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진심으로, 너를 믿었던 거다 】
당위혼의 선언은 커다란 파란을 가져왔다.
“뭐, 뭐? 노예 명부……?”
“용독문주가… ㄴ…….”
“쉿!! 조용해, 이 사람아!! 자네 죽고 싶어?!”
믿기지 않아 중얼거리는 사람.
그런 사람의 입을 막는 사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사람.
그리고,
“흐하하!! 역시 당가의 가주님이시구만!”
누구보다 즐거워하는 사람.
“혀, 형님?!”
“지금 그냥 웃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마냥 즐거워하는 당유혼과 달리,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방계들은 그들의 대형을 중심으로 모여 웅성거렸다.
“이, 이게 어찌 된 겁니까?”
“가주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과, 관인을 무단으로 복제하는 것은 삼족을 멸하는 죄입니다!!”
녀석들.
겁에 질린 방계들을 보며 당유혼은 피식 웃었다.
“뭐,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
“가, 가주님을 말입니까?”
“아니, 이건 이해하고 말고 할 수준이…….”
“됐다, 저건 진짜니까.”
그들의 걱정을 일축하며 당유혼은 팔짱을 꼈다.
“저건 내가 구해 온 거거든.”
“예?!!”
“드디어 관인의 복제에까지 손을 대시… 끄에엑!”
쾅!
“이 자식이. 나 못 믿냐?”
“…믿죠. 대형이라면 충분히 관인에 대한 복제도 할 사람이라고…….”
관인이 무엇인가. 황제의 뜻을 대신하여 일을 하는 관리들의 공문서에 찍히는 공식 인증서다.
그렇기에 관인은 황제의 뜻을 대변하는 증명이고, 이것을 위조하면 황제에 대한 농락… 즉, 반역을 뜻한다.
“미친놈. 내가 그 정도로 미친놈은 아…….”
“왜… 왜 말을 하다 마십니까?”
“아니죠? 아니라고 말씀해 주세요!!”
“허허허.”
자식들. 살다 보면 관인 한두 번 위조 정도는 할 수 있지.
아련한 옛 추억들이 슬쩍슬쩍 고개를 들려 하는 걸 다시 내리누르며 말했다.
“어쨌거나, 네놈들은 불안해하지만, 저 문서는 진짜가 맞다. 그리고 용독문주 용제운은 실제 당가의 탈주 노비 출신이었지. 안 그렇나, 당지명?”
“…어떻게…….”
온갖 난리를 치는 방계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침묵을 삼키고 있던, 아니, 형언하기 힘든 복잡한 안색으로 먹먹하게 서 있던 당지명이 덜덜 떨리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반문은 곧 당유혼의 질문에 대한 긍정을 뜻하는 것.
깜짝 놀란 방계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지, 진짜입니까?”
“저 용독문주가 본가의 재산을 빼돌린 도둑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지, 그럼 그 말을 왜 진작 안 해주셨습니까?”
“후우…….”
한숨을 푹 내쉰 당지명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인 당유혼을 한 번 일견한 뒤 짧게 답했다.
“너도 말했지 않느냐. 말도 안 되니까.”
“아…….”
말한다고 해서 누가 믿어줄까. 아니, 들어나 줄까?
꾸욱―
으스러져라 주먹을 움켜쥔 당지명이 고개를 돌렸다.
“대형. 혹시, 이 모든 상황이 대형께서 의도하신 것입니까?”
“원래라면 그렇다고 하겠지만… 아니, 이 판을 이리 끌고 온 것은 내가 아니다. 나도 깜짝 놀랄 만큼, 우리들의 가주님께서 저질러주신 거야.”
그래서 기대가 되었다. 자신이 인정할 정도의 심계를 지닌 저 어린 가주가 이제부터 보일 유쾌한 반란이.
웅성웅성.
관중들은 혼란으로 가득 시선으로 모두가 한쪽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 있는 것은 사천성주 휘하의 관리들. 성주가 직접 오지 않는 이상, 그 뜻을 대신하는 저들이야말로 이곳에서 가장 적합한 말을 해주리라!
하나,
“후후, 가주님께서는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 순간 대답이 들려온 곳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으니.
늪처럼 깊고 뱀처럼 음험한 목소리는 단번에 충격에 휩싸인 좌중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저자는…….’
‘채용?’
쥐 상의 남자.
하지만 결코 우습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들의 내장을 파먹지는 않을까 싶은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용독문의 군사가 군중을 가르며 연무장 위로 올랐다.
“…….”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당가주의 시선에 가벼운 미소로 응답한 채용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당위혼의 세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재밌는 말이라고 하셨습니까?”
먼저 입을 연 것은 당위혼.
“예. 아주 유쾌한 농담으로 이 자리의 무수한 귀한 분들께 던진 농으로는 퍽 성공적이셨습니다.”
뱀 눈초리와 같은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농담이 아닙니다만.”
“후후, 그러면 그건 참 무척이나 위험한 말씀이시군요.”
한점 떨림조차 없는 게, 오히려 당위혼보다 긴장하지 않은 듯했다.
사뿐사뿐.
남은 세 걸음의 거리마저 좁혀 손에 쥐어진 서책을 응시한 채용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 낡은 책이군요. 책상물림의 삶을 살아온 이 서생이 보기에 삼십 년은 훌쩍 지난 그런 서책으로 보입니다.”
“책이 낡았다고 해서 진품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 책에는 분명 관인이…….”
“아아, 관인. 그렇지요. 그 관인을 한 번 볼까요?”
턱―
어느새 서책의 반대편을 쥔 채용이 흘깃 관인이 찍힌 자리를 훑었다.
그러고는,
“역시, 이 관인 역시 당대 성주님의 것이 아니군요.”
사천성주의 관인은 성주의 자리가 바뀔 때마다 새롭게 파내진다. 당연, 삼십 년 전의 관인이 지금과 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성내의 관리들께 검증을 맡기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렇겠지요. 한데, 하필 삼십 년 전이군요.”
삼십 년 전.
그 시간은 사천성의 성민들에게 특별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 끔찍한 시대. 온갖 혼란이 일어나고, 끔찍한 재해가 들이닥쳐 사천이 환란에 시달리던 시대. 그 시대에는… 감히 국법에서 금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요사스러운 혀가 음험한 교언을 그렸다.
“재밌지 않습니까? 그 시대에 떨쳐 일어나 누구보다 사천성 내의 혼란을 수습하려 주도했던 것이 바로 우리 용독문이었지요.”
채용은 한 손을 가볍게 가슴께에 올렸다.
“구호품을 풀고, 혼란을 틈타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하던 흑도의 패거리들을 제압하고… 민간 차원에서 그 누구보다 평화와 안녕을 도모한 것이 바로 용독문이었습니다.”
그 구호품이 당가의 곳간에서 훔쳐 온 재물일지라도. 흑도의 패거리를 제압하고 그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한 것일지라도.
용독문의 뱀은 진실이 또 다른 일면을 보여도, 진실을 교묘히 이용하며 계속해서 속삭였다.
“한데, 그런 우리들의 진심을 의심하는 분들이 있다니… 참으로 시기적절하지 않지 않습니까? 하필, 그 시대에는 그저 침묵으로 방관하던 당가에서 말입니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번창을 질투하여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지 않냐고.
“제 말이 순전히 거짓이라는 것입니까?”
“글쎄요. 본문의 세력이 커지고, 성세가 번창함에 질시하던 세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리는 바로 본문에 의해 토벌당하고 그 뿌리가 뽑히기 직전인 사파의 패거리들이 그것을 주도한다더군요. 후후후…….”
웃음소리가 장내에 흘렀다.
“제아무리 찬란한 태양도 지게 마련이지요. 한때 영광을 누리던 이들이 몰락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노릇.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무너지는 가세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
그래서 무엇을 했다는 것인지,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채용의 이야기 중 명확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군중들의 마음속에 한 줄기 씨앗을 심는 데 성공했다.
의심.
깊게 박혀 지워지지 않는 그것은 순식간에 싹이 트고 뿌리를 내려 음모라는 꽃을 피워냈다.
“하긴, 저 명부가 진짜일 리 없지.”
“당가의 가주가 미쳐서 가짜 노비명부를 만든 것 아냐?”
“허… 하다 하다 이제는 관인까지 복제를…….”
“어쩌겠어. 당가도 몰릴 데까지 몰린 상황인데.”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수군거렸고, 그 ‘그럴듯한’ 추측들은 모여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어갔다.
“히야… 그놈, 참 뱀의 혀를 가진 새끼로다.”
“대, 대형?”
“지금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가주에게 향하는 말들에 좌불안석이 된 방계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그들의 대형을 바라보았다.
“그럼 뭘 하는데?”
“그, 그거야 저희도 모르죠!”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저희 가주님이……!!”
“쯧쯧, 됐다.”
그들의 재촉에도 당유혼의 반응은 심드렁했으니, 오히려 표정이 이상해진 것은 방계들이었다.
“왜, 왜 저러시지?”
“원래라면 턱주가리를 돌려 버리겠다고 날뛰셔야 하는 분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
하나, 당유혼은 낀 팔짱을 풀지 않은 채 턱을 까딱였다.
“틀린 말은 아닌데. 이럴 때 나보다 더 어울리는 양반이 있거든.”
“옙?”
“저 교활한 뱀 같은 놈을 잡는 덴 우직한 뱀꾼이 제격이지.”
그리고, 그런 멍청하리만치 우직한 사람이라면 딱 한 명밖에 떠오르는 이가 없다.
무려 삼십 년 전에도, 자신을 향해 꿋꿋하게 대들던 유일한 한 명.
“대 당가의 꼴통이 저기 나가시는구만.”
가리킨 손가락 끝에, 인파를 헤치며 연무장 위로 달려 나가는 당궁상이 있었다.
“이노오오오오오오오옴!!!”
수군거리는 군중의 소란을 가로지르는 외줄기 함성!
채용이 낮고도 음험한 교언으로 군중을 압도했다면, 이건 그냥 생고함으로 군중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당가의 총관.’
그리고 채용 역시 당궁상을 바라보았다.
‘후후, 다음은 당신인가?’
당가의 어린 가주는 침묵했고, 이제 그다음은 당가의 늙은 가주다. 어차피, 누가 나오든 상관없었다. 그의 언변이면 그 누구든 침묵시킬 수 있을 테니. 그러니까…….
“당ㄱ…….”
“이노오오오오오오오오옴!!”
누구라도 그와 대화를 한다면,
“…가의 총…….”
“이 어린 노무 쉐끼가아아아아아아!!”
하기만 한다면,
“관을… 뵙…….”
“몇 살이냐, 이노오오오옴!!”
…뭐지? 환술인가?
‘뭐, 뭐 이런 무식한 것이…….’
말만 섞으면 된다. 그럼 상대가 누구든 자신의 언변으로 유린할 수 있을 텐데…….
“어디 사특한 망발을 지껄이는 게냐!!”
“이놈! 이분이 누구신지는 아느냐!!”
“나 때는 말이야!!”
도저히 말할 틈을 안 준다.
“낄낄낄, 네놈 같은 것들을 알지. 딴에는 뛰어난 지성의 책사이니 군사이니 하겠지만… 그런 놈들에겐 무지성이 제격이란 말이야.”
그런 당궁상을 바라보며 당유혼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초, 총관님……?”
“꾸, 꿈인가?”
방계들은 땅으로 파고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 뭐야?”
“저 양반은 또 누구야?”
‘이, 이게 무슨…….’
가까스로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은 채용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 잠깐!! 이게 무슨 패악스러운 짓입니까!”
“패악질?”
그게 뭔 개 풀 뜯어 먹느냐는 시선에, 채용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여기가 길거리 좌판도 아닌데 어찌 이리 무도한 소란을 일으키십니까?”
“무도? 무우우도오오오오오?!”
잘 걸렸다는 듯 소리치는 당궁상의 눈이 뒤집혔다.
“이 새끼야, 너 말 잘했다. 너 몇 살이야, 인마. 네가 삼십 년 전에 이 사천 땅에 있긴 했느냐? 네가 거기서 엄마 젖이나 빨고 있을 때 나는 현역이었다. 이 피도 안 마른 놈아!!”
“무, 무슨……!”
“그리고 뭐, 당가는 뭘 했냐고?”
펄럭―
분에 못 이긴 건지, 괴성을 질러대던 당궁상이 윗도리를 벗어젖혔다.
좌중들은 웬 미친 노인네가 드디어 탈의까지 진행하나 싶어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허어.”
“이런…….”
그들의 안색인 곧 일그러지고 말았다.
어깻죽지로부터 옆구리까지 길게 그어진 거대한 자상이 우선 하나. 복부의 부위별로 이리저리 나 있는 칼자국이 대 여섯. 구멍이 뚫렸다가 아문 흔적은 열 개도 넘었으니…….
그 삶의 흔적이 드러나는 몸뚱이를 관중 쪽으로 향한 노인은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 보이며 소리쳤다.
“내 몸속에 사파 새끼들의 칼 파편이 여덟 개나 박혀 있소이다! 이건 당가의 이십팔 년 전 흑도문에게 칼 맞은 자리요. 이쪽은 이십칠 년 전 흑사문에서, 이십오 년 전 녹림 패거리에게, 이십이 년 전 삼살귀에게! 그리고 이 단전 위는 십구 년 전 패악문에게! 당가는 무엇을 하였는지 묻고들 있는데, 당가는 언제나 최전선에서 사마외도의 척결과 싸워왔소! 가족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보던 심정들을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모를 것이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보냈는지! 그건, 사천을 지키고자 옥처럼 부서져 나갔던 당가의 붉은 마음이었소이다, 사천의 동도들이여!”
“…이상이오.”
길고도 장황한 말이 끝났을 때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당궁상의 몸은 어떤 언변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산 역사의 증거였고, 또한 그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였으니.
짝짝짝―
누군가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할 때,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곳을 돌아보고 말았다.
“훌륭하군.”
그리고 군중들은 놀라고 말았다.
‘저,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아니, 그보다… 대체 언제?!’
언제 이곳에 당도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를 본 이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왜냐하면…….
“사천의 주인으로서, 그대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는 바로 진정한 사천의 주인.
사천당가에게 붙여주던 단순 비유 상의 표현이 아닌, 진정 이 땅의 주인이었으니,
“나 사천성주가 그대의 공을 치하하는 바외다.”
사천성주가 어느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