭐라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고개를 드시지요. 뭐가 됐건, 형님께서 이리 찾아온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 아닙니까?”
천생 그는 독협이라 불리던 이의 후손.
그는 가문의 일원에게 차마 모질지 못했으며, 지금은 가주라는 자리에 오른 이로서 감정보다는 이성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대체 형님의 큰 그림이 무엇이기에 이리 부탁을 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경청의 자세를 취하는 어린 가주를 보며 당유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떤 감정적 행동이 아니라, 가주라는 자리에 앉은 이로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가짐.
‘역시, 닮았구나.’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떠올린 당유혼은 서서히 입을 떼었다.
그간 있었던 일들이 간략히 흘러나왔고, 이후 일어날 일들과 그가 진행할 계획들이 서서히 풀려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