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당가 노비명부.
그 이름이 토해져 나오는 순간, 좌중의 분위기는 딱딱하게 얼어붙…거나 하지는 않았다.
‘저게 뭐야?’
‘갑자기 노비명부를 왜?’
무림에서 노비라는 제도가 그리 흔하지는 않았지만, 가문으로 이루어진 집단의 경우는 노비를 소유한 경우가 왕왕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관아에서 나온 이들도 제법 있었으니, 관노(官奴)의 경우도 왕왕 볼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이런 축제 현장에서 노비명부를 꺼내 드는 당위혼의 모습에는 다들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저, 저게 어째서 저기에……?’
이 자리의 주인이자, 이 축제를 개최한 용독문주 용제운! 그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맹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이런, 시발. X됐다.’
무덤덤하리만치 동요가 없는 당위혼의 두 눈과 시선이 맞닿는 순간, 용제운은 당위혼이 모든 것을 알고 이곳에 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정해야 돼, 그리고 저걸 뺏어야 한다!!’
머릿속에 천둥, 벼락이 치는 듯했고, 용제운은 개파 대회고 나발이고 저 서책을 뺏어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문주님.”
우뚝―
너무나 절묘한 순간 울려 퍼진 목소리가 그의 맥을 끊어버렸다.
“이걸 가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뭐, 라고?’
환청을 들은 듯했다. 그리고 뒤이어 복잡한 감정이 치솟았다.
하나는 안도감이고, 또 하나는…….
‘이 시건방진 자식이…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거냐?!’
상황을 파악한 뒤 치솟는 울분!
주변 이들은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부들부들 떠는지를 알지 못하니, 오로지 둘만의 대국이 이 자리에 펼쳐진 것이다.
“허허… 당가의 노비명부를 말이오?”
애써 태연한 척 답하자 당위혼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습니다. 문주님이 완연히 당가의 가주가 되신다면… 챙기셔야 할 제물 중 하나가 이것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노비는 사유재산으로 취급되었다.
그건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용독문주에게는 다른 말로 들려왔다.
그렇기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습니다.”
당위혼은 미소 지었다.
만난 지 몇 달밖에 안 되었지만, 요 근래 몇 달간 너무나 자주 봐서 익숙해진 그 미소를.
“저와 대련 한 판 하시지요.”
“대련… 말이오?”
“그렇습니다. 이곳에 모인 무림 동도 여러분께 여흥 거리를 하나 선사해 드리는 셈으로 쳐서 말입니다.”
당연히 거절하는 게 옳은 제안이지만,
“…그걸 걸고 말이오?”
글쎄, 그게 가능하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일 수도 없었고…….
“예. 대신, 그냥 붙으면 제게 너무 불리하니 세 수만 양보해 주십시오.”
당위혼은 그 위에 세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첫째, 독을 사용하지 않을 것. 둘째, 인명에 위험이 가해지는 무공을 사용하지 않을 것. 셋째, 이 비무대 위에서만 싸울 것.”
“…좋소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곧바로 튀어나왔으니, 당위혼은 옅게 웃으며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 가주님?!!”
“아니… 어, 어째서!!”
“말려야 하는 것 아냐?!”
함께 왔던 방계들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가주…님?”
당궁상조차 얼마나 놀랐는지, 턱이 떨어질 듯 입을 쩍 벌렸다. 오직 한 명. 그 시선 끝에 있던 당유혼만이 이마를 딱 치며 감탄했다.
“…캬, 저 골때리는 놈. 저딴 짓거리는 어디서 배워먹은 거야?”
듣고 있던 방계들이 하나같이 마음속으로 바로 ‘너요, 이 새끼야!!’라고 외치는 것을 알기나 할까?
당유혼은 낄낄 웃다가 손을 뻗어 날아든 서책을 잡아챘다.
‘자신 있냐?’
굳이 입을 열어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건 원래 계획한 것과는 다른 이야기. 하지만, 그렇다 해서 말릴 수도 없는 결정이었다.
‘이게… 네가 가주로서 내린 결정이란 말이지?’
가주의 결정은 지엄한 것.
아무리 제멋대로 살아온 당유혼일지라도, 이 어린 가주의 선택에 딴죽을 걸 수는 없었다.
‘뭣보다,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
자신의 시선을 얼마나 잘 받아들인 것인지, 멋대로 질러 버린 어린 가주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자 저쪽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인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보시겠습니까?”
천천히 두 손을 올리며 자세를 취하는 당위혼.
그에 용제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자식들이 무슨 술수를 부릴지는 모르겠지만…….’
이기면 된다.
분노와 모욕감에 몸서리쳐졌지만, 그것보다 우선해서 떠오른 것은 안도감.
저게 공개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수모가 낫다는 생각에, 그는 필사적으로 당황을 숨기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좋소. 허면, 아무래도 이 문주가 연배가 더 높은바, 삼 초를 양보해 드리겠소.”
애써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으니…….
“그렇다면, 사양 않고 가겠습니다.”
파팟!
당위혼은 조금의 거부도 없이 전방을 향해 쇄도해 들었다.
‘뭣?’
그래도 몇 번 겸양 정도는 떨 줄 알았던 당위혼이 곧바로 달려들자 용제운은 순간 당황 뒤로 물러섰다.
그건 당위혼이 이렇게 갑작스레 달려들 거라 예상하지 못한 바도 있으나…….
파앙!
‘이놈, 분명 당가의 무공은 대부분 실전되었을 텐데?’
내뻗어진 주먹이 대기를 깨트리는 굉음을 만들어 냈다.
용제운은 당위혼이 나이도 어리고 당가에는 제대로 익힐 무공도 없을 거라 여겨 얕보았지만, 날카로운 칼은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져도 어른을 위협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서둘러 뒤로 물러서는 용제운을 쫓아 당위혼이 바짝 따라붙었고 그의 두 손이 용제운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쩌엉―!!
‘아깝다.’
일격을 먹일 수 있었건만, 그 찰나에 용제운이 두 팔을 겹쳐 막아낸 덕에 회심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당가의 부를 탈취하고, 그로부터 수많은 영약을 밥 먹듯이 먹고, 자신의 삶보다 두 배도 넘는 기간 동안 무공을 연마해 왔을 상대다.
쉽게 따라잡을 수 있다면 공상에 불과할 터, 당위혼은 그런 헛된 희망 대신 마지막 삼 초를 휘둘렀다.
우득―
손아귀가 갈퀴처럼 날카로워지고, 손가락 하나하나가 매의 발톱처럼 예리하게 세워졌다.
응골조(鷹骨爪)의 수법이 휘둘러지며 허공에 붉은 궤적이 새겨졌다.
“크하……!!”
간발의 차이!
당위혼의 손아귀가 닿기 전 용제운의 허리가 뒤로 꺾였다. 바닥과 거의 수평에 가까이 꺾였던 허리는 활처럼 튕겨 원상태로 돌아왔고, 그 힘을 담은 주먹이 쑤욱 내뻗어졌다!
콰아앙!!
‘…어린놈이…….’
삼 장 밖으로 날아갔으나 두 팔로 대부분의 충격을 상쇄한 당가의 어린 가주를 보며 용제운은 당황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감히… 내게 이런 모욕을 줘?!’
겉보기로는 아무 피해 없이 막아냈고, 실제로도 별다른 타격은 입지 않았지만 조금 전 삼 초로 용제운은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여유롭게 막아내거나 피한 것도 아니고 허겁지겁 물러서기 바쁜 추태라니!
‘가만두지 않겠다……!!’
단숨에 그 분노를 폭발시키기 위해 움직이려 했으나…….
멈칫―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독주머니로 향하려던 손이 움찔거리며 멈추었다.
“첫째, 독을 사용하지 않을 것.”
그 순간 떠오른 이 대련의 첫 번째 조건, 독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용독문의 주인에게 독을 금하는 것!
사실상 팔다리를 묶는 조건에 익숙하게 독주머니로 향하던 손길을 멈춘 용제운은 오히려 더욱 사납게 이를 갈았다.
‘건방진 놈. 내가 독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네놈에게 희망이 생길 것 같으냐?’
허리춤으로 내렸던 두 손을 가슴께로 올리며 천천히 낫과 같은 모양을 만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사마귀와 같았으니, 당위혼은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에서 그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본가의 당랑독수(螳螂毒手).’
눈앞에서 도둑맞은 무공이 펼쳐짐에 당위혼의 눈은 더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허허, 허면 약속했던 삼 초식이 지났으니 본 문주가 가주께 가르침을 드리려 하오.”
그런 당위혼에게 용제운은 애써 여유로운 척 발걸음을 내디뎠다.
겉보기에는 산보하듯 걷는 것 같아도, 몸의 균형이 앞으로 쏠린 게 당장에라도 때려죽이겠다는 의도가 다분했으니… 당위혼은 천천히 선 자리에서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스으윽-
원(圓)을 그렸다.
‘해볼까.’
몸의 중심을 단단히 잡고, 그를 축으로 두 팔은 서서히 곡선을 그린다.
내뻗어진 두 손이 그리는 선은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고, 어느 하나 튀어나옴이 없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니,
푸욱-
그 사이를 꿰뚫는 용제운의 편수가 당위혼의 등 뒤로 불룩 튀어나왔다.
“가, 가주님?!!”
“젠장! 살상은 안 하기로……!!”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방계들이 당장에라도 뛰어나갈 것처럼 소리쳤지만,
“자식, 저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
당유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어버렸다.
“예,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엄살떨지 말고 잘 봐라, 우리들의 가주님이 잊혀졌던 당가의 이름을 세인들에게 다시금 떠올리려 하고 있으니까.”
부들부들.
한편,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방계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선, 당위혼을 꿰뚫었다 싶은 용제운이 눈을 크게 뜬 채 당황의 기색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꿰뚫었다 생각했던 자신의 손끝이 당위혼의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워져 완전히 봉인당한 것이다.
그에 당황하고 있을 때, 당위혼의 손이 섬전처럼 움직였다.
파팟!
“컥?!”
짧게 끊어지는 세 번의 연타!
턱을 후려쳐 돌리고, 가슴팍을 두들겨 숨을 끊고, 복부에 박혀 몸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한쪽 팔로 상대방의 팔을 묶은 상태로 날린 공격이었기에 위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으나, 찰나의 틈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당위혼은 그 틈을 향해 망설임 없이 파고들었다.
스르르…….
그러고는 두 손은 작은 원을 그렸다.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그린 작은 원은 그 좁은 공간에서 최대한의 경로로 그려졌고, 그 궤도에서 가속해 내뻗어졌다.
쩌엉―!!
“크윽!!”
이번엔 미처 막지 못한 용제운은 결국 가슴팍에 쌍장(雙掌)을 막고 뒤로 네 걸음을 비척이며 물러섰다.
속이 타는 고통에 용제운의 입에서는 살기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 모습에 당위혼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확신을 얻었다.
“이… 이이…….”
분노를 참지 못하는 용제운을 흘깃 바라본 당위혼은 천천히 두 손으로 큰 원을 그리고 다시금 가슴 앞에 모으는 자세를 취했으니, 비록 고개 돌리지 않아도 그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문주.”
비록 이렇다 할 상승 절기도 아니고, 대단히 유명한 상승무공도 아니지만, 이것이야말로 현 당가를 대표하는 가전 무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니,
“본가의 차양십이수(遮陽十二手)입니다.”
당가의 가주는 당가의 무공을 선보였다.
‘차양십이수라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용제운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어찌 그 이름을 모를까? 당가의 방계라면 누구에게나 전수되는 무공. 그것은 분명 용제운도 알고 있었고…….
‘이게… 차양십이수라고? 큭… 이 어린놈이 나를 어디까지 농락하려고!!’
때문에,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딴 개나, 소나 익히는 하잘것없는 무공 따위로, 당랑독수를 막아내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
당가의 무공이라고 다 같은 무공이 아니다.
무공 간에도 급수라는 게 존재하고, 당랑독수는 맨 밑바닥의 차양십이수보다 몇 단계는 위에 있는 상승무공이다.
‘그런데… 고작 그런 무공으로 대성의 경지에 이른 내 당랑독수를 막아내?’
그의 눈에 독기가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